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공화(空花)

“여러분! 참된 부처님은 모양이 없고 참된 법도 모양이 없느니라. 그대들이 다만 허깨비를 두고 마음대로 모양을 만들고 있으니 설사 그렇게 해 얻는 것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 들여우나 도깨비 같은 것일 뿐이니라. 참된 부처가 아니고 외도의 견해니라. 무릇 진정으로 도를 배우는 사람은 부처도 취하지 아니하며, 보살이나 나한도 취하지 아니 하며, 삼계의 뛰어난 경지도 취하지 않아야 하느니라. 멀리 모든 것을 벗어나 사물에 구속되지 말아야 하느니라. 하늘과 땅이 뒤집힌다 해도 나는 더 이상 의심치 않으며, 시방세계의 모든 부처님이 눈앞에 나타난다 해도 한 생각 기뻐할 것 없고, 삼도[三塗ㆍ화도(火塗), 혈도(血塗), 고도(刀塗)] 지옥이 갑자기 나타나도 한 생각 두려움이 없어야 하느니라. 무엇 때문에 이러한가? 내가 보건대 모든 법이 공한 모습(空相)이라서 변하여 나타나면 있고, 변하여 나타나지 않으면 없어지니 삼계(三界)는 마음뿐이요, 만법은 오직 식(識)일 뿐이니 그러므로 꿈과 허깨비 같은 공화(空花)를 어째서 잡으려고 애쓰고 있는가?”

선(禪)의 종지(宗旨)라 할 수 있는 ‘마음이 부처(卽心卽佛)’라는 말은 바깥 경계를 따라 다니지 말고 본래 마음자리로 돌아오라는 말이다. 그런데 어떤가? 한 생각이 일어나면 마음은 밖을 향해 내달리는 것이 중생의 처지다. 임제는 이 점을 다시 스스로 자각하게 하는 말을 하고 있다. 참된 부처와 법은 모양이 없다고 하면서 모양 없는 것을 어디 가서 찾는단 말이냐 하고 되묻는 식의 말을 하고 있다. 허상을 따라 움직일 때 부처는 이미 나와는 멀어져 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외부의 경계에 마음을 빼앗길 때 자기 부처는 실종됨을 상기시킨다.

‘단하소불(丹霞燒佛)’이라는 공안(公案)이 있다. 단하 천연(丹霞 天然ㆍ739~824)의 일화에서 나온 공안이다. 단하도 과거(科擧)를 보러 가다가 출가했다 한다. 그 후 마조(馬祖) 문하에서 공부하던 어느 날 법당에 들어가 불상의 목에 걸터앉았다. 이를 본 대중들이 크게 놀라 마조에게 일러주자 마조가 보고 “참으로 천연스럽구나”고 했다. 단하가 내려와 마조에게 절을 하고 “제게 좋은 호(號)를 주어 감사합니다” 했다. 이로 인해 천연이란 법호를 쓰게 되었다 한다.

오등회원(五燈會元)에는 이런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다. 단하가 낙양 혜림사에 머물고 있을 때였다. 추운 어느 날, 장작이 없어 법당 목불(木佛)을 쪼개서 불을 땠다. 이를 본 원주가 깜짝 놀라 말했다. “아니 불상을 아궁이에 넣어 태우지 않소?” 단하가 주장자로 재를 헤치면서 능청스럽게 말했다. “태워서 사리를 얻으려 하오” 원주가 “목불에서 무슨 사리가 나와요?” 단하가 “사리가 안 나온다면 법당에 남아 있는 두 불상도 태워도 되겠소?”

이런 대화 끝에 원주의 눈썹과 수염이 빠져버렸다 한다. 〈선문연송설화〉에는 이 이야기를 두고 목불을 태웠다는 것은 뛰어난 안목에서 나온 것이고, 원주가 어째서 목불을 태우냐고 꾸짖어 눈썹과 수염이 빠진 것은 대반야의 도리를 비방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런 문답도 있다.

“단하가 목불을 태웠는데 어째서 원주가 눈썹과 수염이 빠졌습니까?”

“진짜 도둑은 가난한 집은 털지 않느니라.”

임제는 부처가 나타나도 기뻐할 게 없고 지옥이 나타나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 하였다. 부처도 허깨비 지옥도 허깨비라 모두가 공(空)하여 실체가 없는 것이란 말이다.

눈병 난 사람의 눈에 보이는 허공의 꽃(空花)을 붙잡으려 하지 말라 하였다.

삼계가 오직 마음이요 만법이 오직 식이란 말은 〈능가경〉, 〈화엄경〉 그리고 기신론에도 설해져 있는 말이다. 〈임간록〉에 원효가 촉루수(颱?水)를 마시고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도리를 깨닫고 내뱉은 독백의 말이 “마음이 생기니 법이 생기고 마음이 없어지니 법이 없어지는 것, 삼계는 오직 마음뿐이요 만법도 오직 식(識)일 뿐이다”는 말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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