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로자나불 왜 대웅전에 있을까

???????주불·협시보살 맞춘 전각명
맞지 않는 사찰들도 존재 해
대부분 임란 후 중수 되면서
전각명과 주불 차이 생겨나

나주 불회사 대웅전.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모셨다. 불상은 고려 시대 후기 또는 조선 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전각은 조선 정조 때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사찰의 중심 전각이자 석가모니 부처님이 계신 곳은 대웅전(大雄殿)이다. 한자 그대로 위대한 영웅으로 번역되는 대웅(大雄)은 산스크리트어 ‘마하비라(Mahvra)’를 한역한 것이다.

그런데 구글에서 마하비라를 산스크리트 철자 그대로 쳐 검색해 보면 한참을 넘겨도 석가모니 부처님 얘기는 찾을 수 없다. 8할 넘게 인도 자이나교의 창시자인 바르다마나가 계속해서 검색된다. 부처님과 같은 지방에서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바르다마나가 ‘먼저’ 대웅이라는 칭호를 얻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법화경>을 비롯한 대승경전에서 대웅이라는 이름을 적극적으로 차용하면서 ‘대웅’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이칭(異稱)으로 자리잡는다. 

앞에 말했듯이 사찰의 대웅전(大雄殿)은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곳이다. 대개 좌우보처는 문수·보현보살이나 가섭·아난존자인 경우가 많다. 격을 높여 ‘대웅보전(大雄寶殿)’이라고 할 때는 삼세불을 모시는데 석가모니 부처님을 중심으로 좌우에 각각 약사여래와 아미타불이 협시를 한다. 하지만 삼세불을 모셔도 굳이 대웅보전이라 하지 않고 대웅전이라고 한 곳이 많다. 이제 그 구별이 무의미할 정도다. 그런데 대웅전이든 대웅보전이든 그 모습이 ‘정형’을 벗어난 곳이 또 너무 많아 어리둥절하기도 하다. 

별도로 제시한 표는 ‘전형적’인 전각 이름과 주불 그리고 좌우협시불(보살)의 예다. 하지만 거개가 그렇다는 것이지 ‘꼭’ 그렇다는 것이 아니다.

석조여래입상으로 유명한 진천 용화사는 아예 대웅전이라는 이름이 없다. 옛 대웅전 자리로 추정되던 곳에 ‘박가범전(薄伽梵殿)’이라는 전각이 들어서 있다. ‘박가범’이라는 이름이 낯설 수 있겠지만, 벌써 짐작한 독자도 있을 것이다. ‘세존’이라는 단어는 산스크리트어 ‘바가완(Bhagavan)’의 역어다. 이 단어를 한역하면서 구마라집은 ‘불(佛)’이라고 음역했고 현장 스님은 ‘박가범(薄伽梵)’으로 음역했다. 중국이나 대만불교를 접하다 보면 요즘도 간혹 ‘박가범’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는 곳이 있다. 우리의 장경각에 해당하는 전각에 ‘박가교장(薄伽敎藏)’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는 곳도 가끔 보인다. 

여하튼 대웅전이라는 이름 대신 박가범전이라는 이름이 있는 걸 보고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더 신기한 건 박가범전 뒤편에 여느 절 산신각만한 크기로 여래전(如來殿)이라 이름 붙인 전각이 또 있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도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셔놓았다. 분명 무슨 사연이 있었으리라.

대웅전에 있는 비로자나불·아미타불
대적광전이나 적광전, 비로전, 화엄전 등의 주존인 비로자나불이 대웅전에 모셔진 경우도 있다. 또 아미타전이나 극락전, 무량수전 등의 주존인 아미타불이 대웅전에 모셔진 경우도 있다. 

대웅(大雄)이 아니라 대광(大光)인 비로자나불이 자리하고 계신 곳 중에 가장 대표적인 곳이 법주사다. 어찌된 사연인지도 모르고 부처님이 바뀐 곳이 많지만 그래도 이곳은 그 사연이 문헌과 자료에 비교적 튼실하게 남아 있다. 

고려 시대부터 나라의 대표 사찰로 승승장구하던 법주사는 조선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 왜군의 방화로 잿더미가 된다. 이때 사찰 재건을 주도했던 분이 사명대사인데 여러 전각을 새로 지으며 현재 법주사 대웅보전 자리에 ‘대웅대광명전’이라는 이름의 전각도 ‘재건’하게 된다. 원래 ‘대웅대광명전’이 있었고 이를 다시 세웠다는 말이다. 인조 때에는 벽암 각성 선사가 삼신불상을 조성했다는 기록도 있는데 삼신불상이라면 대개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노사나불과 석가모니불을 배치한다.

