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없는 세상 나아가는 한 걸음

상월결사, ‘중생 찾아가는 불교’ 선언
자자회서 자승 스님 강조한 ‘차별없음’
일체생명 존중받는 차별없는 미륵세상
순례 회향, 중생 일깨우는 새로운 행보

“부처님, 당신의 가르침이 필요한 곳, 당신의 가르침이 구현되어야 할 곳은 세상입니다. 당신이 고행을 버리고 은둔자들의 숲을 떠나 마을 가까운 숲으로 찾아가셨듯이, 저희도 이제 위례신도시의 황량한 뜨락으로 찾아왔습니다. 저희에겐 이곳이 부다가야가 될 것입니다.”

지난해 겨울, 위례신도시 아파트 건설현장 한 귀퉁이의 비닐하우스에서 시작된 천막결사에 동참한 아홉 분 대중 스님의 고불문 한 구절이다. 도심 한가운데를 부다가야로 삼아 붓다의 삶을 좇겠다는 서원이 이 고불문의 한 구절에 오롯이 담겨있다. 산중의 조선불교 500년, 그리고 불교 대중화를 위한 근대 100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도심 속 중생의 삶에서 동떨어져 있었기에 중생이 찾아와야만 만날 수 있었던 600년의 한국불교가 도시 속의 중생을 찾아나서는 대전환의 첫 행보를 이 고불문은 담고 있다. 

그래서인지 2019년 11월의 동안거 입재로부터 코로나19가 확산되기 시작하던 2020년 2월의 해제에 이르기까지, 3개월 동안의 상월선원 동안거 천막결사는 야단법석의 난장이었다. 중생의 삶, 중생이 맞닥뜨리고 있는 세상의 고통으로부터 동떨어진 수행이 아니라, 그것에 정면으로 부대끼고 끌어안고자 하는 서원에서 시작된 불사(佛事)이자 결사(結社)였다. 

결사 현장을 방문한 중생의 입장에서는 결사대중 아홉 스님의 수행을 통해서 맞이하는 동중정(動中靜), 곧 삶의 현장에서 ‘불법(佛法) 만나기’였다. 반면 비닐천막 안에서 수행정진으로 일관한 결사대중 아홉 스님의 입장에서 보면 야단법석을 펼치며 결사를 응원하는 도심 대중들이, 정중동(靜中動) 곧 불법(佛法) 가운데서 반드시 끌어안아야 할 ‘중생 만나기’였을 것이다.

산중 선방(禪房)이 아니라 도심 속 비닐하우스 천막선방에서 진행된 동안거 결사는, 그래서 최근 600년의 우리 불교 역사에서는 전혀 새로운 방향성을 담보하고자 하는 서원이 담겨 있었다. 그것은 ‘중생이 찾아오는 불교’가 아니라 ‘중생을 찾아가는 불교’로의 첫 걸음이었다.

상월결사는 한국불교의 최근 600년의 프레임을 전환하는 첫 걸음이었지만, 불교의 역사에서 본다면 깨달음을 성취한 부처님의 첫 번째 행보, 사르나트행을 재현하는 반본환원(返本還原)의 첫 걸음이기도 했다. 불교의 근본정신을 돌이켜 되살리는 것이 전통적인 결사(結社)의 정신인데, 여기에 오롯이 담았다 할 것이다. 

지난해 겨울의 동안거 천막결사에서 시작된 ‘중생을 찾아가는 한국불교’를 선언한 상월결사의 두 번째 행보가 일단락되었다. ‘한국불교 중흥과 국난극복’을 기치로 내걸고 치러진 ‘만행결사 자비순례’가 그것이다. 

10월7일 팔공총림 동화사의 약사여래대불 앞에서 봉행된 입재식으로 시작한 만행결사 자비순례 결사대중의 행보는 순례 20일째인 10월 26일에 500km의 여정을 거쳐 서울 봉은사 미륵대불 앞에 이르렀다. 두 번째 행보는 상월선원 동안거 천막결사의 정신을 현재화하고 구체화하기 위한 노력이 결사대중에 의해 끊임없이 탐색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결사는 한 번의 이벤트일 수 없다. 결사는 끊임없이 되새겨지고, 결사의 정신을 구현하고 실천하려는 모색이 지속될 때만, 역사 속에서 그 의미를 획득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붓다께서 깨달음을 성취하신 데서 만족하고, 사르나트로부터 시작되는 45년의 교화행을 펼치지 않았다면, 오늘날 불교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상월결사의 정신을 구현하려는 정진과 실천의 움직임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상월결사는 그저 한 번의 이벤트에 그치고 말았을 것이다. 

