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좋은 보배가 여기 있다 하더라도 쓸 줄 모르면 그건 허탕이에요

악을 저질렀다 해도 어차피 지은 거 그냥 놓아라.
껍데기가 한 게 아니라 알맹이가 한 거 알맹이가 해결을 해야지,
시자라고 하는 이 집이 왜 상관을 합니까?
???????울고 찌고 바깥으로 헤매고 말입니다.

내가 죽은 이름 없는 이름이여

질문 : 저희 집에 대행 큰스님께서 법회 중에 읊으신 “내가 죽은 이름 없는 이름이여. 나와 남이 두루 같이 죽은 이름 없는 이름이여. 나와 남이 두루 나투는 이름 없는 이름이여. 해산봉은 화산 터져 두루 불이 이름 없는 이름이여.” 이런 게송이 액자로 걸려 있습니다. 스님께서 말씀하시는 공부의 세 단계를 말씀하신 것이라 여겨지긴 하지만 그 뜻을 좀 더 자세히 알려 주시면 공부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답변 : “내가 죽은 이름 없는 이름이여.” 첫 번에 이랬습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이것은 바로 내가 공이라는 걸 안 것입니다. 내가 공했다는 걸 알고 자기가 그냥 함이 없이 생활을 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내가 죽은 이름 없는 이름이여.” 이랬습니다. 그거를 잘 생각해 보세요.

“나와 남이 두루 같이 죽은 이름 없는 이름이여.” 이랬습니다. 이것은, 첫 번에 있는 것은 깨달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깨달았어도, 나를 발견했어도 수억겁을 거쳐 나오면서 그 모든 악업 선업에, 즉 말하자면 의심과 모든 착과 욕심 그런 것이 그냥 모두가 남아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와 남이 두루 같이 죽은 이름 없는 이름이여.” 둘이 아닌 도를 알아야만이 또 이것이 해당하는 겁니다. 모두가, 죽은 사람이나 산 사람이나 둘이 아님을 알아야 이게 그렇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생활하면서 자꾸 배우면서 지혜롭게 자꾸 둘이 아님을 알아야 영계성이나 유전성이나 내 앞에 닥친 이러한 모든 것을 대치해 나갈 수 있는 겁니다.

예를 들면 흉갓집이라고 하는데를 싸게 사서 들었습니다, 어느 분이. 그건 왜냐. 이 도리를 믿고 그런 거죠. 그래서 싸게 사 가지고 들어가서 둘이 아닌 도리를 아니까 그냥 삼켜 버린 거죠. 얼른 쉽게 말해서 영에다 영을 넣으니까 영이더라, 그대로. 수만 개를 영에다 집어넣어도 둘이 아니다라는 얘기죠. 그러니까 죽은 사람도 그렇지만 산 사람도 마음이 있으니까 전부 결부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죽은 이름 없는 이름이여.” 이랬듯이 나부터 죽어야 모두가 둘 아니게 할 수 있지 않습니까. 내가 살고, 내가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이 어떻게 보이지 않는 마음을 둘 아니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 모든 게 공이다 하는 겁니다. 이것이 항상 고정됨이 없다. 고정됨이 없으니까 함이 없이 하는 거다. 발자국을 떼어 놓아도 떼어 놓은 사이가 없다. 그것에 집착하지 마라. 악을 저질렀다고 해도 어차피 지은 거 그냥 놓아라. 그것은 껍데기가 한 게 아니라 모든 거, 알맹이가 전자부터 한 거 알맹이가 해결을 해야지, 자기가 한 거 자기가 해결해야지 시자라고 하는 이 집이 왜 상관을 합니까? 일일이 왜 상관을 해요? 울고 찌고 바깥으로 헤매고 말입니다.

그러니깐 고정됨이 없이 이렇게 간다고 하는 그 자체가, 우리가 말을 해도 항상 이 사람하고 말을 했다가 그냥 그거 무심코 그렇게 놓고 가잖아요. 무심코 놓고 그냥 딴 사람하고 얘기하고, 또 이것 보고 저것 보고 자유롭게 보고 자유롭게 말하고 자유롭게 만나고 자유롭게 하시잖아요. 그게 바로 함이 없이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도, 함이 없이 하는데도 이거는 있다고 우기거든요, 마음이. ‘내가 오늘 이렇게 이렇게, 내가 했는데….’ 이렇게 하거든요.

