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나라 유일한 간화선 선지식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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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 황제들 라마교 신봉·지지해
당·송代 보다 禪수행 문화 후퇴
명본 출현… 선수행 명맥 계승해
일본 승려 제자 받아 선맥도 전파

중국 천목산 내에 있는 개산노전(開山老殿) 안의 세 명의 선사 동상. 사진 가운데 선사는 개산노전에서 선풍을 알린 고봉 원묘이며, 우측이 제자인 중봉 명본이다. 좌측은 단애 요의 선사다.

라마교 신봉한 원나라
원대 황제은 라마교를 신봉하고, 라마승들을 지지했다. 이 시기에 라마승들은 국사 지위까지 오르면서 중국불교사에 티베트 불교가 크게 자리 잡는 계기가 되었다. 원대의 선은 이전 당·송대에 비하면 매우 미약한 흐름이었다. 송대 이후 선자(禪者)가 배출되지 못하면서 불교가 점차 세속화되어갔고, 겨우 명맥을 이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듯하다.

청나라 말 20세기 초 선사인 허운(1840~1959)과 태허(太虛, 1889~1947)도 “당대만큼 뛰어난 선자가 나오지 못한다”며 당시 불교의 쇠퇴를 염려했다. 원대의 선은 불교학을 포함해 발전된 측면보다는 과거의 사상을 답습하는 것에 머물렀다고 본다. 바로 이런 시기에 뛰어난 수행자가 등장했는데 중본 명본(中峰明本, 1263~1323)이다. 당시 강남에서 뿐만 아니라 일본에도 명본의 선이 널리 알려져 있다. 명본은 원대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한 명이다. 후대 선종사에서는 스승인 원묘보다 명본의 선사상이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고 평가하고 있다.   

명본의 행적 
중본 명본은 절강성(浙江省) 전당(錢塘. 현재 항주) 출신이다. 속세의 성은 손 씨, 호는 지각(智覺)이다. 명본은 9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어린 나이에 불교에 귀의했다. 선사는 15세에 출가해 <법화경> <원각경> <금강경> 경전을 독송하며 연지공양을 실천했다. 명본은 경전과 어록에 심취해 있었는데 <금강경>을 읽는 중 ‘여래를 짊어진다(荷擔如來)’라는 말에 깨달음이 있었다. 

1286년 24세에 명본은 천목산 사자암의 원묘에게 귀의하고 삭발하였다. 27세에 흐르는 물을 보고 깨달은 뒤 게송을 지어 스승께 보이고, 깨달음을 인가받았다. 이후부터 명본은 큰 절에서 불러도 가지 않고 천목산중을 옮겨 다니며 정진하였다. 1298년 36세, 명본은 겨울에 중가산(中佳山)에 머물며, 그곳을 환주암(幻住庵)이라고 칭했다. 환주암은 지금도 현존하며, 지금은 도량이 찻집으로 변모되어 있다. 허깨비같이 잠시 형상(相) 없이 머물다가 떠난다고 하여 환주암이라고 했다. 이 무렵부터 명본의 법력이 세상에 알려져 세인들은 그를 ‘강남의 고불(古佛)’이라 불렀다. 

1318년 선사가 인종(仁宗, 재위 1311~1319)의 초청에 응하지 않자, 황제는 금란 가사와 ‘불자원조광혜선사(佛慈圓照廣慧禪師)’라는 호를 하사했다. 또한 선사를 ‘보응국사(普應國師)’로 봉하고, 그가 머물던 절에 ‘사자정종사(師子正宗寺)’라는 사호(寺號)를 내렸다. 명본은 스승과 똑같이 천목산을 중심으로 선풍을 전개하다가 61세에 입적했다. 문종은 ‘지각선사(智?淋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법운(法雲)’이라는 탑호를 내렸다. 1334년 순제가 <천목중봉화상광록(天目中峰和廣?)> 30권을 입장(入?)토록 허락했다. 저서에는 <금강반야경약의> <중봉광록>(시중·소참·법어·송고·산방야화·일화오엽·동어서화·환주암청규·환주가훈) 등이 있다. 