코로나로 인한 세계적 위기는 상월결사의 두 번째 행보를 제약하는 사회·환경적으로 악조건이었다. 중생의 고통을 직시하고 함께 하는데 있어서, 대면과 접촉은 아주 중요한 조건이다. 하지만 코로나 위기는 그 대면과 접촉을 제약하는 악조건을 제공하였다. 상월선원의 만행결사 자비순례의 행보는 그러한 악조건을 딛고서 진행된 ‘중생 순례길’이며, 중생이 당면하여 겪고 있는 고통을 함께하는 자비순례를 목표로 세운 한걸음 한걸음으로 새긴 서원이었다. 일반적인 코로나 방역보다 더 엄격한 규정을 적용하여 코로나 확산의 우려를 불식해야 했고, 마스크를 쓴 채여서 숨이 가빴지만 느리게 느리게 걸어야 했던 500km였다. 뭇 생명 하나하나의 존귀함을 놓치지 않아야 했던 걸음걸음이었기에 무게감이 작지 않았을 것은 물론이다.

이 여정의 정점은 봉은사 보우당에서 개최된 ‘상월선원 만행결사 자비순례 자자회’이다. 이 자리에서 상월선원 회주인 자승 스님은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 두두물물 개유불성(頭頭物物 皆有佛性),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세 가지 키워드를 대중에게 제시하면서 공통점이 무엇인지 찾아줄 것을 요청하였다. 대중들의 다양한 그러면서 정답에 근사한 답변에 이어, 자승 스님이 내놓은 정답은 “차별 없음”이었다. 

필자는 자승 스님을 비롯해 동참대중들이 비슷한 답변에 이르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500km 순례길의 결사가 낳은 하나의 마음이 뭇 생명들의 “차별없는 고귀함”이었기에. 그래서 “불교의 미래는 차별없는 세상을 사부대중이 만들어 나가는 데 있다”는 스님과 동참대중들의 다짐과 서원은 오늘 우리가 만들어가야 하는 불교를 새롭게 그려내었다. 

동화사의 약사여래불에서 봉은사의 미륵대불에 이르는 자비순례의 길. 약사여래불은 고통받는 중생, 고통받는 세상에 대한 직시이다. 미륵불의 용화세계는 일체 생명의 고귀함이 온전히 존중받는 차별없는 세상이다. 이제 약사대불에서 미륵대불에 이르는 결사대중의 순례길은, 코로나와 근대 100년 동안 한국사회에 누적되어온 사회적 갈등과 고통을 함께 직시하고 함께 끌어안아서 함께 극복해가는 길을 제시하는 중생순례, 생명순례, 부처님 순례가 되었다. 

마침 회향하는 날은 10·27법난을 당한 바로 그 날이다. 40년 전에는 법난을 만났지만, 40년 후의 오늘에는 중생을 끌어안고 행복공동체를 꿈꾸는 결사의 순례길 끝에서 회향을 맞이한다. 그리고 그 회향의 자리에서 중생을 일깨우는 내일의 새로운 행보가 시작될 것이다. 

중생을 일깨우는 것은 겉모습이 아니다. 중생을 일깨우는 것은 겉만 번드레한 접촉이 아니다. 중생이 부대끼고 있는 현실의 괴로움에 대한 마음에서 우러나는 진정한 공감과 소통만이 중생을 일깨우는 지름길일 것이다. 

마음으로 접촉하고(mind touch), 마음으로 함께하는(mind-tact) 공동체의 길! 상월결사가 제안한 두 번째 행보, 자비순례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불교가 제시해야 할 뉴노멀(new normal)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일깨우고 있다. 이제 마음으로 닿고, 마음으로 함께 하는 서원의 공동체 시대를 준비하고 동참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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