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방편

어떤 머리 깎은 비구들은 부처가 되기까지는 3아승지겁 동안을 수행해서 과보(果報)가 원만해져야 비로소 도(道)를 이룰 수 있다 하나니 여러분, 그대들이 만약 ‘부처는 최후에 마지막으로 얻는 것’이라 말할진대 어째서 석가모니는 80년 후에 쿠시나가라의 사라쌍수 사이에서 옆으로 누워 돌아가셨으며, 그 부처님은 지금 어디 계시는가? 분명히 알아 두어야 하나니 부처님도 우리와 같이 나고 죽는 것이 다르지 않느니라.

그대들이 ‘32상과 80종호가 부처다’하는데 그렇다면 전륜성왕도 응당 여래일 것이니라. 분명히 알라 허깨비일 뿐이니라.

옛사람이 말했다.

“여래께서 몸에 갖춰진 32상과 80종호는 세상 사람들의 인정을 따라주는 방편이니라. 부처님이 돌아가시면 아무것도 없다는 단견(斷見)을 낼까 염려되어 방편으로 헛된 이름을 세운 것이니라. 32상도 속임수요 80종호도 헛소리니라. 형상이 있는 몸은 깨달은 부처의 본체가 아니며, 형상이 없는 것이 부처의 참된 모습이니라.”

중국 선종의 근본 주류는 돈오(頓悟)다. ‘단박에 깨닫는다’는 점을 강조하여 점수(漸修)를 배격하는 입장을 취해 왔다. 물론 돈점(頓漸)의 문제에 대한 견해가 7가지의 주장으로 나온 7대 돈점이 있었지만 돈오점수와 돈오돈수가 대표적인 것이었다. 그러다가 송대(宋代)에 들어오면서 선의 5종(五宗) 가운데 임제종을 제외하고 다른 4종이 쇠미를 길을 가게 되고 임제종에 흡수되는 경향을 보여 임제종지가 가장 오래 전해지게 된 것이었다.

임제는 돈오돈수(頓悟頓修)를 주장하였으므로 돈오하면 더 이상 공부할 게 없다는 식으로 법문한다. 말하자면 점수의 이야기가 필요 없다 하는 것이다. 이 장에 와서도 처음부터 점수의 이야기를 부정해 버린다. 마치 사람인 내가 부처이지 사람인 나 밖에 부처가 없다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나는 부처로서 완전한 나이지 모자람이 있는 결격 인간이 아니란 말이다. 그야말로 인간성불론이 아니라 인간부처론이다. 부처님도 우리처럼 나고 죽는 생사를 하고 있다고 하면서 실존 현실을 자각하게 하며 부처님을 신비한 존재로 우상화하지 말라고 한다. 32상과 80종호를 부정하는 것은 〈금강경〉에 설해진 말을 그대로 인용하는 것이다.

〈금강경〉 사구게(四句偈)에서 “무릇 있는 바 모든 형상은 다 허망한 것이다. 만약 모든 형상을 형상이 아닌 것으로 보면 곧 여래를 보게 된다”고 하였다. ‘상을 떠나면 부처고 상이 있으면 부처가 아니다.’ 상의 유무로써 부처와 중생을 판단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돈오(頓悟)는 무상(無相)으로 통한다. 옛사람이 말했다. 한 옛사람은 〈금강경〉 송을 지은 부대사(傅大士)이다.

규봉(圭峰)은 〈도서(都序)〉에서 돈오돈수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했다. “오(悟)와 수(修)를 한순간에 모두 완성하는 것을 말한다. 상상지(上上智)의 사람이 그 근기(根機)와 의지가 함께 뛰어나서 한 가지를 듣고 천 가지를 깨달아 위대한 총지(總持)를 얻으며 한 생각도 생겨남이 없이 과거와 미래가 모두 단절된다는 설이다. 비유하자면 한 타래의 실을 끊으면 한꺼번에 모든 실 줄이 단박에 모두 끊어져 버리는 것과 같다. 수행의 공덕은 한 타래의 실을 염색하면 모든 실 줄이 한꺼번에 단박에 염색되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규봉은 돈오점수를 주장하였다. 돈오점수설에서는 돈오돈수도 돈오점수에 속한다고 말한다. 〈도서〉와 〈수심결〉 등에 이렇게 말하고 있다. “비록 돈오돈수의 수행법이 최상의 근기가 깨닫는 것이라 하지만 만약 과거의 업까지 헤아려 생각해보면 이미 다생에 걸쳐 깨달음(悟)을 위해 점차적으로 닦아 훈습(熏習)한 것이 있었으므로 그 결과 금생에 와서 듣는 즉시 깨달아 한순간에 다 이루는 것이니 사실에 근거하여 논한다면 돈오돈수의 근기도 먼저 깨닫고 뒤에 닦는 선오후수의 근기라 할 수 있으므로 결국 돈오점수에 속한다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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