그런데 이게 고정된 게 하나도 없다 이겁니다. 여러분들이 생활하시면서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누가 왔으면 “어서 와!” 하고 말을 해 놓고 그러곤 갔어요, 얘기하고. 갔으면 그뿐이지 그냥 만나서 얘기했을 뿐이지 거기에 뭐가 있습니까? 또 그것이 바람처럼 달아나갔어요. 또 왔어요. 또 만나고 또 보고 또 듣고, 남편 만나고 자식 만나고, 부인 만나고 자식 만나고 형제 만나고 이래도 그냥 만났을 뿐이지 거기에 뭐, 뭐가 붙습니까. 거기서 뒤에 또 생각이 나면 또 거기다 놓으시란 말입니다. 그 놓고 그냥 하면은 함이 없이 되기 때문에 모든 게, 죄나 이런 것도 다 없다 이겁니다. 선도 없고 악도 없는 그 가운데서 여여하게 그대로 삶을 정말 통탈하게 살 수 있다.

그러니 공용으로 행하라. 그냥 행하라는 게 아니라 공용으로 행하라. 이게 두 번째의 둘이 아닌 도리에 관한 건입니다. 그래서 그 습관과 관습, 이 미움과 이쁜 거와 모든 착과 욕심 이런 문제들도 다 거기다가 한데 닥치는 대로 놓으면 이게 둘이 아닌 게 나오죠. 거기다 놓고 가다 보면 다 나오게 돼 있거든요.

“나와 남이 두루 나투는 이름 없는 이름이여.” 나와 남이 둘이 아니게 나툰다 이겁니다, 같이 더불어. 나투는 것은 우리가 화해서 변화하는 걸 말합니다. 화해서 변화해서 내가 몸도 바꾸어서 그 사람한테 맞추어서 절충하는 겁니다. 맞게 응하는 겁니다. 응해서 이렇게, 즉 말하자면 공용으로 공식하는 것이 그냥 그대로 여여한 것을 말하는 겁니다. 그러니 이 세 번째 이렇게 하고, “해산봉은 화산 터져 두루 불이 이름 없는 이름이여.” 했습니다. 그 이름 없는 이름이니 그대로 여여하더라, 그대로. 그대로 여여하더라. 이 고비를 다 넘어서 두루 그대로 여여하더라 이겁니다.

그래서 여직껏 여러분들한테 “주인공에 놓아라, 놓아라.” 하는 소리를 아마 헤아릴 수 없이 했을 겁니다. 한 소리 또 하고 한 소리 또 하고, 항상. 오직 내가 있기 때문에 나 한군데서 모두가 나가지 내가 없으면 뭐가 있습니까? 내가 있기 때문에 그 한군데서 모든 게 나갑니다. 우주도 있고 세상도 있고 과거, 현재, 미래도 있고 생사도 있고 말입니다. 이게 모두가 나한테 있는 겁니다. 내가 이 세상에 나와서 알았으니깐 말입니다.

이런 예가 있습니다. 요새 텔레비전을 보니까 말입니다, 어느 남녀가 둘이 애인 사이인데 컴퓨터에 정열을 다 쏟아 가지고, 그 남녀가 둘 아니게 자기가 되려면 어떻게 되나 하고 컴퓨터로 10년을 그냥, 배우고도 10년을 그거를 다 할 줄을 아는 거, 남의 거 뺏어 오기도 하고 들이낄 수도 있고 그런데 그거를 못해서 10년을 간 거예요. 어떻게 애인과 자기가 둘 아니게 될 수 있을까. 근데 그것을 이 부처님 법으로 이렇게 빨리 알았으면 되었을 텐데 그렇게 고생을 한 거예요. 고생을 하고 났는데 나중에 결국 보니까 이 체가, 몸이 있어 가지고는 둘이 하나가 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 거예요. 그러니까 컴퓨터에서는 한계가 있었던 거죠. 그거를 알고선 바로 그냥 불 질러 버렸어요. 불 질러 버리고는 죽어 버렸어요, 둘이 다. 하나가 되기 위해서. 실천을 하기 위해서.

