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윤리의 기준과 불교

주관이 개입되는 윤리영역
나와 남의 위치 바꿔 판단
아집, 독선 버린 여실지견
???????국민 윤리 바로 세울 비결

정치 옳고 그름 어떻게 판단하나?

월드컵 세계 4강은 히딩크가 대한민국에서 만들어낸 신화다. 히딩크는 국민적 영웅이었고 한때 히딩크 리더십까지 이야기되었다. 히딩크 옆에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던 젊은 흑인 여성은 TV에 자주 노출되었기에 국민의 눈에 뜨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히딩크와 20세의 나이 차이가 났다고 한다. 히딩크와 그녀는 부부였을까? 아니었다. 히딩크는 부인과 이혼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녀와 살고 있었다. 어느 TV 채널에서 네델란드에 있는 히딩크 부인 집을 방문하였으나 인터뷰가 거절당하는 장면이 방영되기도 했다.

만약 한국인 감독이 부인과 이혼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20살 어린 흑인 여자를 데리고 산다고 가정해보자. 이 사실이 알려지는 순간 당장 파면 당하고 언론의 집중 포화를 감당하지 못하고 한국을 떠나야 했을지도 모른다. 히딩크와 연인은 그다지 환영 받는 커플은 아니었지만 한국 사람의 비판이나 공격을 받지는 않았다. 왜일까? 우리의 이중잣대 때문이다. 서양사람은 뭐 그런 사람이니 괜찮다이고 한국사람은 그런 사람이 아니니 괜찮지 않다일까? 세계화가 되면서 우리 나라도 외국인이 심심치 않게 증가했다. 서울은 특히 길거리에서 서양인을 보는게 드물지 않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말대로 히딩크도 한국인의 윤리 기준에 맞춰서 살아야 되고 윤리 기준을 어기면 비난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세계화의 시대에는 더 많은 사람이 남의 나라에서 살거나 여행하게 되고 다른 윤리 기준과의 충돌은 불가피하다. 만약 하나의 윤리 기준이 지구상에 존재한다면 윤리 기준끼리의 충돌은 생기지 않는다.

오래 전에 유엔은 세계화의 시대에 모든 국가와 국민에게 적용할 수 있는 보편 타당한 윤리 기준을 제정하기 위한 전문가 회의를 구성했다. 전세계의 유명한 윤리학자와 종교인들이 첫번째 윤리기준을 만들었다. 첫 번째 윤리기준은 흔히 윤리에 관한 황금률(golden rule)이라고 부르는 내용이다. 즉 ‘네가 싫은 일을 남에게 하지 말라’이다. 이 구절은 모든 종교가 주장하는 내용이다보니 인류의 보편적인 윤리규정이 될 수 있다.

<잡아함경>에는 “나는 생각한다. ‘만일 누가 나를 죽이려 하면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 것이면 남도 그럴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남을 죽이겠는가?’ 이렇게 생각하고는 살생하지 않는 계율을 받고 살생을 즐겨하지 않는다”고 쓰여 있다. <성경>의 마태복음에도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쓰여있고 <논어>에도 ‘내가 당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도 하지 말라’라는 구절이 있다.

경전에는 ‘내가 좋아하지 않는 일을 남에게 하지 말라’라는 기준 이외에도 여러 가지 다양한 윤리 기준이 쓰여 있다. 탐진치에 의한 행동은 악하며 탐진치가 없는 행동은 선하고, 즐거움을 수반하는 행동은 선하며 괴로움을 수반하는 행동은 악하고, 집착이 있는 행동은 악하며 집착이 없는 행동은 선하고, 자비가 없는 행동은 악하며 자비가 있는 행동은 선하다. 또한 열반이라는 목적에 기여하는 행위는 선한 행위로 간주하며 그렇지 못한 행위는 악한 행위로 간주한다. 불교는 윤리 기준에 의해 도덕률을 제정하였다. 불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오계는 불교 윤리 기준의 구체적인 도덕률이다.

연기법에 의하면 나와 우리 모두는 각각 독자적인 실체가 없는 연기적 존재이다. 나와 남이 연계되어 있다고 해서 무조건 도덕적 행위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행복을 추구한다면 혹은 추구해야한다면 연기법은 우리가 옳은 행위를 해야 할 근거를 제시한다. 우리가 행복을 추구한다면 인연법과 상의상관(相依相關)의 원칙에 의해서 내가 하는 모든 행위는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 내가 선한 행위를 하면 선한 영향을 미치고 악한 행위를 하면 악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선한 행위를 해야 하는 이유가 된다. 경전은 ‘모든 존재는 행복을 추구한다’고 말하며 또 ‘모든 존재는 행복하여라’고 설한다. 그러므로 연기법은 우리가 옳은 행위를 해야 할 근거를 제시한다.

윤리는 정치에 있어서도 중요하지만 경제에 있어서도 중요하다. 자유시장경제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아담 스미스의 말을 인용하여 자유시장경제의 장점을 주장한다. 아담 스미스야 말로 자유시장경제의 멘토이며 자유시장경제의 기수이다. 아담 스미스는 시장에서 사람들이 자유롭게 거래할 수 있도록 하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가장 효율적인 자원 배분이 이루어지므로 우리에게 이익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정부는 시장에 가능하면 개입하지 말고 기업과 소비자가 자유롭게 거래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지만 아담 스미스는 더 중요한 말을 했다. 사실 아담 스미스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말을 자신의 저서 ‘국부론’에서 두 번 정도 밖에 사용하지 않았다. 아담 스미스는 그보다 윤리를 더 강조했고 ‘도덕감정론’이라는 저서까지 냈으며 우리에게 유명해진 국부론보다 훨씬 더 소중하게 생각했다.

