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닦음의 길 25

지금까지 붓다의 수행법인 위빠사나를 비롯하여 중국에서 개발된 간화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수행체계를 살펴보았다. 오늘날엔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의 실정에 맞는 수행법들이 등장하여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도 하였다. 각자의 성향이 다른 만큼 그에 어울리는 여러 수행법이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붓다 역시 대기설법(對機說法), 즉 대중들의 근기에 맞는 가르침을 설하지 않았는가. 수행도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택하여 신행의 기초로 삼으면 되는 일이다. 옳고 그름이 아니라 서로 다름의 시각에서 접근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런데 일반인들은 전문 수행자가 아니기 때문에 집중적으로 수련하기가 그리 만만치 않다. 그렇기 때문에 일상의 순간순간을 수행의 도량으로 활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옛 선사들은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이 모두 선(禪)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어디를 가거나 머무르거나 않거나 눕거나, 혹은 말하거나 침묵하거나 움직이거나 조용히 있는 모든 순간이 수행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이 늘 깨어있어야(mindful)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일상에서 마주치는 모든 경계에 먹혀서 수행은커녕 정신없는(mindless) 중생의 삶이 계속될 뿐이다.
지금의 내 모습은 과거 몸(身)과 입(口), 생각(意)으로 지은 행위의 결과물이다. 흔히 업(業)이라 불리는 삶의 법칙에서 벗어나기란 매우 힘든 일이다. 과거의 반복된 행위가 무의식에 쌓이게 되면 같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업의 관성 때문이다. 오랫동안 가까이 했던 술이나 담배를 끊기 어려운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따라서 일상을 수행의 도량으로 가꾸기 위해서는 대상에 먹히면서 살아온 과거의 업으로부터 단절해야 한다. 그 방법이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다름 아닌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봤던 수행이다. 특히 정기적인 시간을 마련해서 훈련하는 것이 좋다. 매일 10분이라도 시간을 정해서 명상을 하거나, 아니면 1주일에 특정 요일을 정해서 훈련하는 일이 필요하다. 이는 일상에서 일어나는 번뇌, 망상을 수행의 주제로 전환시키는 중요한 과정이다.
정기적으로 훈련을 하다보면 수행으로 쌓인 에너지가 마치 가랑비에 옷 젖듯이 우리들 몸과 마음에 스며들어 삶이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한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수행이 깊어지면 일상의 순간순간을 공부로 인식하게 된다는 점이다. 예컨대 목욕 또한 자연스럽게 수행으로 생각하면서 할 수 있다. 그 순간 욕실은 단순히 몸에 쌓인 때만 벗겨내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으로 지은 악업(惡業)을 참회하고 새로운 삶을 발원하는 거룩한 도량이 된다. 이른바 목욕 명상이 탄생하는 것이다.
운전도 수행이라 생각하면 훨씬 평온하고 안전하게 운행할 수 있다. 마음이 분주하면 운전 또한 불안하며, 평온한 마음일 때 안전한 운행이 뒤따르는 법이다. 베트남 출신의 틱낫한((Thich Nhat Hanh)은 운전하면서 만나는 빨간 신호등을 부처님으로 여기라고 말한 적이 있다. 빨간 불은 단순히 자동차를 멈추라는 신호가 아니라 빨리만 가려고 하는 우리의 마음을 붙잡아주는 부처님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빨간 신호등은 나의 주행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요와 평화를 가져다주는 고마운 존재로 다가온다. 비록 잠깐이지만 그런 마음으로 신호가 바뀔 때까지 들어오고 나가는 호흡에 집중한다면, 자동차 안은 거룩한 수행의 도량이 되는 것이다.
일상을 수행이라 생각하는 삶과 그렇지 않은 삶은 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화가 날 때도 이를 공부라고 생각한다면 그 상황을 지혜롭게 대처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상황에 먹히면 화를 나게 한 대상을 탓하면서 짜증만 낼 뿐이다. 마치 불이 났는데 불 끌 생각은 하지 않고 화재의 원인만 탓하는 것과 같다. 그 순간 나 자신은 화에 완전히 지배를 당한 꼭두각시로 전락하게 된다.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는 각자에게 달려있다. 수행이라 생각하면 삶의 방향은 붓다를 향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대상과 경계에 먹혀서 허우적거리는 중생으로 남을 것이다. 우리가 왜 불교를 공부하는지 조용히 성찰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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