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의식들을 한마음으로 귀결 짓고 둘로 보지 않아야

남의 탓을 하지 말고 남의 원망을 하지 말고
어떤 게 있어도 내 탓으로 돌리고, 나로 밀어넣고
나한테 그냥 놓고 또 돌아가야 합니다.
???????모든 것이 거기서 나오는 것이니 거기다 놓고 가야 합니다.

(지난 호에 이어서)

질문자3(남) 스님, 조금 전에 말씀하셨는데, 여기 공동 묘지에 묻혀져 있던 그런 많은 영령(英靈)들이 큰스님과는 어떤 인연이었기에 그런 좋은 인연이 되셨는지요. 한 말씀 일러 주십시오.

큰스님 인연이 별다르게 따로 없는 겁니다. 바람결같이 스쳐 가는 인연. 허허허. 우리 모두가 바람결같이 스쳐 가는 인연들입니다. 이게 생시도 아니요 꿈도 아니요, 꿈도 아니요 생시도 아닙니다. 생시와 꿈과 둘이 아닙니다. 이것이 모두 바람결같이 돌아가고 찰나 찰나에 만남이 있는 것이 그대로 인연입니다. 그래서 어쩌다가 보니까, 이 집을 지으려니까 인연이 된 거죠.

모두 인연이 돼서 하나로 되니까 금방 그 영령들은 백이든지 천이든지 만이든지 모두가 인간으로 환토를 한 거죠. 환토를 해서 내놔도 내놓은 사이가 없이 또 내놔지죠. 그러니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니 모두가 여래의 집에 들었다가 여래가 죄 된 거죠. 부처가 다 됐다 이 소리죠. 이 모두가 이렇게 긴요하고 이렇게 모두 무변한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질문자3(남) 그리고 세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한 가지 한 가지씩 여쭙고 다시 여쭙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과 같은 그런 논장을 보면 아뢰야식(阿賴耶識)이다, 그다음에 뭐, 장식(藏識)이다, 여래장(如來藏)이다 하는 그런 말들이 많이 나옵니다. 소위 팔식(八識)이라 그러죠. 그 장식을 말하는 것인데, 그 팔식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건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마음이라고 할 때의 그 마음과 칠식이다 팔식이다 하는 그 식(識)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알고자 여쭙니다.

큰스님 그거를 여러 마디로 할 것 없이 아주 축소해서 말을 하죠. 칠식(七識)이다 하는 것은 우리네 육근(六根)이 공(空)해서 돌아가는 거를 하나로 묶어서 한마음이 된다면 그것이 칠식입니다. 그리고 한층 더 나가서 내 몸을 떠나서 더불어 같이 이 세상 사무 사유를 한데 합쳐서 한마음이 된다면 팔식(八識)입니다. 적게 따진다면 칠식이요, 넓게 전부 우주 삼천대천세계를 한데 합친다면 팔식에 속합니다. 칠식이래도 하나요, 팔식이래도 하나입니다. 팔식 하면 벌써 칠식은 없어지는 겁니다. 그 안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팔식 하면 팔(八)이라는 건 없어지고 식(識)만 남아서 그건 구경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느냐 하면 여래장이 되는 거죠. 여래라는 것은 일체 만물만생이 다 송두리째 둘이 아닌 도리가 되는 것입니다. 둘이 아니기 때문에 나도 없고 너도 없어지는 겁니다, 둘이 아닌 까닭에. 그렇기 때문에 모두 부처 자리 아닌 자체가 없고, 부처님의 작용 아닌 게 없고, 중생도 없고 부처도 없는 그 자리가 되기 때문에 여래장입니다.

질문자3(남) 다음 두 번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우리들의 마음 작용을 이렇게 관찰을 해 보면 일순간도 쉬지 않고 찰나에 일어났다가 찰나에 없어졌다 또 찰나에 일어났다가 없어졌다가 하는 그런 작용이 끊임없이 지속이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 말씀 중에는 한 생각 일어났다가 한 생각 없어지는 그 생멸심이 곧 멸하면, 그것이 고요하고 고요해서 마음이 고요한 경계에 들어가서 그것이 ‘참 낙(樂)’이라고 이렇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고요한 그러한 마음의 자리와 끊임없이 일순간도 쉬지 않고 일어났다가 없어졌다가, 일어났다가 없어졌다가 하는 그 생멸심과의 관계는 어떠한 것인지 큰스님의 말씀을….

