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자비와 분노

내면의 평화 깨뜨리는 번뇌
인내가 근본적 처방은 안되
중도적 해결방법 ‘바라보기’
호흡 크게 쉬고 제3자 되면
감정이 내가 아님을 깨달아

20-1 마음의 평온을 흔들어놓는 가장 큰 적 중 하나가 분노임엔 이의가 없을 겁니다. 그래서 분노는 가장 근본적인 번뇌라 하셨지요. 일상에서 만나는 자잘한 분노, 관계를 그르치는 분노부터 생명까지 빼앗는 분노, 무차별적 살인, 대량 살육...등 분노에도 다양한 종류가 있는데... 정의와 평화를 가장한 분노도 있습니다. 물론 좋은 분노, 의로운 분노도 있는데 그 기준은 무엇인가요? 자신과 남을 해치지 않고 유익할 때입니다. 그러나 조심할 것은 사회적 공분이라는 미명하에 자신의 증오와 적개심을 정의로 포장한다면 결코 선하다 할 수 없겠지요. 따라서 분노가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좀 더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20-2 번뇌라는 말은 내면의 평화를 깨뜨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번뇌가 일어나면 마음이 즉각 괴로운 상태로 됩니다. 괴로움은 잔잔한 평온함이 깨지고 혼란과 격동을 일으킨 수면과 같습니다. 이 거친 감정은 화와 미움, 혐오에서 증오로 커져갑니다. 마음의 격랑은 이에 머무르지 않고 복수의 칼을 갈고 살해 계획부터 살인까지 저지르고, 아니면 칼을 자신에게 향해 자해 행동과 자살을 시도하기에 이릅니다. 수많은 전쟁과 살육 또한 이러한 괴로움의 표현이지요.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평화가 아닌 또 다른 괴로움을 낳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승리는 내면의 괴로움인 번뇌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이라 하셨군요. 내면의 불길이 잡히지 않았는데 겉으로 평화가 왔다고 전쟁이 종식된 것은 아니지요. 내면의 불길을 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배우자와 가족들과 사회 생활에서 번뇌가 일어날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20-3 모든 종교적 가르침은 화를 참고 ‘인내하라.’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하지만 그게 가능했나요? 참는 것은 근본적 처방이 될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화를 분출하는 것도 아니고 화를 참는 것도 아닌 제3의 방법(중도)은 무엇일까요? 모든 영적 전통의 가르침은 번뇌의 일어남을 ‘바라보라’입니다. 화나는 과정을 낱낱이 보는 것이지요. 화를 표출하거나 억압하는 반응 대신 멈추고 바라보고 깊이 살펴보는 숙고 명상을 통해 자신의 화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깨닫게 됩니다.
 
20-4 화는 참으려 해도 참을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참을 ‘인(忍)’자를 수없이 써보고 되뇌여도 막상 상황에 부딪치면 까맣게 잊어버리곤 하지요. 이때 어찌 해야 할까요? 명상이 답입니다. 명상을 배운 경우 화를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있습니다. 머리끝까지 펄펄 뛰는 화 속에서 호흡을 바라봅니다. 호흡이 어떻게 쉬어지고 있는지 바라봅니다. 이제 화가 나는 일련의 과정을 바라봅니다. 심장이 급하게 뛰고 혈압이 오르고 온뭄의 근육이 긴장되고 눈은 험악하게 부릅뜨고 숨이 거칠어지고 얼굴이 붉어집니다. 아드레날린이 분출되어 반응하는 몸의 변화들이지요. 이러한 몸의 변화들과 함께 마음의 변화도 바라봅니다. 화가 치밀어 안 된다구요?(웃음)
 그렇다면 호흡을 깊고 크게 쉬어봅니다. 최대한 들이마시고 최대한 길게 내뿜습니다. 다시 깊이 들이마시고 더이상 마실 수 없을 때에 숨을 멈추고 온몸을 긴장시킵니다. 더이상 참을 수 없을 때까지 참으며 주먹을 꽉 쥐고 팔과 다리, 얼굴, 그리고 온몸의 모든 근육에 힘을 잔뜩 주었다가 내뿜으며 온몸을 이완시킵니다. 풍선에 가득 찬 공기가 빠져나가듯이 서서히 길게 내뿜으며 얼굴 어깨 목 팔다리 손가락 발가락까지 긴장을 풉니다. 화가 어느 정도 진정되면 보통 호흡으로 돌아 옵니다. 이제 화를 돌아봅니다. 무엇이 그렇게 화나게 만들었나요? 어떤 경우 화가 치미는지 눈을 감고 깊숙이 살펴봅니다.(1-2분)

