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합 불교’ 지향한 명나라 선지식

잇달아 부모를 여의고 출가결심
부인도 출가… ‘주금’ 법명 활동
계율 중시 ‘선원청규’ 정비나서?
방생결사 등 대중포교에도 힘써
선정·선교일치 등 융합사상 강조

중국 절강성 항주 운서산에 있는 운서주굉 선사의 묘. 묘지명에 ‘명 굉불혜연지대사(明 宏佛慧蓮池大師)’라고 쓰여 있다.

명나라는 14세기 원나라를 멸망시키고, 순수 한족이 세운 왕조이다. 1367년 안휘성 출신의 주원장은 어려서 전염병과 가난으로 가족을 모두 여의고, 각황사에서 승려 생활을 하였다. 주원장은 나라를 ‘명(明)’이라고 칭했다. 명나라는 한족의 유교 문화를 회복하면서 강력한 왕권을 강화하였다. 태조 주원장(1328~1398)은 불교에 호의적이며, 불교를 보호했다. 명대는 교종이 발전했으며, 선종(임제종)과 정토종이 크게 발전했다. 

명나라에 훌륭한 4대 고승이 있다. 운서주굉·감산덕청·우익지욱·자백진가이다. 이중 명대를 대표하는 선사를 한명 꼽으면 단연코 운서주굉이다. 

주굉의 행적          
운서주굉(雲棲?宏, 1532~1612)은 절강성 항주(杭州) 출신이다. 자는 불혜(佛慧)이고 호는 연지(蓮池)·운서(雲棲)이다. 연지대사(運池大師)라고도 한다. 7세에 소학에 들어갔고, 9세에는 경서를 공부해16세까지 익혔는데, 뛰어난 자질을 보였다. 17세에 학문을 하여 덕행과 문장 또한 뛰어나 유생에 선발되어 무리 중에 지혜가 제일이었으나 과거에는 나아가지 않았다.뜻이 출가에 있었기 때문이다. 

주굉은 20세에 장 씨와 결혼해 행복한 가정생활을 하기도 했고, 결혼을 두 번하기도 하였다. 27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30세에 어머니 상을 당했는데 주굉은 매우 슬피 울며 ‘어버이의 은혜는 망극하다. 내가 이 은혜를 갚으려면 바로 이 길밖에 없다’라고 생각하고 출가를 결심했다. 1565년 섣달 그믐날, 주굉은 부인 탕(湯) 씨와 차를 마시며 이렇게 말했다. 

“은애(恩愛)란 허망한 것이요, 생사는 어느 누구도 대신해 줄 이가 없소. 나는 이 집을 떠나 출가하려고 하니, 그대는 스스로 갈 길을 정하십시오.”

부인은 주굉의 말을 듣고 놀라지 않고 담담히 말했다. “당신이 먼저 떠나십시오. 저도 출가할 예정입니다.”

부인 탕씨는 이생의 마지막 인연이 될 남편을 먼저 보내고, 가산을 정리한 뒤 출가하였다. 그녀는 법명을 주금(?錦)이라고 했으며, 효의암(孝義庵)에 살았다. 행실이 청정하고 고귀하여 ‘보살 비구니’라고 불렀다고 한다. 주금 스님은 주굉보다 한해 먼저 입적하였다.      

주굉은 31세에 오대산 무문성천에게 출가하여 변융에게 화엄을 배웠다. 이후 여러 지역을 발초첨풍한 뒤에 소암 덕보(1512~1581)의 법을 이었다. 선사는 동창이란 곳을 지나다 초루의 법고 소리를 듣고 홀연히 깨달았다. 1571년 37세 때, 항주의 운서(雲樓)에 연지사(蓮池寺)를 짓고 살면서 제자 교육과 저술에 전념했다.

선사는 계율을 중시해 〈선원청규〉를 제작해 도량을 정비하였다. 주굉은 철저하게 계율을 강조했고, 늙고 병든 승려가 거처하는 곳과 행각승을 위한 거처를 분리했다. 

