87. 깨침의 길 2

“말할 수 있는 것은 분명히 말하라. 그러나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하라.”

언어철학자인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ㆍ1889~1951)의 유명한 말이다. 우리는 상대방의 말이나 행동을 보고 그 사람을 쉽게 규정하는데, 사람의 감정이나 확인되지 않은 사실들에 대해서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검증되지 않은 사실들을 예단해서 말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의미다.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서로 확인이 가능한 것들에 한해서다. 예를 들어 두 친구가 길을 걷다 하늘을 보더니 “먹구름이 몰려오는 걸 보니 비가 오려나봐”라고 말하는 것은 가능하다. 서로 먹구름이 끼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분명한 것만 말하고 그렇지 않은 것에는 침묵한다면, 사람들 간의 오해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삶이 어디 그럴 수 있겠는가.

그의 말을 종교에 적용하면 무척 난처해진다. 종교는 검증의 영역을 넘어서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침묵밖에 없다. 특히 붓다의 깨침을 논할 때는 더욱 더 할 말이 없어진다. 깨침은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言語道斷) 마음으로도 헤아릴 수 없는(心行處滅) 종교적 체험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붓다는 45년 동안이나 언어도단의 세계에 대해 엄청난 말들을 쏟아냈다. 팔만대장경으로 상징되는 수많은 말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있을 수 없다. 이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종교학자인 오강남 교수의 <열린 종교를 위한 단상>에 실린 우물 안 개구리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우물 안에 여러 개구리들이 살고 있었는데, 한 개구리가 밖으로 나가려고 하였다. 자신이 본 하늘이 과연 저만큼인가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러 번 시도해보았지만 매번 떨어지는 바람에 쉽게 나갈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개구리는 온힘을 다해 뛰어올랐고 기적처럼 우물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밖으로 나온 개구리의 첫 마디는 ‘아!’라는 감탄사였다. 우물 안의 하늘과 끝없이 펼쳐진 하늘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는 비로소 자신이 보았던 하늘은 그저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치게 되었다. 그는 새로운 세계에 흠뻑 취해 여기저기를 여행하면서 맘껏 즐겼다.

그런데 개구리는 문득 우물 안에 있는 친구들에게 이 멋진 세계를 보여주고, 그 안에서 본 하늘은 실재(reality)가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우물 안으로 돌아온 개구리는 벗들에게 자신이 경험했던 드넓은 들판과 시냇물, 나무 등에 대해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들 모두 우물 밖을 나가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고민 끝에 그는 저 넓은 들판을 내 배의 ‘2배’만큼이나 넓다고 소개한다. 그제야 비로소 다른 개구리들은 ‘아하,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개구리는 왜 그렇게 말했을까? 우물 안에서 가장 큰 숫자는 2였기 때문이다. 비록 저 넓은 들판의 실제 모습과는 다르지만, 우물 안에 있는 개구리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2’라는 상징(symbol)을 동원해서 설명했던 것이다. 상징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체험을 ‘2배’라는 우물 안 언어를 통해 바깥 세계와 연결해주는 수단이었다.

여기에서 우물 밖으로 나간 개구리는 붓다나 그리스도, 마호메트와 같은 종교적 체험을 한 인물을 가리킨다. 우물 밖 세계는 직접 체험하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붓다는 수많은 가르침을 통해 사람들이 직접 우물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안내한 길잡이였다.

그렇기 때문에 체험과 언어 사이에는 간극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개구리 배의 ‘2배’는 결코 우물 밖 들판의 실재가 아니다. 이는 마치 싯다르타가 마야 부인의 오른쪽 옆구리에서 태어났다는 기록을 사실이라고 믿는 것과 같다. 종교 경전에 상징이나 비유(analogy), 은유(metaphor) 등이 동원되는 것도 바로 체험과 언어 사이의 간극 때문이다. 이 간극을 줄이기 위해 붓다는 45년 동안 언어의 길이 끊어진 깨침의 세계를 중생들의 언어로 전하고자 고군분투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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