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 간화선 발전 견인한 선지식

송~원 과도기에 활동한 몽산덕이
이질 앓던 중 참구, 완쾌 후 출가
완산적응 일갈에 대오… 法 계승
60세에 '육조단경'?재편집·유포
덕이본 '단경'?韓서도 인기 유통
함께 수행 등 고려불교 인연 깊어

강화도 선원사지. 몽산 덕이의 선풍은 고려에도 전해져 당시 선원사를 중심으로 전개됐다.

우리나라는 간화선 종주국이다. 중국 당대에 유학승들에 의해 선사상이 유입되면서 고려 말기까지 선사상이 들어왔다. 간화선은 고려 중기, 보조 지눌에 의해 처음 시작되었고, 고려 말기 간화선이 풍미를 이루었다. 고려 말기 나옹혜근·태고보우·백운경한 등에 의해 간화선이 발전하였지만, 이외 다양한 계층을 통해서도 간화선이 보급되었다. 바로 몽산 덕이(蒙山 德異, 1231~1308)의 간화선이다. 몽산의 선이 유입되면서 덕이본 〈육조단경〉과 더불어 함께 간화선이 한층 발전됐다.   

몽산이 한창 활동하려는 무렵은 남송이 망하고, 원나라로 접어든 시점이다. 세계를 제패한 몽골이 남송을 무너뜨리는 데는 40년이 걸렸다. 곧 몽산이 태어나 출가하고 깨달은 뒤 선풍을 전개하려는 시점까지 선사는 전란의 시대를 살았다. 1234년 북중국을 장악한 몽골은 몽산이 22세 되던 1253년에 남송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으며, 그가 48세인 1279년 남송이 멸망하고 원나라가 들어섰다.

그는 몽골에 대한 저항의식 속에서 성장했다. 몽골과의 항전에 직접 참여했다고 하지만 정확한 설은 드러나지 않고, 원나라가 중국을 지배했을 때, 순순히 따르지는 않았다. 몽산은 남송을 정복한 원나라 승상 백안(伯顔)이 그에게 큰 사찰 주지로 임명하겠다고 했을 때, 완강히 거절했으며, 원나라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선사가 대륙의 새로운 패권자인 원나라에 순응하지 않았으며, 생사의 자유를 추구한 의연한 선사로 추론된다.  
                             
몽산의 행적 
몽산은 고균비구(古筠比丘)·전산화(상殿山和尙)·휴휴암주(休休庵主)라고도 부른다. 1231년 강서성(江西省) 고안(高安)에서 태어났다. 몽산은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났지만 세간의 명리에 뜻이 없었다. 14세 때, 어느 승려의 〈반야심경〉 독송 소리를 듣고, 몽산이 그 의미를 묻자, 그는 죽암 묘인(竹巖妙印)를 찾아가라고 했다. 죽암은 자신을 찾아온 어린 몽산에게 “이 일을 잊지 마라. 다시 찾아오는 때가 있을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몽산이 휴휴암에 정착하기 전의 행적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명나라 운서 주굉(雲棲 ?宏, 1535∼1615)의 〈선관책진禪關策進〉에는 선사가 출가자의 길을 걷게 된 계기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1264년 6월, 33세의 몽산은 독한 이질에 걸렸다. 견디기 힘든 고통이 끝없이 이어졌다. 이때 몽산은 병든 몸을 일으켜 세운 뒤 정성껏 향을 피우고 기도했다.

“지난 세월, 지은 악업을 참회합니다. 이 목숨이 지금 다해 죽는다면 다음 생에는 속히 출가하기를 원하옵니다. 만약 병이 낮는다면 출가해 깨달음의 등불 밝혀 후학들을 널리 구제하기를 서원합니다.”

그는 좌복에 앉아 화두를 들었다. 오래 전부터 참구해왔던 무자 화두였다.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몸은 사시나무처럼 떨려왔다. 온몸이 찢겨나가는 고통에도 그는 무섭도록 화두에 집중했다. 얼마 뒤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그를 괴롭히던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몽산은 그해 8월 출가했다. 산문에 든 뒤에도 몽산은 수행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강소성(江蘇省) 소주(蘇州) 승천사 고섬여영(孤蟾如塋, 생몰미상)으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는다. “승려가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이 질문에 몽산은 이런 결심을 한다. ‘확연히 깨닫지 못한다면 결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리라.’ 선사는 절강성(浙江省) 경산(쓺山) 허당지우(肯堂 智愚, 1185~1269)를 만난다. 35세 되던 1266년 3월, 좌선 도중 한 수좌가 향 상자를 떨어뜨리는 소리에 몽산은 홀연히 깨달았다.  