주굉은 1615년에 열반했는데, 세수는 81세 승랍은50세였다. 저서로는〈능엄경〉 〈아미타경〉 〈범망경〉 등 여러 경전을 주석했으며, 〈치문숭행록〉 〈자지록〉 〈죽창수필〉 〈선관책진(禪關策進)〉 등이 있다. 주굉에게 유발제자가 많은데, 이들 중 2명은 〈명사(明史)〉와 〈열전(列傳)〉에 전기가 실려 있는 관리이고, 9명은 과거시험에 합격한 진사이다. 왕양명의 제자 가운데 나여방(羅汝芳, 1515~1588)은 선을 하였고, 또 한 제자는 출가해 주굉의 제자가 되었다.  

 〈석감계고략속집〉에서 환륜은 주굉에 대해 평하기를 “살아서는 복록이 융중하였고,입적한 뒤에는 오랫동안 덕이 면면이 흘러왔다”라고 하였다. 선사 입적 후에 왕우춘은 대사의 저서들을 모아서〈운서법휘(雲樓法彙)〉34권을 한데 묶어 간행하였다. 

선·경전에 입각한 사상 
주굉은 경전인 교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서 선을 우위에 두었다. 주굉의 저서를 통해 살펴보자. 

“사람은 누구나 좋아하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늙어간다. 괜찮은 취미는 골동품 모으기ㆍ거문고와 바둑 두기·시 읊기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괜찮은 것은 독서이고, 독서보다 더 좋은 취미는 경전 독송이다. 그런데 독경보다 더 괜찮은 취미는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일이다. 마음이 청정해지는 경지에 이르는 일이 세간·출세간에서 가장 훌륭한 일이다.”-〈죽창수필〉中

주굉은 교와 선 가운데서 마음 닦는 선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주굉의 선은 반드시 경론에 입각해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진정한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여러 조사의 문답, 기연(機緣)으로 생사(生死)를 결단코 끊는 것이 공안이다. 문답 가운데 긴요한 일구를 화두라고 하는데, ‘일귀하처(一歸何處)’, ‘왜 무라고 하는가(因甚道無)’ ‘염불하는 자가 누구인가(念佛是誰) 등이다. 1700 공안이 모두 이와 같다.” - 〈선관책진〉中

선사는 교보다 선에 무게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주굉은 당시 선이 쇠락한 원인은 깨치지도 못했으면서 할이나 방 등을 함부로 남용하고 있음을 꾸짖고 있다. 

“참선자는 교외별전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교를 무시한 참선은 삿된 인因을 낳고, 교를 무시한 깨달음은 삿된 견해를 일으킨다.” 
“간경은 반드시 폭이 넓어야 비로소 융관하여 편집에 빠지지 않게 된다. 대개 경은 이곳에서 건립하면 저곳에서 소탕하고, 이곳에서 소탕하면 저곳에서 건립하여 어떤 상황과 수준을 따랐을 뿐, 일정한 법이 없기 때문이다.”  - 〈선관책진〉中

‘건립’은 긍정을 의미하며, ‘소탕’은 부정을 의미한다. 폭넓게 배우면서 한 경전에 빠지지 말고, 경전 내용을 서로 서로 맞춰 보라는 것이다.  

정토사상 및 선정(禪淨) 일치 
주굉의 정토사상을 먼저 보자. 

“만약 수행자가 계율에 철저하다면, 계율은 부처님께서 정한 것이니, 당연히 염불도 좋아하게 될 것이요, 혹 어떤 수행자가 경전을 본다면 경은 부처님의 말씀이니, 기꺼이 염불하기를 좋아하게 될 것이다. 또한 수행자가 참선을 한다면,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니 기꺼이 염불하기를 좋아하게 될 것이다.” - 〈운서유고〉 ‘보권념불왕생정토’

〈아미타경〉을 풀이한 〈미타경소초(彌陀經疏抄)〉에서는 “아미타불 명호 부르는 것은 수많은 공덕을 한꺼번에 다 갖추는 것이고, 아미타불 명호만 부른다면 온갖 수행법을 빠짐없이 갖추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주굉은 염불을 강조하며, 염불수행법이 계정혜(戒定慧) 3학(三學)을 두루 포함하고 6바라밀을 빠짐없이 갖춘 법문이라고까지 하였다. 주굉은 정토가 필요 없다고 하는 선자는 ‘오만불손한 이들’이라고 힐난하며, 이들은 불법을 부정하지 않지만 불법을 수용하는 태도가 독선적이고 배타적이라고 보았다. 훗날 우익 지욱도 염불정토를 ‘최극원돈법문’이라고 하며 주된 수행법으로 삼았는데, 이는 주굉의 영향을 받아서이다.  

