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고승전, 범해선사시집, 범해선사문집, 연담대사임하록

동국대 불교학술원(ABC사업단)에서는 지난 5개월에 걸쳐 조선후기 고승의 전기와 문집 4종을 출판했다.

범해각안, 연담유일, 금명보정 등 대흥사, 송광사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대강백의 수행력과 학문적 깊이를 살펴볼 수 있는 이들 저술은 최근 학계에서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조선후기와 말기 그리고 근대 초의 불교사, 불교사상사, 불교문학사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선행 번역서가 일부 존재했으나 필요 이상으로 난해하고 내용의 연결이 매끄럽지 않다는 지적이 여러 차례 있었다.

이에 불교학술원 역주편찬팀에서는 학계에서 필요로 하는 명쾌한 주해와 일반인들이 요구하는 가독성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방법을 고민했다. 그리하여 원문을 철저히 교감하고 사실과 어휘를 주도면밀하게 주해하는 등의 작업을 거친 시리즈물을 기획했다.

이번에 출판된 책들은 <조계고승전>(금명 보정錦溟寶鼎 저/ 김용태⋅김호귀 옮김), <범해선사시집>(범해 각안梵海覺岸 저/ 김재희 옮김), <범해선사문집>(범해 각안 저/ 김재희 옮김), <연담대사임하록>(연담 유일蓮潭有一 저/ 하혜정 옮김)이다.

이들 중 가장 먼저 출간된 <조계고승전>은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전반의 격동기를 살았던 금명 보정이 편술한 책이다. 보정은 송광사 승려로서 조선후기의 양대 불교계파 중 하나인 부휴계의 법맥을 이었다. 본서는 송광사를 매개로 하여 고려후기 보조 지눌과 수선사 계통의 조사, 조선후기 부휴계 계보를 잇는 주요 승려들의 승전을 모아 엮은 것이다. 이 책의 서명에 조계가 들어간 데에는 지눌에서 부휴계로 이어지는 조계산 송광사의 전통을 계승하고 조계종을 선양하려는 저자의 의도가 깔려있다. 조계를 내세운 이 책이 나오면서 당시 조계종 종명이 불교계와 학계에서 다시금 주목받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1941년 한국불교의 종명이 조계종으로 정해졌다.

<범해선사시집>의 맨 앞부분을 장식한 작품은 석옥 청공(石屋淸珙)의 <산거시>에서 차운한 장편의 시다. 고려 말 삼가(三家)인 백운(白雲)⋅태고(太古)⋅나옹(懶翁) 화상은 석옥화상 산거시의 전통을 계승한 산거시를 남겼다. 이는 곧 석옥 청공의 임제종 선맥을 계승한다는 하나의 상징적 행위로 해석된다. 범해선사도 이런 법통을 계승하려는 의식적인 맥락에서 산거시를 지었고 본 시집의 편집자도 이런 점을 인식해서 첫 작품으로 실은 것으로 보인다. 시집에는 같은 승려들에게 준 수증시가 많으며, 운수행각의 결과물인 기행시도 등장한다.

<범해선사문집> 제1권에는 기(記)⋅발(跋)⋅설(說)⋅변(辨)⋅논(論)⋅명(銘)⋅찬(贊)⋅축(祝) 등의 형식으로 32편의 글이 수록되어 있고, 제2권에는 상량문(上樑文)과 각종 서문⋅모연소⋅서(書)⋅제문(祭文) 등의 글 42편과 행장이 실려 있다. 이 책은 조선후기와 말기에 걸쳐 전개된 승려와 유학자의 교류 양상과 함께 세 차례에 걸친 대사의 국토 유람의 자취와 감흥을 잘 담고 있다. 특히 대사의 역사에 대한 관심이 주목되는데, 일반 역사 관련 저술로는 <사략기>(史略記), <통감기>(通鑑記) 등이 있다. 뿐만 아니라 최치원의 삼사일사비(三師一寺碑)에 주석을 붙인 <사비기>(四碑記), <대둔사지약기>(大芚寺志略記), <아육왕탑변>(阿育王塔辨), <불조원류 서문>(佛祖源流序) 등은 대둔사의 역사는 물론이고 고대에서 조선말에 이르는 한국불교사에 대한 관심을 반영한 것으로 사료적 가치가 있다.

가장 최근에 나온 <연담대사임하록>(蓮潭大師林下錄)은 18세기에 <서장사기>(書狀私記) 등을 저술하여 큰 영향을 끼친 연담 스님의 문집이다. 4권 2책의 시문집으로 구성된 이 책은 1799년(정조 23) 전라남도 영암(靈岩) 미황사(美黃寺)에서 제자 영월 계신(靈月 誡身)이 목판본으로 간행하고, 그 후 대흥사로 옮겨져 보관되었다. 다른 문집과 구별되는 뚜렷한 특징은 권두와 권말에 저자가 직접 쓴 <임하록자서>(林下錄自序)와 <연담대사자보행업>(蓮潭大師自譜行業)을 싣고 있다는 점이다. 문집은 사후에 자제나 제자들이 발행하는 경우가 통상적이지만 연담은 자신의 생전에 문집 간행을 준비했던 것이다. 이는 시문이 불교를 전파하는 데 유효한 방식이라는 인식에 따른 것으로, 당시 연담은 유학자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불교의 필요성을 적극적으로 역설했던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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