그거 어떻게 생각하세요? 남들은 평생을 자기 일생을 저거 해서 둘 아니게 하나로 하기 위해서 그냥 자기 몸을 불에다 집어넣는데 말입니다. 어떻게 생각을 하세요? 그런데 살아 있으면서 불에다 넣으라고 그런 거예요. 본래 불에다 넣으라고 그런 게 아니에요. 본래 우리는 여여하게 그렇게 함이 없이 하고 간다니까요, 지금. 곰곰이 생각을 해 보세요. 그냥 여여하게 간단 말입니다. 아까 맨 끄트머리에 그냥 “그대로 여여하더라.” 이랬죠? 그 다섯 가지의 말이 다 이, “그대로 여여하더라.” 이 소리에 다 들어간 겁니다, 그게. 첨보되는 말입니다.

이 모든 사람들이 아주 깜짝, 그러니까 깜짝, 깜짝 한 생각입니다. 깜짝 한 생각! 여러분들이 이런 과정이 없다면 깨칠 수도 없으니까, 이런 과정을 거쳐야 되니까 이런 과정을 거쳐라. 이 자동적인 컴퓨터 얘길 만날 했죠. 거기에 과거에 입력된 것을 자꾸자꾸 현실에 자꾸 놓으니까 입력이 되는 대로 과거에 입력된 게 자꾸 없어진다. 그게 팔자 운명, 모두 자기가 지어 놓은 것들, 나쁜 거 이런 것이 모두 하나씩 하나씩 없어지는 겁니다. 그런데 이건 과거에 지은 모든 업보를 성급하게 한번 관하면 되는 줄 알아요. 물론 쉬운 것도 있죠. 금방 이렇게 저거 한 건 금방 관하면 금방 그건 될 수도 있죠.

그래서 늦게 된다, 금방 된다, 안 된다 이런 것이 없어요. 그건 자기 할 탓이니까. 자기 지혜에 달려 있고 요량에 달려 있어요. 공용으로 사용을 하느냐, 그냥 자기가 현실에 사는 것처럼 산다고 그냥 하느냐 이게 문제죠. 우리가 그대로 공용으로 하는 거예요. 그대로, 우리는 그대로 공식하고 있고요. 경전에서는 원식이라고 합디다만 그냥 공식이라고 해도 여러분들이 다 알아듣겠으니까 말이에요. 먹는 것만 식이 아니에요. 우리가 모든 생활하는 데서 나오는 걸 거기다 집어넣는 것도 공식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어떤 거든지 대치를 하고 어떤 거든지, 보이지 않는 데서 나를 친다 하더라도 대치할 수 있고, 보이는 데서 어떤 문제가 생긴다 하더라도 대치할 수 있고, 그렇게 자기가 여여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의 그 움죽거리지 않는 주장자를 싸고 있는 영혼, 자기 영혼…. 자기 영혼이 없으면, 불성은 그대로 있는 거지만 자기 영혼이 없으면 태어나지 못하거든요. 그 영혼을 구제를 해야, 영혼이 구제를 받아야…, 구제를 받는다는 건 그렇게 자꾸 해야 영혼과 불성과 둘이 아니게 되면서 이게 그냥 함락이 되는 거예요. 즉 우주가 함락이 되는 것과 같아요. 만약에 아까 컴퓨터 하는 사람이 이 도리를 알았더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데도 불구하고 왜 딴 이름은 믿고 딴 형상을 믿으면서 진짜 자기를, 수억겁을 거치면서 진화시키고 형성시켜서 나온 장본인을 못 믿는단 말입니까, 진짜 장본인을

진정한 마음의 보시란

질문 : 불교 수행에 있어 보시는 굉장히 중요한 실천 덕목으로 알고 있는데, 스님께서는 마음의 보시를 특히 강조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진정한 마음의 보시를 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요.

