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현전 학자들, 사찰서 책을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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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代 절서 공부하는 문화 생겨
세종 시행된 사가독서 제도 기원
지목된 신하들 휴가 받아 독서해 ?
진관사·장의사 독서처로 활용돼

진관사 대웅전의 모습. 조선 세종 때부터 시행된 ‘사가독서’ 제도의 시행처였다.

지난해 4월부터 시작된 북한산 중흥사 ‘책 읽는 템플스테이가’ 올해도 계속되는 모양이다. 처음에는 ‘불서’를 위주로 읽기 시작했는데 최근에는 나태주, 정호승, 문태준 등 시인도 초청했다. 주제도, 그리고 소재도 다양해지는 느낌이다. 이렇게 조용한 산사에서 책을 읽고 또 필자들을 만난다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절에서 독서를 하고 글을 쓰는 일은 아주 오래 전부터의 일이다. 불교가 사상의 주류였을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유학을 신봉하는 이들조차 공부 장소로 절을 피하지는 않았다. 

고려 충렬왕 때 원나라에서 성리학을 도입해 우리나라 유학의 시조로 여겨지는 안향도 이제는 폐사된 숙수사에서 한때 글을 읽었다. 조선 성리학의 두 기둥 이황과 이이는 각각 안동의 용수사와 금강산의 사찰에서 오랫동안 공부를 했다. 

이런 ‘전통’ 때문인지 1980년대까지만 해도 고시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책보를 싸서 절로 들어가는 경우가 흔했다. 변호사 출신인 故 노무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도 사법고시 준비를 절에서 했다. 

세종代 시작된 사가독서 제도
그런데 이렇게 ‘개인적’으로 공부를 위해 절로 오르는 경우도 있었지만 조선 세종 때부터는 아예 공식적으로 사찰에 가서 책을 읽을 수 있는 제도가 생겼다. 바로 ‘사가독서(賜暇讀書)’다. 사가(賜暇)라는 말이 휴가라는 뜻이니 독서 휴가쯤 되겠다.

처음부터 사찰을 택했던 건 아니다. 사가독서제도가 처음 시작된 건 세종 때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8년 12월 11일 기사에는 집현전 부교리 권채(權採), 신석조(辛石祖), 남수문(南秀文) 등 세 명을 불러 세종이 이렇게 명하는 대목이 나온다. 

“내가 너희들에게 집현관(集賢官)을 제수한 것은 나이가 젊고 장래가 있으므로 다만 글을 읽혀서 실제 효과가 있게 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각각 직무로 인하여 아침저녁으로 독서에 전심할 겨를이 없으니, 지금부터는 본전(本殿)에 출근하지 말고 집에서 전심으로 글을 읽어 성과(成果)를 나타내어 내 뜻에 맞게 하고, 글 읽는 규범에 대해서는 변계량(卞季良)의 지도를 받도록 하라.”

실록에도 나오듯이 출발은 집에 틀어박혀 책을 보는 ‘재가독서(在家讀書)’였다. 하지만 곧 ‘폐단’이 나타났다. 궁궐이 아니라 집에 있으니 틈만 나면 지인들이 집으로 찾아왔다. 할 수 없이 아예 절로 들어가라고 지시를 내렸다. 뚜렷한 연대는 불분명하지만 어쨌든 같은 세종대에 재가독서는 산사독서(山寺讀書) 혹은 상사독서(上寺讀書)로 변하게 된다. 

산사에서 책을 읽는다니 유유자적한 모습이 떠오를 법도 하다. 하지만 그렇지만도 않았다. 사가독서 기간은 대개 6개월이었다. 하지만 나라에서 하는 일이니 규정이나 통제가 없을 수 없었다. 선발된 관리들은 자신이 읽은 책의 권수를 매 계절 첫 달에 적어서 제출하고, 매달 세 차례 읽은 책의 내용에 대해 논문을 제출하며, 사가독서를 모두 마칠 때는 결과물인 월과(月課)를 제출해야 했다. 물론 성적도 매기도 시상도 했다. 

진관사·장의사 사가독서 장소 
사가독서 제도가 상시적이었던 것 같지는 않다. 현재 남아 있는 기록으로는 세종 8년(1426), 세종 24년(1442), 문종 1년(1451)이다.(1442년 대신 1438년이라고 기록한 문헌도 있다) 첫 시행이었던 세종 8년에는 앞에 밝혔듯이 권채, 신석조, 남수문 등 세 명이 선발되었다. 또 여러 문헌을 종합해 보면 2차인 세종 24년 선발된 인원은 박팽년, 신숙주, 이개, 성삼문, 하위지, 이석정 등이었다. 또 3차인 문종 1년에 선발된 인원은 홍응, 서거정, 이명헌 등이다. 

이중 1차는 재가독서였으며 2차는 현재 은평구 진관사에서 진행되었고, 3차는 현재 세검정 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던 장의사(藏義寺)에서 진행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종합해 보면 세종과 문종 때 진행됐던 사가독서는 1차를 제외하고는 궁궐과 그리 멀지 않은 곳의 산사를 택하게 했으며 인원은 집현전 학자가 중심이었고 또 선발 전에 어떤 과제를 수행해야 하는지 이미 계획이 짜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런데 문종 이후 사가독서 전통은 한동안 단절된 전통이었다. 세조가 왕위를 찬탈한 후 집현전을 혁파했기 때문이다. 사가독서가 다시 부활한 건 성종 때다. 집현전과 비슷한 기관인 홍문관이 생겼고 홍문관에 있던 학자들에게 사가독서제도를 다시 적용한 것이다. 

