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구업 형태 있는 韓정치판
현장서 망어·양설·악구 난무

관용없고 미움 가득한 정치용어
개인적 차원 넘어 공업으로 확대
이념·계층·지역 등 갈등 심화

구업 극복하는 방법 ‘愛語’ 사용?
구성원들 ‘연기적 시민의식’ 필요
품격은 언어서 나옴을 명심하라

언어를 철학적으로 고찰한 비트겐슈타인(Wittgen stein)은 그의 ‘그림이론’에서 “언어는 세계에 대한 그림을 그린다”라고 주장한다. 즉, 언어와 세계는 동일한 대응 관계를 갖는 것으로 언어의 구조가 세계의 구조를 그대로 나타낸다는 뜻이다. 이러한 이론을 한국의 정치판에 대입해 보면 한국 정치의 현실이 극명하게 나타난다. 근래에 한국 정치의 마당에서 펼쳐지고 있는 언어의 게임을 보면 이 구업을 어찌 담당할까 하는 근심이 생긴다. 

불교의 업(業) 이론에 ‘삼업’이 있다. 즉 몸으로 행하는 신업(身業), 말로 행하는 구업(口業), 마음으로 행하는 의업(意業)이다. 한국 정치판은 구업의 모든 형태가 나타난다. 망어(妄語), 양설(兩舌), 악구(惡口), 기어(綺語) 등이 한국 정치 언어 현장의 큰 흐름이다. 말의 칼날이 날카롭고 여백이 없어 듣기만 해도 섬뜩한 느낌이 드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구업이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공업적인 차원으로 확대되었다는 것이다. 

공업은 집단에 공통으로 적용되는 업이다. 이것은 한국정치사회 구조의 특징에서 나온 것이다. 지금 한국 사회는 갈등과 균열의 도가니 속에 있다. 이념 갈등, 계층 갈등, 지역 갈등, 세대 갈등 등 모든 영역에 갈등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다. 그중에서 이념적 갈등이 모든 갈등과 직간접으로 연결된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 이념적 갈등은 정치 집단과 직접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국정치의 현실에서 도식화되고 이분법적인 정치 용어가 난무한다. 이러한 용어에는 타자에 대한 관용과 이해가 없고, 계산과 미움이 가득하다. 이를 어쩌라. 우리가 받을 공업의 결과가 무섭다. 

불교의 업 이론의 핵심은 업을 운명론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현재 내가 어떤 선택을 하여 선한 업을 만들어갈 것인가에 초점이 있다. 악한 구업을 극복하는 방법은 애어(愛語)를 사용하는 것이다. 즉, ‘자비의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정치 집단에 생명줄을 대고 있는 정치인에게 이것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정치적 이해집단의 뜻을 어기고 용기를 부린 정치인이 겪는 고통을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본다. 제일 중요한 것은 사회구성원 각자가 ‘연기적 시민의식’을 함양하는 것이다. 각자는 독립적이고 원자적인 존재가 아니라 호혜적이며 네트워크화되며 상호의존적인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의식을 가지는 것이다. 이러한 연기적 시민의식은 큰 바다가 되어 미움과 혐오로 가득 찬 정치인의 언어들을 거품으로 삼켜버릴 것이다.  

현대사회는 통신 과학의 발달로 인해 점점 비대면 사회로 전환하고 있고 지금은 코로나 19로 인해 비대면 사회를 강요받고 있다. 비대면 관계에서는 도덕적 나태와 도덕적 무관심이 증가할 가능성이 크다. 비대면 사회는 익명 사회적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비대면 사회에서는 그만큼 도덕적 각성과 긴장이 필요하다. 인터넷에서 폭력적인 댓글 등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입기도 하고 자살을 하는 경우도 있다. 
 

한자의 ‘품(品)’은 ‘입구(口)’ 세자가 합성된 용어다. 사람의 품격은 바로 언어에서 나오는 것이니라. 필자는 삼업 가운데 구업이 제일 먼저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말할 준비가 돠어 있고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로 지금 여기서 선한 구업을 실천할 수 있다. 지난 한글날에 어느 정당의 대변인은 “바른 말, 고운 말로 정치의 품격을 지킬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는데 아득하게 느껴진다. 

사족 하나를 붙이고 글을 마친다.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좌기예(挫基銳)의 지혜, 즉 ‘날카로운 것을 무디게’하는 지혜를 우리나라 정치인에게 기대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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