답변 : 우리가 베푼다는 게 무슨 돈이 있어서 베풀어야만 베푸는 게 아니거든요. 남을 섭섭지 않게 한다, 남을 가슴 아프게 하지 않는다, 남을 무시하지 않는다, 의리를 저버리지 않는다, 도의다 또 은혜다 이런 문제 등등을 모두 종합해서 생각할 때, 남을 섭섭하지 않게 하라. 그렇다고 해서 꼭 돈을 줘야만 그것이 보시가 아니라 내 마음의 보시가 돈보다도 더 크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그런데 이거는 마음이 더 큰 보시랬다고 금방 밥을 굶을 텐데도 밥 먹을 걸 안 준다면은 그건 지혜롭지 못하고요. 지혜로운 사람은 깡통을 들고 온 거지한테도 밥을 그 깡통에 담아 주고 반찬은 물 흐르지 않게 봉지에다 따로 줍니다. 따로 주면서 마음속으로 ‘다시는 이렇게 얻어먹지 말고 네가 농사지어서 네가 추수해서 네가 먹도록 해라.’ 하고 마음을 내 주죠. 그런 것이 진정한 보시라 할 수 있습니다.

답답하니 점집을 찾게 되는데

질문 : 요즘같이 어렵고 힘든 시절에는 살길이 막막하니까 불법을 믿는다 하면서도 점집을 찾아가고 싶은 마음 간절합니다. 불자라 하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점을 보러 다니는데 저희들이 마음을 다잡을 수 있도록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답변 : 수없이 억겁을 거듭거듭 거쳐 나오면서 모습을 바꿔 가면서 얼마나 아팠던가. 얼마나 쓰렸던가. 얼마나 고에 휘달렸던가. 그런 데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그 습을 놓지 못하고, 그 노비 문서를 놓지 못하고, 그 종 문서를 쥐고 다니는 이러한 여러분의 그 답답함을 나는 도대체 알 길이 없습니다. 도대체 떳떳하고 광대무변한 한 인간으로서 자유인이 되지 못하고 항상 노예로서 거지, 또는 귀신, 이런 짓들만 하고 다니니 이게 똑똑한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이 가운데 좋은 물건이 있다 하더라도 여러분이 그 물건을 쓸 줄 모르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이 세상을 다 주고 바꿀 수 없는 보물이, 보배가 여기 있다 하더라도 쓸 줄 모르면 그건 허탕이에요. 그 보배를 가지고도 당신네들이 쓰지 못하는 관계상 그 보물은 아무 쓸모 없이 된단 말입니다, 모두.

우리 그 은하계의 안에도, 이 중천세계의 우주 안에도 큰 은하계가 지금도 두 개씩이나 더 있고, 또 작은 은하계도 한 4천여 개 됩니다. 그 안에도 빛이 좀 작은 것도 있고 큰 것도 있고, 또는 빛을 내지 못하는 것도 있습니다. 그냥 하나도 일어서지 못하고, 우리네들 사람 살 때 좀 살게끔 일어서질 못하고 아주 찌들려서 사는 것처럼. 그런 부분 부분이 얼마나 많이 같이 섞여서 돌아가는데요. 우리 사는 거나 똑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무리를 지어서 지금 돌아치는 거나 똑같아요. 뭐가 다른 게 있겠습니까?

나는 개떡같이만 봐요, 개떡같이. 왜? 개떡같이 보는 것은 내 한 점에 다 나 아님이 없기 때문에 개떡 같다 이 소립니다. 나를 개떡같이 보는 거니까 전부 다 개떡 같고, 위대하게 보면 전부 다 위대하게 보고 그러는 거예요. 사는 게 모두 그렇게 돌아가는 거죠. 힘이 있으면 빨아당겨서 제 것으로 만들고 힘이 없으면 거기에 들어가서 종노릇을 하는 것이 보통이거든요. 우리 우주의 섭류도 역시 힘이 있으면 탁 쳐서 그냥 버리거나 쫙 빨아들여서 자기 거로 만들거나, 이런 문제들이 숱하게 많으니깐요. 그러면 지금 이 안에서 살아나가는 여러분도 역시 다 같이 살아가면서 그렇게 살고 있지 않을까요?