20-5 상대방이 나를 무시했다고들 말합니다. 무시란 무엇인가요? 무시라는 것은 내가 상대에게 뭔가 기대했는데 그게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입니다. 상대가 무시했다고 생각되는 경우 그 전단계는 내가 상대방으로부터 뭔가를 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무언가에 실망했습니다. 무엇을 기대했나요? 상대에게 무엇을 기대했는지 숙고해봅니다. 사랑, 이해, 관심, 존중을 받고자 하지 않았나요? 그리고 그것들을 잃은 아픔이 있지 않나요? 분노 속에는 이러한 것들을 잃어버릴까봐 두려워 하는 마음이 숨어 있군요. 그러니 화내는 사람에게 즉각적으로 반응하여 같이 싸우는 대신 상대가 무얼 원하는지 무얼 두려워 하는지 보는 게 올바른 대응이군요. 

20-6 결국 분노는 자신의 이익과 관련이 있군요. 미움의 뿌리도 욕망에 있습니다. 욕망에 대한 성찰이 없는 한 단순히 ‘화내지 말라’ ‘미워하지 말라’는 금지나 권고는 상처를 어루만지기 보다 불씨를 덮어버리거나 덧칠하는 것입니다. 욕망 가운데 생존(의식주)에 대한 기초적 욕망을 제외하면 모두 정신적 욕망인 경우가 태반입니다. 욕망의 시작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요?
 좀 더 깊이 마음속으로 들어가 보아야 합니다. 태어날 때로 돌아가 보아야 합니다. 기억할 수 없을지라도 우리는 관찰하고 추론할 수 있습니다, 안락한 모태로부터 좁은 산도를 지나 외부 세상으로 쫓겨나는 경험은 너무 격렬한 고통입니다. 아무것도 혼자서 할 수 없는 상황. 그저 숨쉬고 생명을 유지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은 없구요. 추위, 더위, 배고픔, 목마름..모든 불쾌한 감촉에 노출되어 전적으로 부모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이 의존 욕구가 조건없이 아낌없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속수무책인 아기는 어떻게 느끼고 무엇을 생각할까요?
 ‘왜 이리 추운거야 왜 채워주지 않는거야 왜 나를 방치하는 거야.’라며 울부짖지 않나요? 우는 것 외에 표현 수단도 없는데 운다고 화내고 손찌검하고 야단치고 그러지 않았나요? 이 세상에 홀로 버려진 고립무원감은 여기에서 비롯됩니다. 얼마나 억울하고 외롭고 비참할까요? 그럼에도 방어할 수단과 능력이 없어 앙앙 울 수밖에 없는데 학대라니요. 안정적인 생존을 위해서는 변함없는 충족의 환경이 조건 없이 즉각 보장되어야 더이상 생존에 대한 위협을 느끼지 않고 자신있게 살아갈 믿음과 안정감이 형성될 수 있습니다.