하지만 사찰에서 공부하던 전통에는 제동이 걸린다. 성종 5년에 사가독서 부활에 대한 논의가 왕과 신숙주 사이에 있었다. 이때만 해도 왕과 신숙주 모두 세종조 이후의 전통에 따라 장소는 당연히 사찰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조사에 따르면 성종 초기에 실시되었던 사가독서는 역시 궁궐에서 가까웠던 장의사에서 진행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과도한 견제와 우려가 있었다. 유자(儒子)들이 절에 가면 ‘오염’이 된다는 주장이 나온 것이다. 이에 따라 서거정이 아예 독서당을 두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주청을 했고 선종은 1492년 남호독서당(南湖讀書堂)을 개설하게 한다. 

하지만 장소가 또 얄궂다. 지금의 용산쯤으로 추정되는 곳이었는데 원래 이곳이 사찰터였던 것이다. <동국여지승람>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용산강 북쪽 언덕에 있는 폐지된 절이 있다. 성종께서 절을 고쳐 독서당을 만들고 홍문관원이 글 읽는 곳으로 삼았다. 일찍이 궁중 술을 하사하여 수정배에 부어 마시게 하고 내처 그 잔을 관원에게 맡겨 두었다. 도금한 받침대를 만들었는데 거기에 ‘맑으면 흐리지 않고 비면 받아들일 수 있다. 그 물건을 덕으로 알고 주는 생각을 저버리지 말라’는 글귀를 새겼다.”

다른 자료까지 종합해 살펴보면 남호독서당은 원래 절터였던 곳인데 ‘수리하면 상쾌하고 명랑하고 그윽하고도 넓어서 공부하고 사는 데 적합하다’며 두 달 만에 20칸으로 확장해 독서당 현판을 달았다. 남호독서당에서는 1495년(연산군 1년)부터 1498년(연산군 4년)까지 매년 5~6명이 독서를 했는데 1504년(연산군 10년) 연산군이 훈구파를 제거하는 사건인 갑자사화 이후 폐쇄된다. 
원래 호당(湖堂)이라 불리던 이곳은 이후 동호당이 생기면서 용호당 혹은 남호당으로 호칭했다.

정업원, 독서당으로 활용
잘 알다시피 정업원은 비구니 스님들의 수행처다. 고려 시대 개경에도 정업원이 있었다. 물론 비구니 스님들의 수행처였다. 그러다 조선이 한양에 도읍을 정한 이후로는 한양으로 옮겨오게 된다. 정업원 자리가 어디였는지는 논의가 분분하다. 현재는 대체로 동대문 밖 동망봉이라고 하는 설이 우세하지만 창경궁 서쪽이었다는 설도 있었다. 그런데 갑자사화로 폐지되었던 사가독서가 부활하면서 사가독서의 장소로 정업원(淨業院)이 선택되었다. 

조선왕조실록 중종 1년 12월 3일자 기록에 보면 “문학(文學)의 선비를 뽑아서 정업원(淨業院)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게 하니, 홍문관 교리 이행(李荇), 김세필(金世弼), 부교리 김안국, 성균관 직강 홍언충(洪彦忠), 도총부 도사(都摠府都事) 신상(申?), 이조 좌랑 유운(柳雲), 성균관 전적 김안로(金安老), 예문관 검열 김영(金瑛), 이희증(李希曾)이 여기에 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시행 후 멀지 않아 사가독서 장소가 또 옮겨진다. 기록이 뚜렷하지는 않지만 역시 유자들의 반대가 있었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중종 5년 1월 기사에 따르면 “사가독서(賜暇讀書)하는 인원이 정업원(淨業院)에 우거(寓居)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용산(龍山) 독서당 옛 자리는 기울고 무너져서 고쳐 지을 수 없습니다. 두모포(豆毛浦)의 월송암(月松庵) 근처에 넓고 평평하여 집을 지을 만한 곳이 있는데, 나무와 돌을 수운(輸運)하기도 편리하고 가까우니, 날을 정하여 집을 지어, 독서하게 하는 것이 어떠합니까”라고 홍문관에게 아뢰자 왕은 그리하라고 전교한다. 

여기서 두포모 월송암 근처가 바로 우리가 동호독서당(東湖讀書堂)이라고 알고 있는 곳이다. 이때부터 임진왜란이 일어나 동호독서당이 불에 탈 때까지 70년이 넘는 기간 관리들의 사가독서 장소가 된다. 물론 임진왜란 후에도 간간히 사가독서제도를 부활시키고자 하는 시도가 있었고 실제 시행도 됐지만 이전만은 못하였다. 

현재 진관사는 옛 모습 그대로는 아니지만 조계사나 봉은사만큼 널리 찾는 절이 되었다. 연산군에 의해 폐사된 장의사는 ‘서울 부근에 물 맑고 풍치가 빼어난 곳’이었지만 연산군이 연회장을 꾸미기 위해 꽃밭으로 만들어놓았고 현재는 초등학교가 들어섰다. 용산의 서호당터는 현재 어디인지 추정이 불가능하다. 절하고는 아무 관련이 없었던 동호독서당 자리에만 작은 기념비 하나가 서 있을 뿐이다. 가끔 서울 지하철 3호선을 타고 동호대교 옆을 지날 때면 조선 시대 동호독서당의 모습이 그림으로 남겨진 ‘독서당계획도’가 떠오르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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