여러분이 살아나가는 데도 마음들을 그렇게 쓰니 어찌 뺏기지 않고 삽니까? 하다못해 무당한테도 마음을 뺏기고 살지 않나, 부적한테 뺏기고 살질 않나, 장승한테 뺏기고 살질 않나, 남이 용왕이 있다니까 용왕한테 뺏기고 살질 않나. 전부 이름을 해 놓고는 그 이름한테 전부 뺏기고 살아요. 정신들이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 내 정신 내가 가지고 사는 거지, 왜 자꾸 정신들을 뺏기고 사느냐 이겁니다.

모든 게 여러분의 마음에 달려 있어요. 이게 마음이 얼마나 기묘하고 광대무변한지 여러분은 체험을 안 해 보셔서 그렇지 체험을 해 보세요. 모든 걸 체험하고 안으로 굴리면서…. 그런데 제 아비도 몰라요. 제 아비가 제 안에 있는데 모른단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 아비가 여기 있다고 해서 둘로 보지 마세요. 내가 아비이자 자식이고, 자식이자 아비다 이겁니다, 그냥 그대로.

그래서 공했다고 그랬지 않습니까. 공이자 색이고 색이자 공이다. 여직껏 끌고 다니는 거 지금도, 오늘도 부지런히 육신을 놀려서 밥해 먹이고, 빨래하는 사람 빨래하게 하고, 똥 눌 사람은 똥 누게 하고, 가다이를 다 치고 이러고서는 또 여기 나오게 만드는 이, 발걸음을 종종걸음을 걷게 한 그 장본인이 누굽니까? 바로 여러분의 성품에 따라서 환경을 자기가 조성해 나가고 화합을 시키고 조화를 이루고…. 이렇게 살아나가는 것도 여러분이지, 딴 데서 오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아이고, 이거는 영 안 되니 이놈의 노릇을 어떡하나 하고 안 된다고 생각을 했으니까 안 되는 거고, 된다고 생각을 하니까 되는 거고. 내가 새 달에 무당이 나쁘게 된다니까 그냥 나쁜 줄 알고 쩔쩔매는데 내 주인, 이 주장자의 주인이 없으니깐 그런 소리를 듣고 말리는 겁니다. 오히려 귀신한테 말리는 거예요. 내가 귀신이 되는 거지요. 내가 가고 싶으면 가고, 이사 갈 때 되면 가고, 내가 하고 싶으면 하고, 떡 해 먹고 싶으면 떡 해 먹고 아이, 이러는 거지, 누구에 의해서 해요? 안 그래도 지금 살기가 고달프다는데 아니, 여기에 끄달리고 저기에 끄달리고 어떻게 편안하게 살 때를 바랍니까?

고요한 마음, 부끄럽지 않은 마음, 온화하고 자비하고, 스스로서 자비가 나오고, 스스로서 지혜가 나오고, 모든 것은 한데, 내 주인공을 믿고 내 주인에다가 다 맡겨 놓고 감사하고, 거기서 물러나지 않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들이고 내는 거, 일심에서 일체 만법이 나고, 일체 만법이 일심으로 드는 것인데 이걸 무시하고서 방황하니까 모든 문제가 틀어지는 거예요. ‘응, 네가 그렇게 나를 믿지 않고, 자기가 자기를 믿지 않고 그렇게 돌아치니까 너 좀 돌아봐라.’ 그러지 뭐, 그럼 어떻게 합니까.

어떤 사람이 이랬대요. 부적을 해다가 베개에다 넣고, 그것도 10만 원짜리, 7만 원짜리, 5만 원짜리 이렇게 해서 일곱 장을 사야 그달에 뭐 괜찮다고 그래 가지고선 그걸 다 사다가 여기도 놓고 저기도 놓고 그랬답니다. 그러다가 여기를 오게 됐대요. 여기를 며칠 다니면서 인제 설법을 듣고 그랬는데, 어느 날 밤 꿈에 스님이 오셔서 “너희가 여기저기 감춰 놓은 거 좀 내놔 봐라.” 그러더랍니다. “감춰 놓은 게 없습니다.” 하니까 “이것도 없어? 여기에 매달려서 너희가 잘되려 하느냐?” 하면서 그 베개에 있는 거 뭐, 있는 거 다 내놓으라 그러더니 다 그냥 후루루 그냥 이렇게, 그냥 삼켜 버리더랍니다. 그냥 이렇게 다 몰아서 놓는데 벌써 그냥 확, 그냥 불이 확 붙어 가지곤 그냥 흔적도 없더랍니다.

