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깨침의 길 1

우리나라는 부처님오신날(음4.8)을 비롯하여 출가재일(2.8), 성도재일(12.8), 열반재일(2.15)을 불교의 4대 명절로 정하여 기념하고 있다. 사찰마다 사정이 다르겠지만, 부처님오신날을 제외한 나머지 기념일은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언젠가 제법 규모가 큰 교구본사를 방문했다가 올해 성도절을 어떻게 기념했는지 물어봤더니, 절에서는 특별한 행사 없이 평소처럼 보냈다는 것이었다. 어찌 보면 불교에서 제일 중요한 날인데, 그냥 지나쳤다는 얘기를 듣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렇다면 불교에서 성도재일(成道齋日)은 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이날은 글자 그대로 도를 이룬 성도(成道), 즉 석가모니의 깨침을 기념하는 날이다. 성도절이 중요한 것은 중생 싯다르타가 도를 이루고 깨달은 사람(覺者), 즉 붓다(佛)가 되었으며 그분의 가르침(敎)이 곧 불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금 엄밀히 말한다면, 불교의 역사는 석가모니의 탄생이 아니라 성도에서 시작된다고 보아야 한다. 성도절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싯다르타가 도를 이룬 그날 보리수 아래에서는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소부경전〉 ‘우다나’ 편에는 그때의 소식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참으로 진지하게 사유하여 일체의 존재가 밝혀졌을 때, 그의 의혹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다. 그것은 바로 어린 시절부터 싯다르타를 괴롭히고 급기야 출가의 길로 들어서게 한 생로병사에 대한 의문이 진지한 사유(思惟)를 통해 해결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중생 싯다르타를 깨달은 붓다로 이끈 원천은 다름 아닌 생각(生覺)에 있었던 것이다. 성도는 잠자고 있던 싯다르타의 삶(生)을 일깨운(覺) 종교적 체험이었다.

철학자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는 생각이란 기대하지 않았던 사건과 조우할 때 발생한다고 하였다. 이 말은 생각은 익숙한 상황이 아니라 낯선 상황과 만날 때 일어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항상 아파트 101동에 주차하던 사람이 그날 저녁 늦게 귀가하는 바람에 102동에 주차했다고 해보자. 그 사람은 다음날 아침 102동이 아니라 101동으로 갈 확률이 매우 높다. 평소 101동에 주차했던 습관 때문이다. 그런데 101동으로 가면 차가 보이지 않는 낯선 상황과 만나게 되고 ‘왜 차가 없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어젯밤 일은 그때 비로소 떠오른다.

싯다르타가 생각을 하게 된 계기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사문유관(四門遊觀), 즉 늙고 병들고 죽은 사람과의 ‘낯선’ 만남을 통해 ‘삶과 죽음이란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출가를 하고 치열한 수행 끝에 깨침에 이르렀으며 불교라는 새로운 종교가 탄생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생각은 한 사람의 삶을 바꿔놓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엄청난 에너지를 갖고 있는 셈이다.

붓다의 깨침과 사유는 우리의 실제적인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왕자 싯다르타의 궁중 생활은 익숙한 상황의 연속이었기 때문에 생각을 일으키기에 좋은 환경이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는 사는 대로 생각하기 마련이다. 주체적인 삶이 아니라 아버지 정반왕이 원하는 대로 살았던 것이다. 그러나 성문 밖의 낯선 만남을 통해 그는 주체적인 삶, 즉 사는 대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생각대로 사는 일대 전환을 이루었다. 붓다의 출가와 성도에서 우리는 이것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불교가 생생하게 살아있는 나의 문제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은지성 작가의 책 제목처럼 사람은 ‘생각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업(業)의 관성 때문에 그렇다. 중생이란 다름 아닌 사는 대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욕망에 맞추느라 삶이 늘 정신없이(mindless) 흘러갈 뿐이다. 물건 하나를 사더라도 내가 진정 원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의 욕망이 투영되어 지갑을 열게 된다. 그러나 붓다는 생각대로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늘 깨어있는(mindful) 삶을 산다. 중생에서 붓다로 질적 전환을 이루는 비밀이 ‘생각’에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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