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닦음의 길 24

‘식사는 하셨습니까?’

오늘날에도 흔히 쓰이고 있는 인사말이다. 몇 해 전에는 모 방송국에서 ‘식사하셨어요?’라는 프로그램이 방영되기도 하였다. 밥 한 끼 먹는 것이 큰일이었던 배고픈 시절의 정서가 아직도 남아있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 말 대신 ‘공양은 하셨습니까?’라는 독특한 표현을 쓴다. 그래서 불자가 아닌 사람들은 이 말을 들으면 무슨 뜻인지 의아해하기도 한다. 여기에서 공양(供養)이란 밥 먹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나라 사찰에서는 대중들이 모여서 발우(鉢盂)에 음식을 담아 함께 식사하는 전통이 있는데, 이를 대중공양이라고 한다. 요즘에는 안거 때 선원에서 정진하는 수좌들에게 공양을 올린다는 의미로 많이 쓰인다. 그렇다면 밥을 먹는 것을 과연 수행이라고 할 수 있을까?

공양이란 본래 누군가에게 음식이나 옷, 약 등을 바치는 것을 의미한다. 육바라밀 가운데 보시(布施)의 의미로 생각하면 될 것이다. 그런데 공양의 대상은 붓다와 가르침, 승가 삼보(三寶)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여기에서 붓다에게 바치는 공양을 불공(佛供), 불법(佛法)에 공양하는 것을 법공(法供), 승가의 주요 구성원인 승려에게 바치는 것을 승공(僧供)이라고 한다. 이렇게 삼보에 공양을 하는 것을 불자들은 공덕을 쌓은 행위라고 생각한다. 그 공덕으로 좋은 과보를 얻게 된다는 믿음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공양의 전통은 붓다가 활동하던 시기의 탁발 문화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출가한 사문들은 걸식을 통해 식생활을 해결하였는데, 이를 제공한 이들은 주로 재가불자였다. 사문들에게 걸식은 단순히 배고픔을 해소하는 수단이 아니라 깨침을 향한 수행으로써 의미를 지닌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도 몇 가지 엄격한 규율이 적용되었다. 예컨대 하루에 한 번 오전에만 탁발을 해야 하며, 일곱 집 이상을 다니면 안 되었다. 또한 탁발하는 집이 부유한지 가난한지, 공양 받는 음식이 어떤 종류인지 가려서도 안 된다. 그저 주는 대로 먹을 뿐이다. 이런 점에서 탁발은 하심(下心), 즉 아상(我相)을 내려놓는 매우 효과적인 수행이었다. 얻어먹는 사람이 어떻게 우쭐하는 마음을 낼 수 있겠는가.

한편 사찰이 생기고 교단의 규모가 커지면서 공양의 대상도 수행자 개인에서 대중으로 확대되기에 이른다. 우리가 사찰에서 먹는 음식은 누군가 정성껏 보시한 공양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절에서 음식을 먹을 때는 당연히 감사의 마음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감사의 마음은 먹을 것을 보시한 사람뿐만 아니라 이 음식이 여기까지 오게 된 모든 인연들로 이어진다. 밥을 먹기 전에 “한 방울의 물에도 천지의 은혜가 스며있고 한 톨의 곡식에도 만인의 노고가 담겨있습니다. 정성이 깃든 이 음식으로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하고 청정하게 살겠습니다”라는 공양게(供養偈)를 합송하는 이유다.

음식은 어떤 마음으로 먹느냐에 따라 수행이 되기도 하고 배고픈 욕구를 충족시키는 행위가 되기도 한다. 우리가 먹는 모든 음식에는 태양과 구름, 비, 바람과 같은 대자연의 은혜뿐만 아니라 이를 길러낸 많은 사람들의 땀방울이 담겨있다. 그렇기 때문에 공양은 단순히 허기진 배를 채우거나 입맛을 위한 행위가 아니라, 모든 것은 연기적으로 존재한다는 실상을 인식하고 감사의 마음을 가지는 수행이다. 사찰에서 음식 남기는 것을 경계하는 이유도 공양 자체가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하고 청정하게 살기 위한 실천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밥 한 톨도 남기지 않는 불교의 공양 문화가 음식물쓰레기 문제를 해결하는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는데, 이는 우리에게 덤으로 주어진 선물이다.

발우에 담긴 음식을 깨끗하게 비운 후에는 대중들이 합장을 하고 “이르는 곳마다 부처님의 도량이 되고 베푼 이와 수고한 모든 이들이 보살도를 닦아 다 같이 성불하여지이다”라고 합송을 한다. 공양게에는 대중들의 한 끼 식사를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은 모든 이들이 열심히 정진하여 성불하기를 바라는 마음까지 담겨있다. 이런 마음으로 음식을 먹는다면 공양하는 장소가 집이든 식당이든 관계없이 그곳이 바로 부처님과 함께 하는 거룩한 도량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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