“그런 꿈을 꿨습니다. 이게 무슨 꿈입니까? 이거 해로울 꿈 아닙니까?” 그러기에 “아휴, 저러니 할 수 없지. 저렇게, 마음 쓰는 게 저렇게 가난하니 어찌 살기가 가난치 않을까.” 이런 말을 했지요. 그러면서 처음에는 그렇게 지금처럼 그렇게 말을 해 놓고선 또 ‘에이, 저 모습이 내 모습이요, 저것이 바로 나인데.’ 하고선 잘 다독거려서 “그게 아니라 이렇게 이렇게 하니까 그릇이 다 타 버렸으니 얼마나 좋아. 모든 것을 주인에게 맡기고 살면 편안치 않아?” 이렇게 처음부터 달래 가지고 나가야지 별수 없거든요. 하하하. 그놈의 거, 그 습을 다 떼어 버리려면요.

그래 가지고 내가 이렇게 여러분의 심부름을 하는 데도 불구하고 심부름 해 주는 그 공도 모르고, 여직껏 자기를 끌고 나오는 자기 주인의 그 공도 모르니 어떡합니까, 그거? 이제 그러지 말고 철저하게 자기의 주장자, 자기의 주인공 그 자체를 철저하게 믿고, 죄송하게 생각하고, 감사하게 생각하고, 물러서지 않도록 하세요. 우리가 하나하나 움죽거리는 거, 보고 듣고 오관을 통하는 것도 전부 거기에서 발휘됩니다. 거기 성품에서 다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바깥으로만 돌아야 합니까?

내 주인공은 내 보디가드처럼 항상 지니고 다니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어느 때에나, 즉 말하자면 아프거나 그래서 관하면 찰나에 의사가 되어 주고, 또 어떠한 일이 생겼다 하면 관세음이 되고, 좋은 데로 간다 하면 지장이 돼 주고, 칠성부처가 돼 주고 지신이 돼 주고 용신이 돼 주고 허공신이 돼 주고, 별거 별거 다 돼 줍니다. 그렇게 찰나찰나 바뀌는데 뭐가 답답합니까.

그렇게 바깥에 가서 물을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바쁜데. 지금 바빠 죽겠어서 말을 하는데 얼른 자기한테 하는 게 다 빠르지 나가서 하는 게 빠릅니까? 예를 들어서 자기한테는 곧바로 그냥 통신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바깥에 나가서 하는 게 그렇게 듣느냐 안 듣느냐도 문제지만, 올바로 나가는 게 못 되고 또 빠른 길이 못 됩니다. 그러니까 항상 나와 나가, 나와 나가 항상 그렇게 빠르다는 걸 아셔야 됩니다. 나와 나가 더 빠르지 누가 더 빠릅니까?

그래 여북하면, 정히 답답하면 “야, 아무개야!” 자기 이름을 자기가 세 번 부르고 “‘너만이 할 수 있잖아! ’ 하고 아귀를 지어라.”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아도, 말소리를 내지 않고도 얼마든지 길에 가다가도 하고 앉았다가도 하고 섰다가도 하고 뭐, 그 누구하고 같이 있다가도 할 수 있는 거고 그러니까 항상 무슨 급한 일이 있으면 그렇게 해서 통신을 하게 되면 그냥 재깍, 재빨리 통신이 된단 얘깁니다. 그렇게 빠른 거를 가르치는 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시면 어떡합니까?

이게 부처님에 직속, 즉 말하자면 통신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 아니면 제삼자가 자기를 대신 살아 줄 리 없고요. 그러니깐 꼭 여러분 개개인이 자기 아닌 자기를 꼭 믿어야 합니다. 믿고 그렇게 통신을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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