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진여[理]

임제선, 홍주선 전통 계승
조동종 선법, 화엄과 유사
화엄 ‘理事’→ ‘무정불성’ 설

 

화엄사상에서 진여[理]는 나누거나 분할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다만 완정(完整)된 진여본체가 바로 만법(事, 만물)이 체현(구체적 사물의 모양)된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만법을 또한 진여가 통섭하고 있다고 한다. 즉 이러한 사상이 잘 표현된 선종의 게송으로 “청정법신이 널리 무변하고(法身헌淨廣無邊). 천강의 물에는 천강의 달이 있다(千江有水千江月)”고 하는 것은 바로 화엄사상이 잘 드러나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사법계 사상과도 상통한다고 하겠다.

법장(法藏)은 우리들의 현상세계를 이(理)와 사(事)를 가지고 설명을 하였는데, “사에 이가 두루하고, 이가 사에 두루하다(섦事遍於理, 理遍於事也)”고 여겼다. 즉 제법의 현상이라는 것은 곧 이(본질)와 사(현상)의 상즉상입(相卽相入)의 관계로서 중첩된 세계로 이해했다. 다시 말해서 이즉사(理卽事) 사즉리(事卽理), 본질과 현상의 상즉관계로 천지 만물이 형성되었다고 보았다. 이 가운데서 모든 작용의 근본은 이(理)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이를 의지해서 천지 만물(제법현상)이 파생되고, 비록 사(事)가 형상을 나타내어 작용은 하지만, 이 사의 모든 것은 허환(虛幻)이며, 자성이 없으며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며 반드시 이를 의지해서 나타낼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동시에 체용상즉(體用相섦)을 근거한 원칙으로, 이도 또한 반드시 구체적인 사를 의지해야만 구체적인 사물을 나타내거나 작용을 할 수 있다고 여겼다. 또 이러한 상즉상입의 상태를 잘 설명한 것으로 중중무진법계연기(重重無盡法界緣起)를 들 수가 있는데, 이 중중무진법계를 설명할 때, 현수법장이 측천무후에게 거울의 중앙에 금사자상을 놓고 거울 속에 겹쳐지는 금사자상을 통해서 중중무진법계를 설명했다는 고사는 유명하다.

그는 〈화엄발보리심장(華嚴發菩提心章)〉에서 이(理)ㆍ사(事)관계를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를 “사문(事門)에 이(理)가 두루한 것은 능변(能遍)의 이(理)를 이른다. 성(性)은 나눌 수 없다. 소변(所遍)의 사는 위를 나누는 차별이다. 하나하나의 사(事) 가운데 이는 모두 전체에 두루했다. (하지만) 나누어서 두루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저 진리는 나눌 수 없는 연고이다. 이런 연고로 하나하나의 티끌 가운데 모두 무변의 진리를 섭했고, 원만히 만족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했고, 또 부연하기를 “이문(理門)에 사가 두루한 것은 능변(能遍)의 사를 이르며, 이것은 분한(分限, 나누어진다)이 있다. 소변(所遍)의 이는 분한이 없다. 이 분한이 있는 사에, 무한의 이가 없는 것이, 전체적으로 같지만 분(分)이 같은 것이 아니다. 무슨 이유인가? 사에는 체(體)가 없고, 도리어 이와 같은 연고이다. 이런 연고로 한 티끌도 무너지지 않고 법계에 두루한 것이다. 저 하나의 티끌, 일체법도 또한 그러하다. 이것을 생각해 보면 알 것이다”고 말을 맺고 있다.