선정일치 사상을 보자. 주굉은〈아미타경소초〉를 통해 선과 염불을 동일하게 수행하는데 있어 방해받지 않으며, 최대한 몰입되어 불성을 깨닫는 실천이며, 오히려 염불선이 다른 수행법보다 수승하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오롯이 선만으로 해탈하기 힘들지만 염불수행을 곁들이면 완벽하지 않더라도 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고 보았다. 주굉은 사람들이 선에 큰 비중을 두면, 불법에 쉽게 접근하지 못할 것을 염려해 염불을 주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선이란 정토의 선을 말하고, 정토란 선의 정토를 가리킨다(禪的淨土 淨土的禪)”고 하였다. 또 염불로 아미타불에 가까이 접근할 때, 깨달음을 빨리 얻을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결사조직 구성 및 활동 
명나라 말기는 여러 분야에서 결사가 있었다. 이때불교 결사를 조직하고, 참여하는 일이 유행하였다. 주굉은 거사들을 불교 안으로 수용하기 위해 유학과 불교의 합일점을 찾으며, 이들이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먼저 거사들에게 수행론으로 공과표를 실천하라고 하였다. 일생동안 공과(功過)에 따라 사람 운명이 결정된다는 도교의 공과격(功過格)을 불교에서 차용한 것이다. 원요범(袁了凡, 1533~1606)은 〈음즐록〉에서 운명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선·악업에 의한 것이라고 하면서 선을 실천해 공덕을 쌓으라는 뜻이지만, 이런 공덕으로 인해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주굉은 〈음즐록〉을 응용해 〈자지록(自知錄)〉이라는 저서를 통해 신도들에게 실제 적용토록 하였다. △충실하고 독실한 행위 △이타적이고 자비로운 행위 △삼보에 이로운 행위 △자잘한 선한 행위들을 선한 공덕으로 보았고, 이에 반대되는 행위로는 과(過)로 분류되었다. 즉 선행에 행하는 공(功)은201가지,악행인 과는279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이와함께 주굉은 방생결사 방생회를 결집하였다. 선사는 폭력적인 정치상황,그리고 사치와 더불어 살생이 증가하던 사회상황에 반성적 성향을 가지고 있던 사대부들에게 불교의 자비를 제시하며, 전사회적인 방생결사 운동에 나섰다. 이 방생 결사에 황궁의 황비가 관심을 갖고 물어올 정도였다. 

이에 주굉은 제자들과 더불어 1580년에‘상방회(上方會)’라는 이름으로 방생결사를 조직했다. 상방회 구성원들은 폐사 두 곳을 매입해 방생지(放生池)를 만들었다. 방생 집회에는 사대부들을 비롯해 여러 각계 각층 사람들이 운집했는데, 종종 무차대회가 이뤄지기도 했다. 이 방생결사에는 종교를 넘어 수많은 이들이 모였고, 사회 운동 성격을 띠기도 하였다. 

주굉 사상은 한 마디로 화쟁·융합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법화경〉이 ‘삼승방편 일승진실’을 내세우며, 성문·연각을 인정하면서 일승을 지향하듯, 선사도 염불·선·간경 등 각각의 수행을 인정하며 중시하였다. 〈선관책진〉에서는 주굉은 ‘공부는 오로지 한가지에만 마음을 쏟아야 한다.’고 했지만, 그 하나에 국집(局執)하는 것을 염려했다. 그러면서 선과 정토의 일치, 교와 선의 일치, 불교와 도교·유교 일치 등을 강조하였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