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말과 행동, 그리고 사상

긍정적 사고와 발언이
긍정적 사태를 만들어
플라시보 효과로 입증

상대배려의 언행 필요
언어와 사고 관계 고찰
코로나 극복 지혜 나와

부처님 당시나 지금이나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부처님의 행보는 충격적이다. 아직까지도 인도 내에서는 카스트제도가 엄연히 살아있고, 현재의 많은 국가들이 자유와 평등을 외치고, 민주주의를 표방해도, 인종차별, 계층차별, 남녀차별, 빈부차별, 지역차별 등 각종 차별들은 여전히 살아있다. 지금부터 약 2600년 전, 부처님은 서슴없이 평등을 외쳤다. 불가촉천민의 출가, 여성의 출가 등 출가 이후 불가촉천민이든 왕족이든 평등한 대우, 연령무관의 출가 등 인간이 만든 무수한 틀을 과감히 타파하였다.

지금도 고대시대에 존재했던 차별행태가 세계 곳곳에서 만연하고 있다. 이러한 부처님의 충격적 사회개혁은 아직까지도 좀처럼 쉽게 변화되기 어려운 것들이다. 더구나 지역이나 사람들에 맞는 언어구사는 부처님의 배려와 친절, 자비의 상징이다. 그 언어구사에는 다른 언어, 그리고 계층이나 연령, 등 선호도에 맞는 내용, 어렵고 쉬운 말의 강도 등을 상대에 맞게 이야기해주는 자비심과 지혜였다. 깨달음의 심오하고 깊은 이치를 이야기하기까지 깊은 고심이 있었던 부처님이었지만, 중생을 위해 입을 열어야겠다는 용기와 함께 또 하나의 위대성은 진리의 대중화로 이끈 점이다. 이를 위해 100인 100색의 사람들에 맞는 스피치로 설득을 해야만 했고, 시의적절하고 안심시킬 수 있는 설법을 했다는 점이다. 이 점이 진정한 대승보살의 운동이자, 불교적 혁신운동이다. 위없는 깨달음을 위한 대중포교, 대중설법, 대중스피치가 바로 대승불교의 힘이다. 아라한, 출가수행자 못지않게 재가자에게도 이 가르침을 설(스피치)한 부처님의 자비심은 무한하고 광대하다.

안심법문의 부처님 스피치
불교의 목적은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인데, 그 핵심 가르침은 괴로움에서 벗어나 즐거움을 누리는 안심법문 즉 이고득락(離苦得樂)과 모든 존재들에게 유익한 행위 즉 요익중생(饒益衆生)이다. 도를 닦아 해탈하거나 도인이 되라는 것이 아니다. 대승불교의 문을 활짝 열어 제친 인물 중 세친보살(世親, Vasubandhu)이 있다. 세친은 불교의 핵심 가르침을 30게송으로 정리하였다. 세친은 초기불교, 대승불교를 두루 거쳐 이 둘을 통합한 이론으로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세친은 자리이타(自利利他) 즉 자신 뿐 아니라 남을 이롭게 한다는 기본신념을 강조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도 중요하고 남도 중요하고 내 주변, 내 인연, 내 인식이 다 중요하다. 부처님의 중도를 확장시켜 보다 현실적으로 설명한 따뜻한 법문이 세친이 지향하는 ‘유식’이다. 부처님의 안심법문, 세친의 따뜻한 법문이 다 우리에게는 생명수 같다. 나를 제대로 알고, 나와 대화하고, 나를 인정하고 수용하면서 남을 이롭게 하는 수행으로 확장시켜 나가게 인도한다. 요즘 붐이 되고 있는 명상도 이 안에서 설명되어진다. 내가 나를 돌봐 편안하게 하고 동시에 남을 돌보는 이 마음을 키워나가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 유식의 골자다. 

우리가 쉽게 하는 말로 ‘긍정적인 마음을 가져라. 긍정의 말을 하라’라는 말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유식에서도 저 밑의 제8아뢰야식에 무의식적으로 자기도 모르게 저장되기 때문에 생각과 말은 그만큼 중요하다. 모든 존재는 입자와 파동으로 되어있다고 한다. 서로간의 말이 없어도 느껴지는 그 무엇, 또는 엄청나게 멀리 떨어져있어도 상대를 생각하는 마음이 상대에게 전달되는 그 무엇, 이런 것들이다. 더불어 누군가에 대해 긍정으로 생각하면 그 긍정의 파동이 서로 연결되어 같이 느낀다는 것이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서로 느껴진다. 가깝게는 자기 마음속의 생각이 내 몸의 장기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점이다. 더 작게는 세포들이 알아듣는다. 내 마음의 소리에 따라 세포가 슬퍼하거나 죽거나 신이나 하거나 한다. 내가 긍정이라고 생각하면 그렇게 움직여진다는 것이 놀랍다. 바로 플라시보 효과(placebo effect)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노시보 효과(nocebo effect)도 마찬가지다. 부정으로 생각하면 제아무리 옳은 것이라 해도 부정이 되어버리는 것과 같다.

말에 대한 성찰이 명상이다.
따라서 긍정이다 부정이다. 혹은 옳다 그르다 등의 주장은 나의 전부가 아니며, 내가 알고 있는 것의 전부가 아니다. 아는 것을 주장할 것이 못되며 모르는 것을 사유할 줄 알아야 한다. 이 사유라는 것이 관건인데 다른 말로 하면 관찰이다. 여러 가지 감정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는 그저 관찰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 자신에게 말을 걸어본다. ‘아, 지금 화가 나는구나. 화가 나려고해’이러한 말이다. ‘이런 것을 분노라고 하는 거야’라고 감정에 이름을 붙인다. 나를 위로하고 나에게 친절하게 하기 위한 수순이다. 마음의 작용이 시작될 때 아뢰야식도 함께 움직인다. 내가 나에게 위로해주고 따뜻한 말로 표현해주는 스피치가 중요한 이유가 바로 이 지점 때문이다. 세친보살은 이러한 방식의 설명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달해주었다. 요즘 초기불교와 그에 따른 명상이 유행이다. 대승불교의 한계를 들먹이면서까지 초기불교에 대한 부각이 커지고 있다. 불교역사에서 큰 획을 그은 대승불교가 불교의 새로운 혁신운동이 된 의미를 새겨본다.