위의 전체적인 내용은 곧 이(理)는 진여본체(廬如本體)로서, 분할을 하거나 나누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설명이다. 사물이 비록 분한(分限, 각자 독립체)이 있는 것 같지만, 도리어 전체가 이를 벗어난 것은 아니며, 일체사물 모두가 진여본체를 바탕으로 의지하거나 섭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곧 이사무애(理事無킟)의 관계로서, 서로가 서로를 장애하지도 또한 멀리하지도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각자의 모습을 체현하거나 작용을 한다는 것이다(月印千江). 이같이 사물의 현상을 바라보는 또 다른 시각으로 전체와 부분을 들어서 설명한 것이 바로 일즉일체(一섦一切), 일체즉일(一切섦一), 일즉다(一섦多), 다즉일(多섦一)이다. 즉 동일한 본체을 기본 바탕으로 해서 다양하고 복잡한 각종 사물이 구체적으로 체현된 것을 설명한 것이다. 즉 부분(一)과 전체(一切)는 곧 ‘일즉일체(一섦一切, 전체와 부분의 융화)’가 되어 현상세계가 나열된다는 것이다. 동시에 천차만별의 사물들은 모두 하나의 본체에 귀결된다는 것으로, ‘일체즉일(一切섦一)’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는 법성게에 잘 나타나 있는데, 즉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 일체진중역여시(一切塵中亦如是), 무량원겁즉일념(無量遠꼏섦一念), 일념즉시무량겁(一念섦是無量劫) 등은 모두 같은 의미이다.

그림, 강병호

 

임제선은 홍주선의 전통을 계승하고 선양하였으며, 심성(心性)의 기점으로 장자가 제시한 “천지와 내가 상호 공생하고, 그래서 만물과 나는 하나가 된다(天地與我갞生, 而萬物與我爲一)”고 한 사상의 원칙을 근거로 평상심시도를 제창하면서 ‘가는 곳마다 다 진이다(立處皆廬)’의 자오(自悟)를 주장해서 의식 주체의 자각을 강조했다. 임제 의현은 “불법에는 용공처가 없으며, 다만 평상시에 일이 없는 것이다. 똥을 누고 오줌을 싸고, 옷을 입고 밥을 먹고, 졸음이 오면 곧 자는 것이다”고 하면서, “촉하는 것이 모두 불도이다”고 했으며, “오직 처처에 의심하지 않고(處處不疑),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廬)하면, 문득 깊지 않은 곳이 없고, 해탈 아닌 것이 없다”고 했는데, 이 의미는 있는 그대로가 바로 도의 자리로서, 곧 사람과 도(道)의 사이에 간격이 없고 자연히 서로 합하고(自然相合), 본래 서로 계합한다(本來相契)라는 의미로서, 임제 의현은 게송에서 “마음은 만 가지 경계를 따라서 전하고, 전하는 곳마다 진실로 그윽해서, 류를 따라 성을 인식하면, 기쁨도 슬픔도 없다”고 하는 것과 근본적으로 같은 맥락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임제종은 홍주종의 선법을 포괄적으로 계승했다고 했는데, 임제가 말한 불법무용공처(佛法無用功處), 지시평상무사(只是平常無事)를 자세히 분석해보면, 마조 도일 선사가 “도불용수, 단막염오”이라고 했던 선구와도 일맥 상통하는 부분이 있으며, 화엄 사상인 법계에 두루한 ‘법신설’ 혹은 ‘진여본체’로 대변되는 이(理)법계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깨달으면 된다는 관점과 같은 맥락이다.

조동종의 ‘회호(回互)’설은 모든 방면에서 활용되며 도(道)와 사람도 포함한다. 동산 양개의 게송에 “도는 무심으로 사람을 합하고, 사람은 무심으로 도에 합해야 한다. 이 가운데 뜻을 알고자 한다면, 한 번은 늙고 한 번은 늙지 않는다”고 했다. 위의 구체적인 의미는 동산 양개가 도라는 각도에서 사람을 보면, 사람이 도에 오입(悟入)하기 때문에 “도는 무심으로 사람을 합한다”고 했는데, 곧 도가 있지 않은 곳이 없어서 일체 처에 두루하며, 동시에 사람과 자연에 합하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것이다. “사람은 무심으로 도에 합해야 한다”는 것은 사람이 본래무사(本來無事)하고 환과 같이 허망하고, 한편 각자 지은 바 업에 의해서 도와 멀어졌기 때문에 무심한 상태가 되었을 때 비로소 도와 서로 결합할 수 있다는 논지이다. “이 가운데 뜻을 알고자 한다면, 한 번은 늙고 한 번은 늙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곧 인(人)과 도(道)의 관계가 곧 회호(回互)의 관계로서 다만 사람이 도(道)를 모를 뿐이고, 진여본체(廬如本體)는 영원하고 만물은 도리어 무상하다는 것이다. 이 부분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이 있는데, 즉 〈균주동산오본선사어록(筠州洞山悟本禪師語錄)〉에 보면 “후에 어떤 승이 조산 선사에게 묻기를, 어떤 것이 일노(一老)입니까?”라고 묻자, “조산 선사가 이르되, 부축하지 않는 것이다”고 하자 또 “어떤 것이 일불노(一不老)입니까?”라고 하자 “조산 선사가 이르되, 고목이다”고 했다. 즉 인간의 육신 및 마음도 영원하지 않고 무상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대목이다. 혹자는 조동종의 선법은 임제종과 비교했을 때 비교적 복잡(葛藤)하다고 평하기도 한다. 이러한 조동종의 선법사상은 도처에서 화엄 사상과 유사성이 있음을 발견할 수가 있다. 즉 위에서도 언급하였듯이, 〈화엄경〉의 법신설 및 진여설을 그 예로 들 수가 있는데, 즉 ‘진여가 두루하지 않은 곳이 없고, 불신이 두루하지 않은 곳이 없다’ 혹은 ‘불신이 일체 찰토에 충만하다’라는 문구 등등이다.