그의 문하에는 천어유칙·척암원장·무조감 등이 있고, 조맹부(趙孟?)도 참선했다. 이외 일본 승려 제자들도 있었다.   
                                         
명본의 공안에 대한 해석 
선사는 대혜 종고를 이어 선자들에게 간화선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명본은 <산방야화>에서 공안에 대해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공(公)’이란 성현들의 깨달은 그 길(轍)을 하나로 하여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그 길로 함께 갈 수 있도록 하는 지극한 가르침이며, ‘안(案)’이란 성현들께서 그 깨달은 이치인 도에 나아가는 올바른 방법을 기록한 것이다.”

또한 “‘공’이란 개개인의 주관적인 주장을 개입시키지 않았다는 의미이며, ‘안’이란 반드시 불조와 똑같이 깨달음을 만들겠다는 뜻이다. 따라서 공안이 풀리면 번뇌의 알음알이가 사라지고, 번뇌의 알음알이가 사라지면 생사의 굴레가 공空해지며, 생사의 굴레가 공해지면 불도를 이룰 수 있다”고 하였다. 또한 이렇게 기술하기도 했다. 

“세상사에 문제가 생기면 사람들은 관청에 공정한 재판을 요청하는데, 관청에서는 법조문에 의거해 재판을 한다. 이처럼 참선자가 깨달음이 있으면 스승을 찾아 점검을 받아야 한다. 스승은 공안을 근거로 해서 의심을 풀어준다. 공안은 바로 번뇌를 깨뜨리고 지혜를 밝혀준다. 불조의 혜명을 잇는 데는 공안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명본은 문자로 공안 해석하는 것을 반대했고, 고증식의 참선방법을 비판하였다. 곧 종고의 사상을 계승하면서도 간화선을 새롭게 개선하며, 당대와 송대에 활발했던 선풍을 재현코자 노력하였다. 한편 명본은 청규를 재정비하고, 선교 논쟁에 참여해 선의 우위성을 변론하였다. 

명본의 선사상              
명본은 당시 선종 5가의 특색을 <산방야화>에서 이렇게 묘사하였다. “위앙은 근엄, 조동은 세밀, 임제는 통쾌, 운문은 고고, 법안은 간명하다.” 

원나라의 선은 이전보다 선자 배출이 없었고, 선사상 또한 발전이 없었다. 이런 현실에 선사들 중에는 옛 선사들의 할ㆍ방을 흉내 냈는데, 이 점은 오히려 선의 부정적인 측면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당시 이런 열악한 선의 흐름에서도 명본의 선사상은 주목할 만하다고 본다. 

명본은 <동어서화(東語西話)> 상권에서 근원적인 중생심의 영묘한 작용, 즉 본지풍광을 신광이라고 묘사했다. 

“깨달음의 당체는 밝고 밝아서 우주에 가득 찼으며, 눈부시게 색과 공, 그 모두에 사무쳤다. 그러나 그 모습은 볼 수 없고 자취도 없다. 푸르지도 누렇지도 않으며 길거나 짧지도 않다. 그것은 근기에 따라 감응하여 설산(雪山) 한밤중에 샛별이 되기도 하고, 당양(當陽)에 현로(顯露)하여 용담 스님(龍潭崇信, ?~?)이 제자 덕산(德山宣鑑, 782~865)을 위해서 불어 꺼버린 촛불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비추는 본체는 조금도 이지러지지 않아 동평(東平) 스님의 깨져버린 거울이 되기도 했으며, 비추는 방향을 구별하지 않은 베살리성의 꺼지지 않는 등불이 되기도 했다. 오랫동안 본체에 접하여 본체와 떨어지지 않아 마침내 눈에 가득하여 눈이 멀기도 하였으니, 이를 신광이라고 한다.”

다음은 신광송(神光頌)이다. 

“불성의 광명은 신령하여 어둡지 않으매/ 만고에 이르도록 오히려 장엄하네./ 불법의 문안에 들어오려면/ 아는 체하는 알음알이(知解)를 두지 말지니라.(神光不昧 萬古徽猷 入此門來 莫存知解)” 

명본의 화두 참구 방법은 이와 같이 기술돼 있다.