그런데 흥선대원군 시절 현판이 대웅보전으로 교체된다. 조선 후기에 ‘유행’에 따라 사찰 주전각의 이름을 대웅보전으로 교체했다는 주장인데 사실 여기에도 사연이 있다. 고종 때 대원군이 경복궁 역사에 필요한 당백전(當百錢)을 만들기 위해 사찰을 대대적으로 훼손한 기록이 보인다. 이때 여러 전각과 불상이 피해를 입었고 남은 전각과 불상을 대대적으로 정비하는 과정에서 현판 교체가 일어났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법주사 대웅보전과 비슷한 유전(流轉)을 갖고 있는 곳이 또 있다. 선운사 대웅보전이다. 이곳 역시 대웅보전이라는 현판이 있지만 안에 모셔진 부처님은 주존이 비로자나불이고 좌우에 각각 약사불과 아미타불이 모셔져 있다. 비로자나불 대좌 밑에서 발견된 묵서명에 의하면 1633년 조선 후기의 대표적 조각승 무염 스님이 조성한 것으로 되어 있다. 선운사 역시 전쟁의 화마를 피해가지 못했다. 1597년 정유재란으로 대부분의 사찰 건물이 불에 탔고 결국 광해군 5년(1613)년 중건됐다. ‘대웅보전’이라는 이름은 아마 중건과 삼불상을 모신 어느 시기쯤 붙여진 이름일 수 있다. 아니면 1840년 원래 2층이었던 건물이 장마로 인해 무너지면서 1층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붙여진 이름일 수도 있다. 

이렇게 전각의 현판과 부처님이 일치하지 않는 사례는 대부분 전쟁 중 화마를 입었거나 여러 가지 이유로 전각이 훼손돼 중건되는 과정에서 자리 잡은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대웅전을 ‘큰법당’정도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져본다. 실제로 선운사 스님들은 현판과 모셔진 부처님이 맞지 않아서 그런지 대웅보전을 ‘큰법당’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많다. 

나주 불회사 역시 비로자나불을 모시고 있으면서 대웅전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안에 있는 비로자나불은 고려 후기나 조선 시대 전기의 불상이고 전각이 새로 지어진 것은 정조 23년(1799)이다. 역시 앞의 사례와 비슷하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다. 양산 신흥사다. 아름다운 벽화 때문에 그림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답사 1번지로 꼽히는 이곳에는 대광전에 석가모니 부처님이 모셔져 있다. 이곳 역시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화마에 휩싸인다. 하지만 대광전만은 온전히 남아 있었다고 한다. 안에 모셔진 불상은 17세기 후반의 것으로 추정된다. 전각은 그대로 남아 있었는데 부처님이 바뀐, 앞의 사례와 반대의 경우다. 특히 내외벽에 그려진 벽화 역시 아미타삼존이어서 그런 추측을 더욱 가능하게 한다. 

대웅전이 두 개인 곳 장곡사
대웅전이 두 개인 곳도 있다. 청양의 장곡사다. 흔히 아래쪽에 있는 대웅전을 하대웅전 위쪽에 있는 대웅전을 상대웅전이라고 나눠 부른다. 

정확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대웅전이 두 개인 이유를 설명하는 ‘설’ 역시 분분하다.  우선 상대웅전은 천상세계를 나타내고 하대웅전은 사바세계를 나타낸다고 하는 ‘설’이다. 멋들어지긴 하지만 설득력도 없고 감흥도 떨어진다. 

가장 설득력 있는 설명은 ‘사람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상대웅전은 고려 말 혹은 조선 초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역시 전각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비로자나불이 주불이다. 좌협시는 약사여래불, 우협시는 아미타불이다. 주불로 보면 대적광전이고 협시로 보면 대웅보전이다. 그런데 상대웅전의 약사여래불의 영험이 대단했던 모양이다. 전국에서 약사여래불의 가피를 받으려는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

결국 상대웅전 밑에 하대웅전 영역을 따로 만들게 된다. 하대웅전은 조선 중기 때의 건물로 추정된다. 이곳의 주불은 약사여래불이다. 이때도 약사전이라 이름 붙일 만 했지만 역시 대웅전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조선 초중반을 넘어서면서 대웅전이라는 명칭은 큰법당 정도로 인식되었다는 걸 반영한다. 

아예 전각 이름을 바꾸다
조계종의 25개 교구본사 가운데 대웅(보)전이나 대(적)광전 현판이 없는 곳은 모두 두 곳이다. 그중에 봉선사 ‘큰법당’은 불경 한글화를 서원한 운허 스님의 원력으로 현판이 바뀐 것이니 대웅전이라는 내용이 바뀐 것은 아니다. 그런데 대웅전이나 대적광전이 ‘진짜’없는 사찰이 있다. 바로 은해사다. 여기에도 전각 이름과 부처님이 일치하지 않아 만들어진 사연을 담고 있다. 

원래 은해사도 대웅전이라는 현판이 달린 전각이 있었다. 하지만 안에는 아미타불을 주불로 모시고 있었다. 전각과 모셔진 부처님이 맞지 않으니 2009년 사찰 창건 1200돌을 기념하는 법회 때 대웅전이라는 현판은 박물관으로 모시고 극락보전이라는 현판을 새로 달았다. 

대중이 많은 절집에서 땅 파는 것만큼 어렵게 생각하는 게 어른들이 부르던 ‘이름’을 바꿔 부르는 것이다. 그렇게 놓고 보면 쉬운 결정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름을 바꾸자고 대중공사도 여러 번 했을 터인데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아직도’ 이름을 바꾸지 않은 전각에 대해 뭐라 할 이유도 없다. 실수나 오해도 켜켜이 쌓이면 역사가 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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