사료의 기록에 의하면 임제종과 조동종은 수행 상에 있어서 모두 ‘사빈주(四賓主)’를 제시했다고 한다. 그러나 조동종의 ‘사빈주’와 임제종의 ‘사빈주’는 같지 않았다. 동산 양개가 말하기를 “사빈주는 임제종과는 같지 않다. 주(主) 가운데 빈(賓)으로서, 체(體) 가운데 용(用)이다. 빈(賓) 가운데 주(主)는 용(用) 가운데 체(體)이다. 빈(賓) 가운데 빈(賓)은 용(用) 가운데 용(用)으로 중복된 것이며, 주(主) 가운데 주(主)는 물(物)과 아(我)를 둘 다 잊은 상태로서, 사람과 법이 함께 없는 것으로, 정(正)위와 편(偏)위를 섭하지 않은 것이다”고 했는데, 즉 다시 말해서 임제선은 사제(師徒, 스승과 제자) 관계상에서 빈(賓), 주(主)를 설했고, 조동종은 체(體), 용(用)의 관계에서 빈(賓), 주(主)를 말하며, 이 체(體), 용(用)은 조동종의 종지인 편정회호(偏正回互)를 초석으로 수립이 되었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방해하지도 여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체용의 관계는 곧 화엄에서 말하는 이(理, 체), 사(事, 용)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특히 선종 중에서도 조동종의 선법사상인 편정회호(偏正回互)의 이사관(理事觀)은 송명이학의 본체론 철학에 대한 이론체계 수립에 선구자 역할 및 많은 영향을 주었다. 때문에 조동종의 오위설은 역사적으로도 의의(意義)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화엄 사상인 이사(理事)의 관점이 천태종에 준 영향으로 무정불성(無情佛性)설이 그중에 하나이다. 화엄종의 이러한 관점은 후래의 천태종 형계 담연(荊溪 湛然)이 받아들이면서 이 사상을 바탕으로 그는 ‘무정유성(無情有性)’설을 수립해서 발전시켰다. 형계 담연은 “불성은 영원한 심성의 본질이며, 세계 일체의 모든 사물은 다 불성의 구체적인 표현”이라는 것이다. 즉 “일진일심(一塵一心)은 곧 일체제불의 심성을 낸다”는 것이다. 또 그는 “만법은 진여이고 불변하는 연고이다. 진여는 만법이다, 연을 따르는 연고이다. 그대가 무정에 불성이 없다는 것을 믿는 것은 어찌 만법에 진여가 없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고로 만법의 명칭이 어찌 섬진(纖塵, 아주 미세한 티끌)에 막힐 것이며, 진여의 체가 어찌 오직 피차간만이겠는가(너와 나에게만 있겠는가)?”라고 했는데, 이 뜻은 곧 진여불성은 곧 세계의 본원이 되며 일체에 두루해서, 두루하지 않은 곳이 없으므로 무정(無情)도 반드시 유정(有情)과 같이 불성이 존재한다는 논지이다. 담연은 현상(現象)의 존재는 다만 마음의 본질인 진여본체의 변현(變現)인 것이며, 현상은 비록 다양하지만 최후에는 결국 마음의 본질인 진여불성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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