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담은 불화 ‘감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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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자 극락왕생 기원한 수륙재
中 양무제가 처음으로 시작해
齋서 활용한 도상인 ‘수륙회도’
조선시대엔 ‘감로도’ 도상 정착
하단에 당시 시대상 반영 ‘눈길’?

조선 전기인 1580년에 조성된 ‘감로도’. 하단에는 마차와 말에 깔려 죽는 장면, 호랑이에 물려 죽는 장면, 머리가 잘려 죽는 장면 등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시대에 따라 변하기도 한다.

지난 연재에서 인간의 윤리와 효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빛을 발휘한 불교 경전이 〈부모은중경〉이며, 이를 그림으로 도해한 것이 ‘부모은중경변상’이라고 하였다. 또한 효와 조상숭배에 대한 가장 구체적인 의식행위를 꼽는다면 아마도 ‘수륙재(水陸齋)’일 것이다. 

수륙재는 죽은 영혼을 위로하고 극락왕생을 빌기 위해 행해진 의식으로, 이때 봉안하는 불화라고 하여 수륙화(水陸畵), 수륙회도(水陸會圖)가 있다. 또한 아귀(餓鬼)에게 감로(甘露, amrta, 阿密젠多)를 베풀어 극락 왕생케 한다는 의미에서 시아귀도(施餓鬼圖), 감로도(甘露圖)라고 하며, 〈우란분경〉의 내용을 도해했다고 하여 우란분경변상도라고 한다. 영가천도를 행하는 하단에 봉안돼 영단탱(靈壇幀)이라고 하거나 감로여래왕을 비롯한 칠여래(七如來)와 여러 불보살이 감로법을 내려 영혼 천도를 이끌고 있어 감로왕도(甘露王圖)라고도 한다.

먼저 수륙회의 역사를 살펴보면 중국의 수륙회는 육조시대(六朝時代)에 양나라 무제가 보지화상(寶誌和尙)의 조언을 듣고 망혼(亡魂)들을 구제하고, 그들의 극락왕생과 성불을 위해서 505년에 진강 금산사(鎭江 金山寺)에서 시작한 법회였다. 

그 이후 당대를 거쳐 오대북송, 원대, 명대, 청대를 거쳐 중국 각지로 전파되면서 그림에 도상이 추가되거나 사회상을 반영하며 변화되었다. 돈황 막고굴 17굴에서 출토된 중당시기(781-848)의 한 발원문에는 “도량을 만들어 여러 부처들을 불러 망자의 혼을 축원하기 위한 재를 연다”는 기록이 있어, 이미 8세기 경에는 중국 내륙뿐만 아니라, 변경 지역까지도 수륙재가 유행하였다고 볼 수 있겠다. 

중국의 수륙회와 관련된 그림으로 이른 사례가 금대(金代) 1158년에 그려진 산서 번치현 암산사(山西 繁峙 岩山寺)의 정전벽 벽화로 알려져 있으나 훼손이 심하여 형상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아쉽게도 원대(1271-1368)의 산서 직산 청룡사(稷山 靑龍寺)의 후불전 벽화와 하북 석가장 비로사(河北 石家莊 毘盧寺)의 후불전 벽화를 통해서 초기 수륙회도의 도상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 수륙회도들은 거대한 전각의 삼면에 적게는 120폭에서 많게는 200여 폭에 이를 정도의 장황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민간에서 신앙의 대상이 되었던 유불선(儒佛仙)의 거의 모든 신들과 호법신중, 왕실 인물, 문무백관, 승려, 다양한 계층의 속인들, 환난의 다양한 장면, 굶주린 아귀들 등을 도해하고 있어 조선의 불화처럼 하나의 장면에 담기에는 결코 불가능하다.

중국의 수륙재가 한반도로 전래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신라 진흥왕 33년 572년에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병사들을 위해 7일 동안 팔관회를 행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사실 수륙재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한국의 문헌에 기록된 가장 이른 사례의 수륙재는 고려 광종(光宗) 19년 귀법사(歸法寺)에서 시행되었다고 한다. 고려 시대의 수륙재는 팔관회나 연등회처럼 중요한 불교 행사의 하나로 자리 잡아 외로운 혼을 천도하며, 대외적으로는 민심을 수습하거나 병을 치료하기 위해 국가적인 행사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수륙재를 거행할 때 사용되는 그림인 ‘감로도’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통해서 볼 때 이미 제작 때부터 야외에서 시행되는 수륙재를 위해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세종실록〉 16년 1434년 4월 11일자에는 “임자년(1432) 봄에 크게 무차지회(無遮之會)를 열었다. 승려들이 구름같이 모여 한강가에서 하루가 지나고 열흘이 넘도록 진행되었다. 매우 호화스럽고 사치스럽게 단을 차려 깃발과 일산이 해를 가리고, 종과 북소리가 땅을 흔들었다. 그림으로 천당과 지옥의 반야(般若)를 그리고, 생사와 화복의 응보를 보여주니, 이에 귀천과 남녀를 논할 것 없이 모두가 보고 듣고자 모여 성안은 텅 비었고 관문과 나루는 길이 막혀 통과하지 못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를 통해 조선 시대에는 수륙재를 위해서 야외에 그림을 걸어서 사용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수륙재는 정부가 주관하여 진관사(津寬寺)에서 거행하는 국행수륙재(國行水陸齋)와 민간에서 거행하는 수륙재의 두 종류가 있었으며, 국행수륙재가 폐지된 후에도 민간에서는 왕실, 양반층, 서민층에 의해서 근대기까지도 수륙재가 이루어졌다.

