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법정 스님 3

 

 

 

<서신 1>

가을입니다. 집 짓느라 수고 많으시지요? 저는 요즘 바쁜 일에 쫓기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언젠가 부탁했던 법회의 일, 이 가을에는 도저히 시간이 나지 않군요. 널리 양해 있으시길 바랍니다. 9월 10월 11월까지 예정된 일로 꽉 짜여 있기 때문입니다. 거사님께도 문안 사뢰어 주십시오. 대원성 큰소리 가끔 들려옵니다.

1984년 9월 13일 불일암에서 합장

<서신 2>

맑게 개인 가을날입니다. 모임의 날짜를 11월 21일(수요일) 오후로 정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장소는 시민회관 같은 데는 절대 불가하고 따로 돈 들일 것 없이 새마당 예식장 같은 데서 조촐하게 이야기했으면 합니다. 넓은 공간에 사람 채우기 위해 어중이떠중이 긁어모으는 것 보다는 들을 사람들만 조용히 모여 이야기하는 것이 가을 날씨에도 실례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일부러 차 보내지 마십시오. 그 대신 숙소는 절에 폐 끼칠 것 없이 호텔 (시끄럽지 않는) 같은 데서 하루밤 쉬어오려고 합니다. 날짜와 시간 장소 결정되는 대로 연락 주십시오. 불일암에서 합장

<서신 3>

편지와 선물 감사히 받았습니다. 연꽃모임 만들어 십년을 시중들었으니 대원성의 저력도 대단합니다. 여러 회원들에게 보리의 씨앗을 뿌렸으니 꽃피고 열매 맺을 날 있을 것입니다. 이제는 마음 안에서 찾는 일에도 전념할 줄 믿습니다. 1986년 세모 불일 합장

 

가을에 주신 서신과 세모에 주신 서신이다. 서신도 나이를 먹는 것 같다. 오랜 시간이 흐른 오늘 다시 꺼내보는 서신에서는 세월의 무게가 느껴진다. 당시에는 느낄 수 없던 것들이 있다. 서신의 짧은 글에서 스님의 삶이 진하게 느껴진다.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이 주는 것들로 공부하셨던 스님이었다.

스님은 시간과 세월을 바람 한 점,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에서 보셨고, 그 자연이 주는 ‘오늘’을 소중하게 생각했다. “가을입니다”, “맑게 개인 가을날입니다”고 시작하는 스님의 서신을 이 가을에 다시 꺼내 보니 스님의 옛적 모습이 더욱 진하게 떠오른다.

스님이 원적에 드신 지도 10년이 지났다. 스님은 본인의 책 <무소유>에 남긴 ‘미리 쓰는 유서’에서 “육신을 버린 후에는 훨훨 날아서 가고 싶은 곳이 있다. ‘어린 왕자’가 사는 별나라 같은 곳이다”고 하셨다. 그리고 “내생에도 다시 한반도에 태어나고 싶다. 누가 뭐라 한 대도 모국어에 대한 애착 때문에 나는 이 나라를 버릴 수 없다. 다시 출가 수행자가 되어 금생에 못 다한 일들을 하고 싶다”고도 하셨다.

스님은 이미 생전에 별나라에 사셨다. 늘 훨훨 날아다니셨다. 어떤 것에도 묶이지 않았고, 어떤 것에도 넘치지 않았으니 스님이 살던 세상은 별나라였고, 삶은 늘 훨훨 날아다닐 만큼 가벼웠다. 지금 어느 별엔가 계실 스님을 상상해 본다. 혹여 내생을 굳이 받으셨다면 이 땅 어딘가에 계실 스님의 모습도 떠올려본다. 어느 곳에 계시든 늘 곁에 계신 듯하다. 합장.

1979년 필자의 집을 찾았던 법정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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