몽산은 설암·퇴경·허주·석범 등 당대 선지식들을 찾아다니며 자신의 깨달음을 일일이 점검했다. 몽산은 어느 누구와 선문답을 해도 막힘이 없었다. 그러나 복주(福州) 고산(鼓山) 완산 정응(孔山 正凝, 1191~1274)은 달랐다. 완산은 몽산이 자칫 알음알이 병에 빠질 수 있음을 간파하고, 물었다. 

“‘광명이 고요하게 강의 모래만큼 많은 법계를 두루 비춘다’는 게송은 장졸 수재(張拙 秀才)가 지은 것이 아닌가?” 

몽산이 대답하려 하자, 완산은 번개처럼 고함을 내질렀다. 순간 몽산의 모든 사량분별이 한 순간에 멈추었다. 선사는 비로소 생로병사의 근원과 마주하게 된 것이다. 꿈속에서조차 화두는 떨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6개월이 지난 1267년 봄, 들에서 돌아오는 돌층계 위에서 홀연히 의심이 풀리면서 선사는 대오(大悟)한다. 이후 몽산은 완산 정응의 법을 받았다. 훗날 몽산은 제자들에게 깨달음의 확고함을 전하며, 이렇게 말했다.

“3년간 법답게 수행했는데도 견성하지 못한다면, 이 산승이 대신해 지옥에 들어가리라.” 

몽산은 강소성(江蘇省) 전산(澱山)을 거쳐 소주(蘇州) 평강부(平江府) 휴휴암이라는 작은 암자에 상주하며 대중들을 이끌었다. 때로는 서신으로도 사람들에게 정성껏 답변해주었다. 선사가 이 암자에 오래 머물러 그의 이름에 휴휴암이 늘 붙었다. 몽산은 1290년 60세에 〈육조단경〉을 재편집하여 유포시켰는데, ‘덕이본’이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덕이본이 근자까지 애독되는 어록이다. 이외 저술에는 〈불조삼경서(佛祖三經序)〉 〈몽산화상육도보설(蒙山和六道普說)〉 〈몽산어록〉 등이 있다. 

몽산의 선사상 및 정토법문  
선사의 선사상을 〈몽산법어〉에서 보면, 무자화두가 강조되어 있다.  

“참선은 모름지기 조사관을 꿰뚫어야 하는 것이요, 묘하게 깨치는 것은 마음 길이 끊어져야 하나니, 조사관을 뚫지 못하고 마음길이 끊어지지 못하면 모두 풀에 의지하고 나무에 붙은 도깨비와 같다. 어느 승려가 조주에게 묻되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하니, 조주가 이르되 ‘무(無)’라 하였다. 이 무자는 종문(宗門)의 한 관문(關門)이니 유심(有心)으로도 뚫을 수 없고, 무심(無心)으로도 뚫을 수 없다. 똑똑하고 영리한 사람이 바로 뒤집어 조주를 옭아 잡거든 내게 화두를 다시 가져와라.”

몽산은 선풍을 펼치면서 중생 교화에도 힘썼다. 그 가운데 하나는 염불 왕생을 권장했다. 그는 상례와 장례를 직접 주관함으로써 전란으로 죽어간 이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했다. 수많은 전쟁으로 가혹한 현실에 시달리는 이들을 위해 염불화두를 적극 보급하기도 했다.

“나무아미타불을 염하는 시간을 가리지 말라. 혀는 움직이지 말고 마음은 맑게 하라. 염불하는 자신을 때때로 점검하면서 다음과 같이 생각해보라. ‘이 몸은 헛되고 잠깐 빌린 것으로 곧 없어질 것이다. 그때에 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 이와 같이 오롯이 정진하면, 이 몸이 흩어지지 아니하고 곧바로 서방 아미타불을 친견하리라.” 

