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통제와 자율

사회성, 갈등 관계서 커져
누구에게 배우는 강제보다
스스로 깨닫는 지혜 방편
???????증장시키는 새 방법 모색

오늘도 잠 못 이루고 신음하는 님이여.
그 괴로움은 어디서 비롯되었나요?

19-1 코로나가 지구인의 안전을 위협하고 세계 경제를 위기로 내몰고 있는 가운데 분노 조절이 안 되고 자해와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습니다. 짜증과 화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가까운 사람들(배우자, 자식, 부모, 형제)에게 그렇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상처를 받습니다. 이 화가 다른 사람들에게 옮겨 폭발이 되기도 합니다. 아이에게 화를 내고 부모에게 화를 내고 배우자에게 화를 내고 후회하고 자책합니다. ‘참아야 하는데 왜 못 참았을까’ 후회하지만 이미 상처를 주고 말았지요.

마음의 상처는 관계로부터 옵니다. 그것도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믿고 의지해야 될 그들로부터 말 한마디 몸짓 하나에 상처받고 비명을 지르게 됩니다.

19-2 잠시 눈을 감고 자신이 자라온 과정과 아이들 양육 과정을 돌아봅니다.(1-2분)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는 주문이 많고 강제가 많지 않았나요? 걸핏하면 칭찬보다 비난의 고성이 쏟아집니다. 부모는 아이를 지배하려 들고 자신의 신념을 주입시키려 들기 바쁩니다. 부모의 생각만 옳다고 통제하려 듭니다. 자기 자신에게도 수많은 자책과 비난으로 마음을 할퀴고 상채기를 냅니다. 쏟아지는 총알은 전쟁터에서만 있는 줄 알았는데 삶이 곧 전쟁터라니요. 그것도 바로 우리 가정 안에서 그리고 우리 자신 안에서 수시로 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안식처가 되고 보금자리가 되어야 될 가정, 그리고 최후의 보호자가 되어야 할 가족과 자신마저 가해자 노릇을 한다면 그야말로 암흑이고 절망일 수밖에 없겠군요. 기실 부모들도 자라는 과정에서 그렇게 자랐기에 어쩔 수 없지만.

아이들은 비난과 질책으로 위축되고 억압됩니다. 자신감이 사라지고 자존감은 바닥에 떨어지지요. 설교나 훈계로는 일어날 수 없고 엄벌로는 개선은 커녕 창의성과 자율성, 나아갈 가능성마저 잃게 합니다.

19-3 출생과 함께 엄마로부터 분리된 아이가 가장 먼저 이루어야 될 과제가 안정감과 신뢰감이라면 두 번째 과제는 자율성과 주체성입니다. 아이가 자율성을 키우기 시작하는 곳은 어디인가요? 첫무대는 밥상입니다. 아이는 밥을 잘 먹기도 하고 싫다고 버티기도 하지요, 두 번째는 화장실입니다. 대변을 가릴 무렵에 함부로 싸버리기도 하지만 싸지 않고 참기도 합니다. 이 두 과정이 원만하고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 않고 부모가 무서운 압력을 가하면 아이는 자라서 강박증에 걸리거나 대인관계가 힘들어지고 윗사람과 관계가 불편하여 직장에 적응을 못하고 자주 직장을 그만 두는 원인으로 작용합니다.

안정감과 자율성을 어느 정도 획득한 아이도 피할 수 없는 커다란 사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동생의 출현입니다. 외동이라구요?(웃음) 지금까지 독점했던 부모와 주위의 사랑과 관심이 갑자기 나타난 아기에게 쏠리면서 상대적 박탈감을 경험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아직 이해력이 충분하지 못한 아이에겐 동생의 출현은 참을 수 없고 분통이 터지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이지요. 하여튼 인간은 적응하면서 살아야 하는 존재여서 결국은 받아들이지만 늘상 마음 속에는 형제에 대한 선망과 시샘이 있어서 자주 티격태격 싸울 수밖에 없지요. 이 싸움은 길게는 성인기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지만 대체로 동생을 체력적으로 함부로 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면 더 이상 폭력적으로 제압하려들지 않게 되지요. 이 긴 형제의 전쟁은 사실 인격 발달의 중요한 과정입니다. 형제 간의 교유와 싸움을 통해 아이는 사회성을 배우고 이기적 나르시즘으로부터 벗어나고 선의의 경쟁과 공존의 지혜를 터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19-4 이 형제 간의 갈등을 어떻게 중재할 것이냐가 부모의 어려운 과제이자 중요한 책임이지요. 부모들은 대체로 ‘동생에겐 이래선 안된다. 형은 이래야 된다.’ ‘여자에게 그래서는 안된다. 남자는 이래야 된다.’ 등의 가치관과 도덕 기준을 제시합니다. 이 때 자식 가운데 어느 한 편을 들면 다른 아이에게 심각한 상처를 주게 되고 분노와 적개심을 유발하게 됩니다. 너무 지나친 질책이나 간섭은 자율적인 해결 과정을 차단할 수 있습니다. 형제들이 다투면서 자기 주장을 하고 그 주장을 끝까지 진행시켜서 원만한 결론에 이르기까지 지켜봐주고 중립적이고 민주적으로 중재해준다면 아이들은 건전한 토론 문화를 체득하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부모의 너무 완벽하고 가혹한 훈육은 융통성이 없는 고집 불통의 아이 또는 자기 표현을 적절히 못하는 아이로 만들어 (정치판에서 보듯이) 합리적 토론이 불가능한 원인으로 작용합니다.