큰스님 만날 말씀을 해 드리는데…, 하하하. 우리가 여기 걸어올 때에 한 발 떼었다 한 발 놓고, 한 발 떼었다 한 발 놓고 이게 생멸입니다. 이게 일어났다 가라앉았다, 일어났다 가라앉았다 하는 거와 같은 겁니다. 우리가 알려고 말로 표현을 하자면. 안 그렇습니까? 일어났다 또는 가라앉았다, 이게 마음이 이렇다는 것과 한 발 떼어 놓고 한 발 놓고, 한 발 떼어 놓고 한 발 놓고 하는 것과 뭐가 다릅니까? 이게 어떻게 둘이겠습니까? 한 발 떼어 놓고 한 발 놓고, 한 발 떼어 놓고 한 발 놓고 하는 작용이 없으면 우리가 걸어 다니지 못합니다. 안 그런가요? 일어났다 가라앉고 하는 그 마음이 없다면 성불이라는 말도 없을 거고 중생이라는 말도 없을 겁니다. 이해가 갑니까?

그리고 또 한번 방편으로 얘기해 볼까요? 아버지 노릇 하다가 남편 노릇 하다가 또는 형님 노릇 하다가 자식 노릇 하다가 이렇게 자동적으로 돌아가는 거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금방 일어났는데 금방 딴걸로 돌아갔어요. 금방 딴걸로 돌아가고 딴걸로 돌아가고, 이렇게 일어났다 놓았다가 일어났다 놓았다 해도 그냥 여여하게 그냥 돌아갈 뿐입니다. 그러니 그것이 바로 둘이 아닌 것입니다. 둘이 아닌 까닭에 그냥 “여보!” 하면 “왜 그래?” 하고 일어나는 마음, 그 일어나는 마음은 찰나에 일어나는 마음입니다. 악으로나 선으로나, 일어나는 마음을 잘 응용을 하면 선이 되고 잘 응용하지 못하면 악이 됩니다. 싸움을 할래도 “여보!” 할 테고, 좋은 말을 할래도 “여보!” 할 겁니다. 그런 걸 대치를 해서 잘 응용한다면 바로 그것이 부처님의 법입니다.

질문자3(남) 예. 그럼 그 한 생각 일어났다 없어졌다 하는 그 마음을 이름 붙여서 생멸심이라고 한다면 그 생멸심과 적멸심이 둘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번뇌심과 보리심이 둘이 아니라고 이렇게 이해를 하면 되겠습니까?

큰스님 번뇌심이, 본래심이 번뇌심과 다르다고 그 관습에 의해서 생각을 하지 마세요. 우리가 이 생각 저 생각이 나지 않으면 광대하게 발전을 할 수가 없어요. 고정된 마음이 있다면 어떻게 돌아갑니까? 이 마음 저 마음, 이 생각 저 생각이 나기 때문에 광대하게 부처를 이룰 수도 있고 광대하게 창조를 해낼 수도 있고, 창조력을 기를 수도 있고 계발을 할 수도 있고 발전을 할 수도 있는 겁니다. 선도 있고 악도 있고요. 그러니까 번뇌가 아니라 그냥 ‘내 마음에서 그냥 그저 수행하는 데 발전하게 하기 위한 재료다.’ 이렇게 생각하세요. 재료! 나를 발전시키기 위한 재료!

항상 내가 그런 말을 하죠. 귀가 아프도록 들었을 겁니다. 동짓날 팥죽을 쑤는데 팥죽 방울이 수없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그죠? 주걱으로다가 “요것도 문수, 요것도 문수, 요것도 문수!” 하고 쳤더라. “이건 무슨 까닭인가?” 했더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말로만 그렇게 하지 그 까닭을 모른단 말입니다. 내 몸뚱이가 팥죽 솥이라면 팥죽 방울이 일어나는 대로 그걸 번뇌라고 하는데, 번뇌라고 하기 이전에 모든 게 그 속에서, 한 속에서 화해서 나오는 업식에 속합니다. 그러니까 그걸 재료로 알아야죠.