사람은 말과 행동은 겉으로 드러나지만 생각은 감추어지기 때문에 윤리적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정치의 영역에서는 정치인의 말과 행동에 대해 윤리의 칼날이 휘둘러진다. 정치인은 비윤리적인 행위로 인하여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하다. 하지만 나라에 따라 윤리가 정치에 적용되는 범위는 각각 다르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은 숨겨진 내연녀와 딸이 있었지만 별다른 비난을 받지 않았다. 우리나라 대통령에게 숨겨진 내연녀와 딸이 있었다면 탄핵의 대상이 될지도 모른다.

도덕적 자유의 범위가 훨씬 넓은 프랑스라 하더라도 독재는 용납되지 않는다. 독재는 사람에게 태어날 때부터 부여된다고 믿는 인권을 제약하기 때문이다. 부패와 불법도 허용되지 않는다. 이런 일에 대해선 논란의 여지가 없다. 너무나 명백한 옳고 그름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정책이 바람직한가에 대한 판단은 옳고 그름의 영역이 아니며 결과적으로 윤리 기준이 적용되는 사안은 아니다.

경전은 옳고 그름에 대해 다양한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이중 대부분은 정치의 영역에 그대로 적용하기엔 한계가 있다. 예를 들어 탐진치 즉 탐욕, 분노, 어리석음이 있는 행동은 악하다. 과연 정치인의 행위 중 탐욕이 없는 행위가 있을까? 아니 인간의 행위 중 탐욕이 없는 행위가 있을까? ‘내가 좋아하지 않는 일을 남에게 하지 말라’라는 불교의 윤리 기준 이외에는 정치인의 말과 행동, 정부의 결정과 행위를 판단할 기준은 없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 일을 남에게 하지 말라’라는 불교의 윤리 기준도 적용상의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동일한 행위에 대해서도 ‘나는 그런 행위는 괜찮아’라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나는 그런 행위가 너무 싫어’라는 사람도 있다. 동일한 행위에 대해서도 ‘다들 그렇게 하고 살잖아?’라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지만, ‘누가 그렇게 살아?’라고 화를 내는 사람도 있다. 이럴 경우 모든 사람을 조사해서 통계수치를 가지고 옳고 그름을 결론내야 하는걸까? 사회생활에서도 직장생활에서도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이 제각각인 경우가 많은데 하물며 정치의 영역에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정치는 온 국민이 관련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치인을 죽일 놈이라고 욕을 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적용되는 윤리기준보다 정치인에게 적용되는 윤리기준은 좀 더 느슨해도 될까? 우리보다 못한 놈들이니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정치인에게 보다 높은 윤리 수준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좀 더 중요한 일을 하고 국민을 대신하라고 선출해 주었고 국민은 갖지 못하는 권력을 부여 받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직장 동료가 음주운전하다가 적발되었다고 해고되지는 않지만 정치인이 음주운전하다가 적발되면 그 자리에 임명되지도 못하거나 임명되었다면 사퇴해야 한다.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거짓말을 하고 살까? 제1회 세계 거짓말 대회에서 일등한 거짓말은 ‘저는 평생 한 번도 거짓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였다고 한다. 언젠가 언론에서 인간이 평균 하루에 몇번 거짓말을 할까를 조사한 연구를 보고 놀란적이 있다. 수십 번이었기 때문이다. 정치인은 거짓말한 것이 들통나 곤욕을 치르는 경우가 많다. 일반 국민이 거짓말했다고 얼마나 곤란한 처지에 처할까? 글쎄다.

우리보다 못한 정치인에게 보다 높은 기준을 적용하는게 말이 될까? 무언가 말이 안 된다. 게다가 자기가 지지하는 정치인과 정당에게는 관대한 잣대를 들이대고, 반대하는 정치인과 정당에게는 준엄한 잣대를 들이대는게 인간이다. 왜 그러느냐고 물으면 언제나 그럴싸하게 합리화한다. 이유는 언제나 찾을 수 있다. 이럴 때 활성화되는 뇌부위를 조사해봤더니 이성을 관장하는 부위가 아니라 감성을 관장하는 부위였다.

정치의 영역에서 옳고 그름이 명백하면 논란의 여지가 없다. 명백하지 않으면 누군가가 판단해야 한다. 정치에 있어 옳고 그름의 판단은 여론 조사와 선거에 의해 가능하다. 결국 옳고 그름은 국민이 어떻게 판단하는가에 달려 있다. 정치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때 탐진치 즉 탐욕, 분노, 어리석음이 윤리 기준의 역할을 하지 못함을 앞에서 보았다. 예를 들어 정치인이 탐욕이 있다고 그의 행위가 모두 잘못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국민이 정치인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때 탐욕, 분노, 어리석음이 있으면 그 판단은 옳은 판단이 아니고 그른 판단이 된다는게 불교의 관점이다.

우리가 정치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때는 선입관, 고정관념, 편견, 아집, 독선이 없어야 한다. 정치인, 정당, 정책, 정부에 대해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없는 상태에서 판단해야 한다. 집착을 떠나고 있는 그대로 알고 볼 수 있는 여실지견의 마음으로 판단하지 않으면 옳은 판단이 아니고 그른 판단이 된다. 정치인, 정당, 정책, 정부도 윤리적이어야 하지만 국민도 윤리적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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