19-5 건강하게 성장하는 아이는 부모의 조건 없는 사랑과 관심 및 관용에 의해 자신감 있게 세상을 경험하며 자립심을 키웁니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 경이로움은 아이가 건강하게 사회성을 키우는 원동력이 됩니다. 자립심을 키우면서도 부모와 소통을 통해 상호 신뢰하며 의존되어 있습니다. 건강한 상호의존성은 건강한 자립의 바탕이 되고, 친구와 우정을 쌓고 이성과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것도 어린 시절 부모와 상호 의존된 친밀감의 경험 덕분이지요. 독립은 고립이나 독존이 아니라 상호 의존된 자립이라 할 수 있군요.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것에 의지되어 존재합니다. 홀로 분리되어 개체로 존재하는 게 아닌데도 나 홀로 이 세상에 고립된 느낌, 외로움과 공허함은 어디서 비롯될까요? 버림받을까 두려워 아무와도 그리고 무엇과도 관계를 유지하려 필사적으로 매달리게 되는 건 무엇 때문일까요?

19-6 건강한 자립을 성취한 아이는 자신의 모습, 자기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습니다. 자신은 특별하다 느끼며 자신이 해내는 일들이 신기하고 자신에 대해 만족해 하고.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이고 사랑받는 존재라 느끼면서 자존감이 굳건하게 뿌리내리지요. 그러나 이러한 발달 과제가 사랑의 결핍이나 부모의 학대, 무관심, 또는 과잉보호와 통제에 의해 원만히 성취되지 못할 때 불신, 열등감, 수치심, 분노, 공허감, 무가치감, 적대감 등이 마음 속에서 바이러스처럼 증식됩니다.

자신이 더이상 경멸과 고립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해 편협함과 피해의식으로 방어하고 도벽, 거짓말, 폭력 등을 행사하거나 이단 종교와 각종 범죄에 가담하게 됩니다. 각종 중독 상태로 통제 불능의 상태가 되거나 반사회적 심리 상태로 황폐해지게 되는 것이지요.

19-7 이 모두 우리를 사랑한다면서 우리를 피폐하게 만든 세상, 곧 부모의 이기적이고 성숙하지 못한 양육에 기인합니다. 부모를 미워하여야 하지만 미워할 자유도 박탈된 채 자란 것이지요. 그 부족한 사랑마저 잃을까 두려운 나머지 적개심을 깊이 숨기면서 살아가다가 어느 순간 폭력적으로 폭발하거나 자해와 우울증에 시달리게 됩니다.

진정한 자립은 그런 박해자들과 맞서 자신을 주장하고 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도 안전한 공간, 상담실에서 마음 놓고 감정을 풀어내는 것이지요.

19-8 부모나 배우자가 그리 해주지 못함을 탓하고 세상을 원망하는 대신 ‘나 자신도 그리 못해주는데’라는 자각이 들려면 할 수 있는 일은 딱 하나 있습니다. 호흡을 살피고 마음 들여다 보기(자신을 바라보기)입니다. 그동안 등한시했던 자신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안아주는 작업이 명상입니다.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은 어찌 바꾸려 하기보다는 그대로 놔두고 바라보세요. 바라보고 또 바라보고 호흡과 함께 바라보십시오. 바라보고 있노라면 흙탕물이 점점 가라앉듯이, 안개가 가만 놔두어도 걷히듯이, 그렇게 서서히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됩니다.

호흡과 함께 걷고 호흡과 함께 앉습니다.

호흡을 가만히 들여다 보십시오.

처음에 거친 호흡이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파도 가라앉듯이 저절로 제자리를 찾습니다.

마음의 신묘한 치유력이 발동하기 시작하여

감정의 너울도 고요해집니다.

마음 깊은 곳 예지의 빛이 작동하면

암흑도 새벽 여명처럼 물러나고

절망적 상황도 그렇게 나쁜 상황이 아니군요.

바라고 간구하는 게 아니라 그냥 바라봅니다.

19-9 붓다의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는 가르침은 ‘좋다 나쁘다’ 판단하지 않음이고, ‘이래야 된다 그래서는 안된다’ 통제하지 않음이며, ‘잘났다 못났다’ 평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따뜻하게 바라보는 것입니다.

호흡이 거칠면 거친 대로 가쁘면 가쁜 대로 그냥 놔두고 지켜봄이 중요합니다. 인위적 조작을 하지 않고 좋으면 좋은 대로 싫으면 싫은 대로 그냥 바라보는 것이지요.

가치 판단을 개입시키지 않고 객관적으로 바라보다 보면 호흡은 어느새 자리를 잡게 되고 생각도 억지로 없애려 들지 않아도 꼬리를 접게 됩니다. 격앙된 감정은 바로 진정되지 않지만 따뜻하게 품어 오래오래 지켜보면 앙앙 울어대던 어린 아이가 잠드는 것처럼 고요해지기 시작합니다. 명상에서 배워야 할 것은 통제나 규제보다 자율이 정답이라는 것입니다. 교육뿐만 아니라 정치나 종교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획일적 통제 사회보다 자율을 우선으로 하는 민주사회가 우월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붓다가 깨달은 연기법은 인간관계의 상호의존성을 분석 통찰한 것으로 모든 고통과 재앙은 그럴만한 연유가 있고 그것을 깨달으면 종식된다는 가르침이지요. 정답을 정해놓고 ‘이래야 되고 저래야 된다’고 주입시키는 게 아니라 ‘이렇게 하면 그렇게 되고 이렇게 하니 저렇게 되는구나’라고 스스로 풀고 깨닫게 해주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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