속지 말고 모든 걸 “한군데서 나온 거 한군데에 제대로 되놔라.” 하는 소립니다, 그게. “이것도 문수, 이것도 문수” 하고 친 게 자기 마음의 주장자로서 자기한테서 나오는 것마다 거기다가 놨습니다. 놓으라고 그런 방편을 쓴 거라고 봅니다. 그러니까 중생도 없고 부처도 없는 자리에는 일어나는 그 마음. 번뇌도 망상도, 또는 도라는 이름도 없는 겁니다. 없이 그대로 여여하게 걸어오듯이, 그대로 아무 생각 없이 그대로 걸어오듯이 왔습니다. 그것이 바로 수레공법이죠. 우리 마음과 마음이 서로 합해서 불이 들어와서 가정이 밝게 살고 사회가 밝게 살 수 있는 것이니 바로 한마음에 밝게 불이 켜졌을 뿐입니다.

질문자3(남) 재료를 재료로서만 알고 재료에 결코 끄달리지 않는 노력을 하겠습니다. 세 번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능엄경에 말씀하시기를 한 사람만 깨달아도 능히 세상을 구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큰스님께서도 늘 그와 같이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요즘같이 물질문명이라는 이 편리 속에서 살다 보니까 금은 같은 부처님의 말씀이나 큰스님의 말씀을 지나쳐 버리기도 합니다. 사실은 그렇다고 인정을 하면서도 그 끄달리는 의식들이 너무 힘이 세어서 돌아서면 잊어버리려 하고 어떤 닥쳐오는 시련이나 아니면 죽음과 삶의 길에 도달했을 때, 그 큰 재료가 있을 때에만 그런 말씀을 실감하게 되는 것이 아마 저희들의 일반적인 생각인 것도 같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물질문명이 편리하다 보니 여기에 끄달리고 있는 저희들은, 능히 세상을 구할 수 있다고 하신 그 말씀이 저희들의 지금 현실과는 어떻게 보면 아주 코앞에 있는 것도 같고 때로는 굉장히 먼 것도 같습니다. 그런데 능히 세상을 구할 수 있다는 이 말씀을 저희들이 어떻게 다시 알아듣고 또 수행을 해야 될 것인지를 마지막으로 한 말씀 더 일러 주십시오.

큰스님 이 마음이란 멀고 가깝고가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렇죠? 그러니까 나라라고 하더라도, 어떠한 개인 회사라고 하더라도, 예를 들어 지도자가 전깃줄이라면, 아주 쉽게 그냥 얘기하죠. 지도자가 전깃줄이라면 전깃줄을 이쪽에서 하나 대 주면 그냥 불이 들어와서, 한순간에 불이 들어오면 그 모두가 밝으니까 밝음의 전지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따라가게 마련입니다. 그죠? 그러면 전지를 가지고 가는 사람이나 전지의 그 밝음을 쫓아가는 사람이나 똑같이 밝죠? 그러나 따라가는 사람은 ‘밝으니깐 가야지!’ 하는 그 마음밖에 없고 그 도리를 하나도 모릅니다. 그죠? 네.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한 가지는 임시로 변통을 해서 건지는 수가 있고, 구원하는 수가 있고, 하나는 정말 지도자가 이 도리를 알아서 거기다가 한마음이 같이 돼 준다면, 진짜 우주 삼천대천세계를 한손으로서, 그 천백억화신 자체의 손이 한손이 돼 가지고 그대로 건지는 것입니다. 구원을 하는 것입니다. 그게 두 가지가 있죠. 모르고 구원을 주느냐 받느냐, 알고 구원을 주느냐 받느냐 하는 그런 까닭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이라도 깨치면 그 가정과 그 나라를 다 이끌어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를 들어서 내가 그런 말을 하죠. 지도자한테 물 한 방울을 딱 떨어뜨린다면 그 마음이 전체가 한 그릇의 마음이 되기 때문에, 그냥 집어넣어 준 사람의 마음대로 그냥 행이 나옵니다. 마음이 생기고 행이 나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끌어 가는 겁니다. 그 모든 걸 이끌어 가게 되고 구원을 받게 되고 다 그렇게 되는 거죠. 그렇게 되는 동시에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것도, 부처님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말로 표현을 하자면 저쪽 물방울이 했다고 그러겠습니까, 이쪽 물방울이 했다고 그러겠습니까? 없죠? 밝게 불이 들어와서 같이 밝게 살 뿐입니다. 그거를 가지고 여래심(如來心)이라고 합니다.