그런 의미에서 대승불교의 출현은 지극히 혁신적이었으며, 새로운 바람의 진보적인 불교였다. 그러나 현대는 초기불교 운운하며, 대승불교가 마치 오래된 유물인 것처럼 여기는 것은 어패가 있다. 명상은 초기불교의 것이라기보다는 그냥 불교 그 자체이다. 

‘이 세상은 가짜이며 허구다. 삶과 죽음은 둘이 아니다. 우리는 생각과 고정관념에 속박되어 있다. 머릿속 생각들 모두가 다 속박일 뿐이다.’

흔히 듣는 불교적 문구들이다. 이는 초기불교를 과감히 벗어던지고 돌발적인 쇄신을 불러 외친 대승불교의 목소리였다. 제 2의 석가라는 칭호를 받는 용수보살(龍樹, Nagarjuna)이나 천재적 지혜를 대변하는 세친보살이나, 보살의 칭호까지 받으며 우뚝 선 대승불교의 두 거봉이다. 불교의 지적인 핵심이론을 해체시키며 그 허구를 또한 해체시켜버린다. 탈이분법적 논리학으로서 강한 논리를 들이댄다. 우리의 생각이 다 허구이며 가짜임을 당당히 언사로 표현하였다.

‘이언견언(以言遣言)’ 즉 생각을 통해 생각을 부수듯, 말을 통해 말을 부수어버리는 과감하고도 통쾌한 짓을 용수는 실행해 보인 것이다. 흔히 불교는 ‘말’과 먼 듯 이야기하고 있으며, ‘말’의 경시도 부족해, ‘말’의 도외시, 무시, 무관심 등으로 비춰오곤했다. 그러나 가장 선적인 것이 가장 언어적인 것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생각이 허구임을 폭로하기 위해 용수보살은 과감히 말이라는 수단을 멋들어지게 사용하였다. 불교의 목적은 괴로움과 고통에서 벗어나 평안과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다. 말에 대해 경시하는 풍조는 말에 얽매인다는 반증이며, 말에 속박당해 힘들다는 표현으로 보인다. 

요즘 명상이 붐이고 유행이다. 불교의 성장세를 가늠할 수 있는 명상의 대중화는 실로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불교 내에서 보면, ‘명상은 곧 초기불교의 한 부분이며, 초기불교만이 부처님의 진수를 보여주는 것으로서’ 등으로 일관하며 권장 경전이나 인용 경전도 초기불교경전이 오리지날인 듯 비춰지는 모습에 의아해지곤 한다. 초기불교이후 수만 갈래로 나누어진 불교이론들을 각성시키고 단칼에 깨부수고 대승불교라는 거대한 구름을 만들어 모이게 한 것은 분명 쇄신과 혁신의 종교개혁이었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으신 후 첫 제자인 5비구들에게 첫 법문을 설한 내용은 ‘중도’였다. 양극단에 치우치지 말라는 내용부터 말씀하신 것이다. 용수보살의 중관학도 이 중도를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용수보살이야말로 부처님의 가장 최초의 말씀으로서, 초기불교의 색깔을 가장 짙게 칠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대승의 거목이지만 초기불교의 최초설법을 말했다. 아직도 우리는 양극단에 치우치길 멈추지 않고 있다. 이분법적 논리를 즐겨 사용하고 있다. 용수보살은 이러한 것을 타파하기 위해 강한 논리적 표현인 논법을 사용하였다. 즉 말에 의해 말을 버린다. 

이러한 방법이 본격적으로 세련되게 나타난 것이 중국의 선불교다. 중국 스님들의 행적들 중에서 그분의 말씀은 게송, 시로 남으며 곧 화두가 된다. 선승들의 행적과 말씀은 기이하고 특이해 동문서답하는 식의 오리무중의 화두로 남아 참선수행의 도구로 남아있다. 이 또한 말이다. 깨달음을 얻기 위한 화두스피치에서 깨달음을 얻고 나서 환희에 찬 오도송 즉 깨달음스피치, 그 제자들을 깨우치기 위해 사용한 화두인 선문답스피치 등으로 확산되었듯이, 선은 철저히 언어의 종교이다.

이 시대에 해야 할 불자의 도리
동북아시아의 오롯한 대승의 정신이 남아있는 한국불교, 그 한국불교가 퇴색해가는 것은 아닌지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대외적 상황인 코로나19, 기온변화에 의한 자연재해 등으로 사람들은 정신이 혼미할 정도의 당황스러운 순간을 지내고 있다. 따뜻한 말, 친절한 말로 서로를 보듬어주고, 부처님의 따뜻한 자비의 말씀을 전하고, 이를 통해 자연과 순응하며 좀 더 겸손한 자세로 돌아가는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 여기에 적극적인 표현력이 동원되어야 할 것이다. 말은 하지 않으면 할 줄 모르게 된다. 그러다보면 상대에 대한 배려가 없어지고, 내 위주의 아상만 자라나게 된다. 필요한 말을 표현하는 능력이 바로 불교의 힘이 될 것이다.

〈불교스피치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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