20-7  이 믿음(기초적 신뢰)이 형성되어야 아이는 다음 단계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하려들고 먹는 것도 거부하고, 싫다고 주장하고 떼를 쓰고... 자기 주장을 좀 더 다양하게 할 수 있게 되고 외부와 관계를 맺을 여유도 생기지요. 주변으로 활동 영역을 확장하고 붙잡아주지 않아도 걸으려 애쓰고 마침내 홀로 서고 걷습니다. 하지만 부모는 아직도 한눈을 팔아서는 안 되고 지속적인 보호 관찰이 필요하고, 아이는 어느 정도 자라면 욕구의 표출이 무한으로 충족될 수 없고 즉각 충족될 수도 없다는 좌절을 스스로 터득하게 됩니다. 적절한 좌절을 혼자 감당할 수 있도록 점진적으로 도와야 아이는 독립을 이루지요. 이렇게 독립을 원만히 이룰 때 비로소 태어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과정이 원만히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허다한데 그것은 부모의 치유되지 않은 상처에 연유하고 그것 역시 대물림된 결과이지요. 결국 아이는 티없이 자라지 못하고 기탄없이 자라지 못하고 생존을 위해 눈치밥을 먹어야 되고 순종해야 되고 아부해야 됩니다. 분노가 두려움 때문에 억눌릴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분노는 자유로이 표현되어져야 하고 적절히 수용되어져야 분노를 다스리는 법도 자연스레 배울 수 있게 됩니다만, 어른스런 아이로 키우려는 성급함과 완벽주의 때문에 부모들은 이 작업을 수행할 능력이 부족한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도 상처를 안고 있기 때문이지요. 게다가 배우자와 갈등, 시부모와 갈등 경제적 곤란 등 해결하기 벅찬 문제들이 겹겹이 옥죄이면 부모는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처하게 됩니다. 아이를 제대로 키울 힘이 없게 탈진되지요. 게다가 부족한 보살핌마저 동생이 출현하면 관심은 절반으로 줄어듭니다. 아예 관심이 멀어지는 느낌을 받는 아이는 사랑과 관심을 잃을까 두려운 나머지 분노를 동생에게 여과없이 표출합니다. 사랑과 관심을 얻기 위한 경쟁이 처절하게 시작되는 것이지요. 분노는 사랑의 투사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기적이고 독점적 사랑을 누리던 아이는 늘 그런 사랑을 기대합니다. 조금만 부족하여도 짜증이 납니다. 주변에 투사하여 불만을 외칩니다. 왜 이렇게 못 해주느냐고 외쳐댑니다. 소외당하지 않으려고 파당을 조직하고 힘을 누리려 합니다.

20-8 분노에 숨어 있는 이 두려움을 내 안에서 그리고 상대방 마음에서 볼 수 있다면 연민의 마음(가여움)이 피어납니다. 가여운 마음이 자신과 상대방에게 느껴질 때 분노의 반응(싸움) 대신 안아주고 수용하는 자비 모드로 전환됩니다.
 보편적인 사랑은 에고를 내세우지 않습니다. 순간적으로 생명이 위험에 처했을 때 자신을 잊고 철길에 뛰어들어 어린아이를 구해내는 마음은 누구나 가지고 있습니다. 남의 아픔을 아파하는 마음, 남의 기쁨을 함께 기뻐하는 마음도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에고에 덮혀서 발현되지 않고 있을 뿐입니다. 
 
20-9 마음 속 깊은 곳에 사랑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사랑을 바깥에서 찾는 데 익숙하고 밖으로부터 얻으려 하였습니다, 자신을 사랑해 줄 누군가를 찾아 방방곡곡을 돌아다니지만 결국 만족하지 못하고 실패했지요. 그 사랑이 외부의 누군가가 채워주리라는 환상을 깨지 못하면 영원히 외로운 실패자로 삶을 마칠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삶의 본질인 사랑을 가슴으로 깨달을 수 있고 가 없는 사랑 속에서 살고 있다는 진실에 깨어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에고에서 벗어나 지금 이 순간 깨어 있는 것입니다. 호흡을 바라보고 현재 마음을 바라봅니다. 에고의 작용을 바라보고 ‘아 이것은 진정한 내가 아니고 내 것이 아님’을 확연하게 보아야겠습니다.

내가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저분도 고통에서 벗어나가를
내가 행복하기를
모든 존재들도 행복하기를
내가 분노에서 벗어나기를
저분도 분노에서 벗어나기를
내가 평화롭기를
이 세상 모든 존재들도 평화롭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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