밝게 불이 번쩍 일어났을 뿐이지, 이런 용도에는 이런 불이 필요하고 큰 용도에는 크게 불이 들어와야 할 필요가 있고…. 그러니까 심력으로 말미암아 그 불빛은 가지각색으로 이쪽 전깃줄에다가 이쪽 전깃줄을 붙여 주면 불이 들어와서 큰 데는 크게 붙여 주고, 작은 데는 작게 붙여 주고 이렇게 해서 천차만별로 건지는데, 건져도 건져 준 사이가 없다 이겁니다. 왜냐. 네가 한 것도 없고 내가 한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양면에 붙어서 불이 들어왔다면 불 들어온 것뿐인데, 이게 했다고 하겠습니까, 저게 했다고 하겠습니까?

그래서 일체 만물만생은 서로서로가 교환하면서, 돌아가면서 말하고 돌아가면서 서로 인연에 따라 상대성 원리로서 계발도 하고 발전도 하고 이러는 그 창조력을 발휘하는 거죠. 그래서 과학이다 물리학이다 하는 이름을 넘어서서 심성 의학이라야 되고, 심성 과학이라야 되고, 심성 물리학이라야 그것이 알맞게 작용을 해서 불이 들어올 수 있다 이 소립니다. 그러니까 이래도 이것도 없고 저래도 저것도 없다 하는 것은, 크다 작다 하는 것이 없다고 한 뜻은 어떠한 까닭에 없다고 했는가. 그것을, 공부하면서 그 뜻을 잘 아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토요일 전에 나를 친견한다고 그러는데 모든 사람들이 말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요. 말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상대방이 말을 했으면 들어 주면 되는 거 아닙니까? 들어 준다고 믿으면 될 거를, 왜 자꾸 긁어서 부스럼을 만들어서 되묻고 되물어서 오히려 전깃줄이 붙었다 떨어졌다 붙었다 떨어졌다 하게 만듭니까? 그러면 외려 불발이 되어서 안 될 수가 있거든. 붙었다 떨어졌다, 붙었다 떨어졌다 하면 불발이 돼서 잘못될 수도 있고 그런 수가 십중팔구는 되죠.

그러니 때와 장소를 가려서, 때에 따라서는 이런 말을 하면 그냥 하는 걸로 족하게 생각하고 갔으면 되는 거를, ‘귀가 있으면 듣겠지!’ 하고 가란 말입니다. 그리고 듣는 사람에 한해서는 조건 없는 사랑이라야 되는 거지, 조건이 있다면 ‘너는 이런 업이 있으니까 못 하고, 이런 업보를 지었으니깐 못 하고, 무슨 이러한 병이 있으니깐 너는 못 하고….’ 이런 이유가 붙으면 그것이 전깃줄과 전깃줄이 어떻게 붙습니까? 이유가 없이, 불을 켜려면 이유를 불문에 붙이고 전깃줄을 한데 합치는 거죠. 그죠? 이걸 붙일까 말까, 이거 붙일까 말까 하고 붙입니까? 무조건이지. 무조건이지. 그래서 컴컴하면 딱 붙여서 불을 켜서 밝게 살고, 잠자고 싶으면 잠자고 먹고 싶으면은 먹어라 이 소립니다. 변소 가고 싶으면 변소 가고. 하하하.

질문자3(남) 예. 큰스님, 감사합니다. 한마디만 더 여쭙겠습니다. 공부하시는 분들 중에서 돈오점수에 대해서 아직까지 미심쩍어하는 부분들이 있는데 간단하게 한 말씀만 더 말씀해 주십시오. 정말 깨닫고 난 뒤에는 한 물건도 없다고 하는 그 의미와 깨닫고 난 뒤에는 보임을 잘해야 된다는 그 의미를 간단하게 여쭙겠습니다.