고려시대의 감로도가 유전하지 않는 상황에서 그림 하단의 화기를 통해 조선 전기인 1580년에 제작된 감로도를 현존 최고의 감로도로 꼽을 수 있다. 화면은 상중하단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상단은 아미타삼존과 일곱 여래(다보여래·보승여래·묘색신여래·광박신여래·이포외여래·감로왕여래·아미타여래)가 지옥의 중생들을 맞이하러 오는 장면과 인로보살(引路菩薩)이 바람에 휘날리는 오색번을 들고 극락으로 인도하는 장면이 표현되어 있다. 

중단은 실제로 거행되는 천도재를 화면에 옮겨놓은 것으로, 화려한 공양물이 놓인 시식단(施食壇)과 천인들, 왕후장상(王侯將相), 상복을 입은 상주, 법고·호적·광쇠를 치는 의식승과 경전을 외우는 송경승들이 의례를 행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감로도의 수혜자 혹은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2구의 아귀가 합장을 취한 모습으로 시식단의 좌측에 커다랗게 묘사되어 있다. 

하단은 물에 빠진 사람과 배를 타고 있는 망자, 춤추는 걸립패, 마차와 말에 깔려 죽는 장면, 호랑이에 물려 죽는 장면, 머리가 잘려 죽는 장면, 형벌을 받다 죽는 장면, 도적에 목숨을 잃는 장면, 돌에 깔려 죽는 장면 등 죽음과 관련된 여러 장면들이 그려져 있다. 

조선시대의 감로도는 20세기 초 1939년에 제작된 흥천사 감로도에 이르기까지 상단의 여래·중단의 의식행위와 아귀·하단의 망혼들과 환난 장면이 묘사된 화면의 삼단구성이 고정화되어 계승됐고, 다만 시대마다 하단에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한 도상들이 표현되었다는 점이 매우 흥미롭다. 

흥천사의 감로도의 하단은 독립된 직사각의 공간에 서구 근대화의 상징인 자동차, 터널을 지나는 기차, 서커스 장면, 양장을 입은 신사와 숙녀, 서양식 건물과 간판, 전차, 우체국, 대장간, 전신주, 재판하는 모습, 말을 탄 일본 순사와 노역하는 조선인, 스케이트를 타는 모습, 교복을 입은 학생 등 한국의 근대기를 생생하게 담고 있다. 흥천사 감로도를 포함한 대략 50여 점의 조선의 감로도는 단순히 전통도상의 계승에 그치지 않고, 하단 부분에 묘사된 육도 중생의 다양한 환란과 죽음 장면에 당시의 시대상을 꾸준히 반영하여왔다고 할 수 있다. 

‘감로도’라는 명칭과 기원에 대해서 다양한 의견들이 존재한다. 그 이유는 감로도는 여타의 불화처럼 특정한 소의 경전을 근거로 하여 제작된 그림이 아니기 때문이다. 처음 감로도를 봉안하여 수륙재를 지냈을 당시에는 수륙회에 거는 의식용으로서만 인식하여, 그림의 화기에 명칭을 명확히 밝힐 필요성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짐작건대 화면을 구성하고 도상을 그려 넣은 화승들은 단지 영가천도를 위한 수륙재에 사용되는 불화라고만 인식하였을 것이다. 감로도를 보면 어린 시절 사진관에서 본 회갑 잔치상을 그린 커다란 배경 그림이 떠오르는 것이 결코 우연은 아닐 것이다. 

더불어 기원에 대해서는 중국 수륙화의 영향을 받은 조선 전기에 시식문화, 시식의례, 다양한 신앙, 현실의 생활상 등이 결합 되어 중국과 일본에 없는 한국 불화만의 상중하단 구성의 독특한 화면과 도상들이 탄생된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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