‘염불하는 놈이 누구인가(念佛是誰)’ 화두는 염불하고 있는 그 주체자를 화두로 하고 있다. 염불이 곧 화두가 되는 것이다. 염불하는 자신을 간절히 참구하면, 어느 순간 자성미타가 눈앞에 나타나 견성에 이른다는 것이다. 물론 ‘자성미타 자력정토’는 〈육조단경〉에서 설하고 있는 점이기도 하다. 송나라 말기부터 염불과 선이 결합되어 ‘염불선’이 발달되었는데, 몽산에게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우리나라 염불선은 몽산의 영향이 매우 크다. 고려 말 조선 초기, 우리나라 선자들의 어록에도 ‘염불하는 이가 누구인지 간절한 마음으로 반조(返照)하다 보면 어느 순간 아미타불을 친견하게 된다’는 내용이 많다.

고려와의 인연                               
만년의 몽산은 자국민보다 고려인들과의 교류가 많았다. 승려뿐만 아니라 왕실 인사와 고위관리들도 있었다. 1290년대 초 고려 불교계와 인연이 닿은 이후 고려 승려들이 휴휴암에서 안거를 지내기도 하였다. 수선사 10세인 혜감국사 만항(萬恒, 1249~1319)은 몽산의 법을 고려에 유통시킨 대표 인물이다. 만항이 몽산에게 편지로 게송을 보내자, 몽산은 만항에게 10수의 게(偈)로 화답하면서 선사에게 ‘고담(古潭)’이라는 호를 주었다. 또한 만항은 1298년 상인을 통해 덕이본 〈육조대사법보단경(六祖大師法寶壇經)〉을 구하여 1300여 년에 단경을 선원사에서 간행하였다.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 〈육조단경〉이다.

또한 보감국사 혼구(混丘, 1250~1322)도 몽산의 법을 찬탄했다. 1296년에는 원나라에 입국한 충렬왕과 고위관리 10여 명이 휴휴암을 찾아가 몽산의 법문을 직접 듣기도 했다. 나옹 혜근과 몽산은 실제 만났다. 근자에 유통되는 〈몽산법어〉는 나옹 혜근이 몽산을 만나고 돌아오면서 가지고 온 법어에 자신의 법어를 합본한 것이다.   

동안 이승휴(1224~1300)도 몽산과 인연이 깊다. 그는 말년에 고려 조정에서 신념을 지키다 관직에서 쫓겨났다. 이승휴는 간화선 수행을 결심하고 자신을 이끌어줄 스승을 찾아 몽산에게 서신을 보냈다. 동안은 몽산이 답신을 주리라고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관직에서 쫓겨나 궁벽한 산골에 머무는 늙은 거사에게까지 답변할 여력이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선사가 편지를 보내온 것이다. 

편지에는 동안이 ‘어떻게 수행해야 화두를 깨칠 수 있는지’, 또 ‘무엇을 경계해야 하는지’에 대해 상세히 서술되어 있었다. 동안을 더욱 감동시킨 것은 ‘동안거사 사간(司諫) 이승휴께서는 대장부의 지기(志氣)를 갖춘 분’이라며, 격려도 잊지 않았다. 선사는 편지에서 ‘석가와 미륵이 그의 종인데 그는 바로 누구인가’를 화두로 해서 정진하라고 했다. 

한국선에 끼친 영향  
몽산은 당시 중국에서는 크게 주목받지 못한 것으로 추론된다. 하지만 몽산이 한국선에 끼친 영향이 적지 않다. 한국 간화선에서 무자화두 위주의 화두참구법이나 의정을 중시하는 경향, 깨달은 이후 선지식으로부터 인가를 받은 것 등이 몽산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몽산법어〉는 조선 시대부터 우리나라 간화선의 지침서로 널리 유통되었다. 〈몽산화상 법어약록(法語略錄)〉은 1467년에 신미(信眉) 혜각존자(慧覺尊者)가 간경도감에서 처음으로 간행해 꾸준히 발행되었다. 오늘날 몽산과 관련된 보물, 유형문화재 등 지정문화재가 20여 건에 이르는 것도 몽산이 한국 간화선에 끼친 막대한 영향력을 증거한다. 몽산의 덕이본 〈육조단경〉은 강원교재로 사용되었다. 이외 〈몽산화상육도보설〉 〈제경촬요〉 〈몽산행실기〉 〈행적기〉 〈염불화두법〉 등 그의 모든 저작이 국내에서 편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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