큰스님 깨닫고 나서 보임을 잘해야 한다는 것도 맞고, 깨닫고 나면 아무 건덕지도 없다 하는 말도 맞습니다. 허허허. 왜냐하면 내가 자성 부(父)와 자성 자(子)가 한데 합쳐지면 깨닫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한데 합쳐졌을 뿐이지, 자기가, 즉 씨를 심어서 싹이 났을 뿐이지 자란 것은 아닙니다. 자라려면 그만큼 수행이 뒤따라야 합니다. 이 머리 깎은 사람들이나 머리 안 깎은 사람들이나 입산을 할 때는 ‘이 무명초를 다 끊어 버리겠습니다’하고선 다짐을 하고 끊어 버렸습니다, 아주 애당초에. 그랬는데 이 형식적으로만 끊어 버렸지 수행해 나가는 데 진실하게 우리가 무명초 하나하나를 끊어 버린 게 아닙니다. 이 마음을, 모든 것을 거기다 모아서 놓는 데서 이 무명초가 다 끊어지는 겁니다.

그런 반면에 지금 점수(漸修)다 하는 거는, 그런 수행을 하는 나를 발견했으면 보림이라고 해도 좋고 보임이라고 해도 됩니다. 즉 남의 탓을 하지 말고 남의 원망을 하지 말고 어떤 게 있어도 내 탓으로 돌리고, 나로 밀어 넣고 나한테 그냥 놓고 또 돌아가야 합니다. 그게 보임입니다. 모든 것이 거기서 나온 거니까 거기다가 놓고 가야 합니다. 악이든지 선이든지 다 말입니다. 그래서 잘되는 거 감사하게 놓고, 안 되는 거는 ‘안 되는 것도 거기서 나온 거니까 되게 하는 것도 거기다.’ 하고 놓고, 이렇게 해서 둘 아닌 도리를 또 두 번째 깨달아야 합니다.

또 세 번째 가서는 둘 아닌 도리를 탁 알았는데 나투는 도리를 몰라. 아까 전깃줄과 전깃줄을 대어 주고 떼어 주고 대어 주고 떼어 주고 하는 도리를 모른다면, ‘모두 일체 여래라고 할 수가 없다, 또 일체 중생이 나 아님이 없다’하는 것을 말할 수가 없다 이렇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을 나투는데, 즉 아버지가 됐다가 남편이 됐다가 이렇게 나툴 줄을 모른다. 이럴 때는 그 나투는 방법을 알기 위해서 세 번째 깨달음이 있어야 된다 이런 겁니다.

그런데 세 번째 깨달음이 있어서 만약에 나툼의 도리를 안다면 일체가 나 아님이 없이 모두가 난데, 자기가 자기 꺾는 법도 없을 뿐만 아니라 자기가 화해서 자꾸자꾸 돌아가는데 어떤 거 됐을 때 내가 됐다고 하고 내가 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수행을 할 땐 점수(漸修)라고 해도 맞고, 그게 끝났을 때는 “아, 너도 나도 다 둘 아니게 돌아가는데 이거는 하나도 없다.” 하는 소리도 맞고, 둘이 다 맞으니까 둘이 다 둘이 아니다 이겁니다. 하하하.

절대적으로 이 도리를 물렁물렁하게 봐서는 아니 됩니다. 형상을 보고 무시하거나 그래서도 아니 됩니다. 이거는 형상을 배우는 게 아니라 형상과 정신과 둘 아니게 작용하는 도리를 배우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크고 작고도 없고 일체 만물만생이 생명 없는 것이 하나도 없고 전력이 똑같듯 생명은 다 똑같은 것입니다. 그거를 알려면 모두 하나도 버림이 없어야 되고, 버림이 없어야 항복을 받고, 항복을 받아야 하나도 버릴 게 없는 도리가 나옵니다.

질문자4(여) 제 동생이 병이 안 낫는데 살려 달라고 왔습니다.

큰스님 병원에 가니까 뭐라고 합디까? 여긴 병원이 아니니까.

질문자4(여) 뭐, 간이 좀 나쁘다 그래요. 간이 나쁘다….