설령 이생에 깨치지 못하더라도, 다만 신심만 퇴보하지 않는다면 한 생 두 생을 넘지 않고 누구나 깨침을 얻을 것이다. 혹 20년 30년을 공부하여 깨치지 못하더라도 부디 다른 방편을 구하지 말라. 다만 다른 인연에 끄달리지 않으며, 모든 망념을 끊고 힘써 화두를 들어야 한다. 그런 뒤에 살면 살고, 죽으면 죽는다는 각오로 정진한다면 3생이든 5생이든 10생이든 내지 100생이라도 괘의하랴. 만약 철저히 깨닫지 못하면 결코 쉬지 말지니, 이런 정인正因만 있으면 대사大事를 마치지 못할 것을 걱정할 것 없다. 병중 공부에는 용맹정진도 필요 없으며, 눈을 부릅뜨고 억지로 힘을 쓸 것도 없으니 단지 그대 마음을 목석과 같게 하고, 뜻을 찬재(寒炭)와 같이하라. 이 4대환신(四大幻身)을 타방세계 밖으로 던져 버리고 병들어도 그만, 살아도 그만, 사람이 와서 돌봐줘도 그만, 돌봐줄 사람이 없어도 그만, 향기로워도 그만, 추한 냄새가 나도 그만, 병을 고쳐 건강해서 120세를 살아도 그만, 혹 죽어서 숙업에 끌려 화탕ㆍ노탕 속에 들어가도 그만이라고 생각하라. 그리고 이런 경계 중에 조금도 동요됨이 없이 간절하게 저 아무 맛도 없는 화두를 가지고 병석에 누운 채 묵묵히 궁구해가라. - <시중>

참선의 공덕 
명본은 요즈음 공부하는 사람들이 증득을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로 세 가지를 들었다.
 
첫째 옛 사람처럼 굳은 지기(志氣)가 없고, 둘째 생사와 무상(無常)에 대해 철저히 파고들지 않으며, 셋째 오랜 세월 익혀온 버릇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루 종일 남을 따라 참선한다고 선방에 살지만 방석에 앉자마자 혼침에 빠지거나 마음이 산란하다. 또한 ‘한 발짝도 뒤로 물러서지 않겠다’는 굳은 믿음도 갖추지 못했으니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저절로 부처가 된 석가가 어디 있으며, 하늘에서 떨어진 미륵이 어디 있는가? 근자에 소견머리 없는 사람들이 스스로 정진은 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말세라고 한탄하며 종단 꼴이 어떻고, 총림 꼴이 말이 아니라고 하며 입만 살아 나불댄다. 그러면서 선지식도 없고, 함께 공부할 도반도 없다고 떠들어댄다.

게다가 거처할 도량이 불편하고, 음식이 부실하며, 청규가 청정하지 못하다며 짜증 부리고, 도량 환경이 좋지 않아 공부에 진전이 없다고 말한다. 대부분의 승려들이 이런 생각을 하니, 이는 마치 농부가 가뭄이 심하다면서 김을 매지 않는 것과 같거늘 무슨 결실이 있겠는가? 그러니 수행자가 나쁜 경계를 만났다고 해서 한 생각이라도 분별하면 그것은 생사의 허물 속에 영원히 묶이게 된다. 

선교일치·선정일체·유불일치 
당말 송대 초기에 영명 연수(永明延壽, 904~975)가 <종경록>에서 주장했던 선교일치·선정일치·삼교합일 사상은 원나라 명본의 사상에도 그대로 드러나 있다. 선과 염불의 회통이나 선교의 회통 등은 명본에게만 나타난 사상이라기보다는 당시 승려들의 보편적인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명본은 선교에 대한 합일을 이렇게 4계절로 표현했다. “밀종은 봄이고, 천태·현수·자은종 등은 여름이며, 남산율종은 가을이고, 소림이 단전(單傳)한 종은 겨울이다.”, “4종은 모두 일불(一佛)의 뜻을 전했다”라고 표현하였다.

명본은 정토를 신봉했는데, <관념아미타불게(觀念阿彌陀佛偈)>나 <회정토시백편(뫍쎐土詩百篇)>을 저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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