큰스님 이 여러분도 상식적으로 알아 둬야 할 일이 있습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이 모두 80%, 90%는 마음에서 병을 가져온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건 왜냐하면 어디가 좀 아프면 그냥그냥 바깥으로 그냥 쭈르르 갑니다. 그래서 조직 검사도 하고 뭣도 하고 뭣도 하고, 이렇게 해 가지고는 오히려 몸을 망가뜨리는 수가 많이 있습니다. 의사들이 이런 소릴 들으면 날더러 죽일 놈이라고 욕을 하겠지만, 그게 아닙니다. 의사들한테 가는 것을 가지 말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어느 땐가 내가 얘기했죠. 이 다리가 썩어서 잘라야 할 텐데 그 마음과 마음이 전깃줄을 붙이니까 고만 이 모든 인체의 마음들이, 골수의 모든 생명 의식들이 그냥 전부 작용을 해 준 겁니다, 그냥. 그러니깐 썩어 들어간 게 금방 내려가서 이 발목으로 내려갔다 이겁니다. 그러니깐 자를 걸 안 자르게 됐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의사, 박사들도 머리를 꺄우뚱거리고 종교를 뭘 믿느냐고 묻더랍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 몸속에 들어 있는 이 인체의 모든 의식들이 이 관법을 알아서 모든 의식들을 내가 생각하는 대로 다스리면서, 그 모든 의식들을 다스리면서 한마음으로 귀결을 짓고 둘로 보지 않아야만이…. 자기를 자기가 죽이는 법이 없죠. 자기가 자기를, 자기 손가락이 자기 손가락을 꺾을 수는 없죠, 이 손가락 하나가. 그 도리를 알아야 됩니다. 그 모든 인체의 의식들이 모두 한마음으로 한 주장자로 돼 있는데, 손가락처럼 하나로 돼 있는데 어떻게 자기가 자기를 죽입니까? 그러니깐 작용을 해 주게 돼 있거든요. 모든 데서 작용을 해 줘서 굳어 들어가는 데를 완치시킬 수가 있는 겁니다.

이 모두가, 무슨 병? 간암? 간암이든지 백혈이든지 어떠한 거든지 이 종류 종류가 따로따로 있겠지만 모두 이 뼛속에서, 병이 위중하든 간단하든 이 뼛속의 골수에서만이 이 모든 작용을 해 주고 이렇게 서로 대치를 해 주고 바꿔 주고 이러는 데서, 그 의식들이 작용을 해 주는 데서 병이 완치되는 겁니다. 그런데 벌써 들으면 ‘아이구! 나 죽네. 이젠 꼼짝없이, 아무리 해도 이것은 안 나으니깐 이거는 꼼짝없이 죽었어!’ 이런 생각을 하니까 이 의식들도 전부 작용을 하다 말고 ‘아이구, 꼼짝없이 죽었어!’ 그러곤 안 해요. 꼼짝없이 죽었다는 거지.

그러니 이 한마음의 도리가 얼마나 귀중하냐 이겁니다. 그런데 안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 바깥에서도 그렇다 이거야, 전부가. ‘할 수 없어.’가 아니라, ‘할 수 있어.’가 아니라 그대로 여여하게…. 심력이라는 것은 빛보다도 더 빨리 더 귀중하게, 아까 전깃줄 붙이듯이 그렇게 붙여 줄 수 있기 때문에 일체 중생을 다 건진다고 했습니다.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그냥 아주 그것이 너무 과거로부터 지은 것이 돼 놔서 참 완고한 사람이라면 어찌해 볼 수가 없죠. 그렇다는 건 뭘 뜻하느냐. 그릇을 만들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착한 마음의 그릇을 만들지 않을 때, 그릇에 담기질 않아. 붙여지질 않아. 전깃줄도 이렇게 이게 선을 까고 붙여야죠? 까지 않고 그냥 붙일 수가 없죠. 까지 않고 붙인 거와 같은 겁니다. 그러니까 이 선을 까서 붙이면 아주 불이 들어오게끔 까 가지고 붙여야지 까지도 않고 어떻게 붙여집니까, 이게. 그러니까 그릇을 만들어서 받아야 된다 이 소립니다.

※위 법문은 대행 스님께서 1992년 9월 20일 정기법회에서 설법하신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에서도 같은 내용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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