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유심경계

누가 물었다.

“어떤 것이 마음과 마음이 다르지 않은 것입니까?”

임제가 말했다.

“그대가 물으려 하면 벌써 달라져 마음의 성품과 모양이 나누어져 버렸느니라. 여러분! 착각하지 말라. 세간법이나 출세간법이 모두 자성(自性) 없고 또한 생겨나는 성품도 없느니라. 다만 헛된 이름만 있을 뿐 그 이름도 헛된 것이니라. 그대들이 저 부질없는 이름을 오인하여 진실이라 여기고 있으니 크게 잘못된 것이니라. 설사 뭐가 있다 하더라도 모두 변화를 의지하는 경계일 뿐이다. 깨달음을 의지하고 열반, 해탈을 의지하고 삼신(三身)을 의지하고 경계와 지혜를 의지하고, 보살이나 부처를 의지한다 하는데 그대들이 변화하는 국토 속에서 무엇을 찾겠단 말인가?

더 말하자면 삼승십이분교(三乘十二分敎)의 경전도 모두 더러운 똥을 닦는 휴지이며, 부처도 허깨비 같은 몸이며, 조사도 늙은 비구일 뿐이니라.

그렇지만 그대들 자신은 어머니가 낳아준 몸을 가진 사람 아닌가? 그대들이 만약 부처를 구한다면 곧 부처라는 마군에 걸려들고 만약 조사를 구한다면 곧 조사라는 마군에 걸려들어 버리느니라. 그대들이 만약 무엇을 찾아 구하는 것이 있다면 모두 괴로울 뿐이니라. 아무 일 없느니만 못하느니라.”

‘땅에 넘어진 자 땅을 딛고 일어난다(因地而倒者 因地而起)’는 말처럼 깨닫지 못한 마음과 깨달은 마음이 다른 것은 아니다. 마음이 미혹한 상태로 있는 것은 넘어진 것이요, 깨달은 상태로 있는 것은 일어선 것이다. 그러나 넘어져 있는 몸과 일어난 몸이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또 다른 비유를 든다면 잠자는 눈이나 깨어 있는 눈이 매한가지다. 그래서 〈화엄경〉에서는 “마음과 부처, 중생 셋이 차별이 없다(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하였다.

마음과 마음이 다르지 않다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은 임제는 묻는 그때 마음은 이미 달라져 버린다고 대답한다. 마음과 마음이 다르지 않은 경지는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는 경지다.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으면 마음도 없다. 그런데 마음과 마음을 물으니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묻는 것이다. 한 생각 일어나 유심경계에 떨어져 버린 것이다.

깨달음을 추구하는 사람이 유심경계 즉 분별의식에서 놀아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 선(禪)의 가르침이다. 그래서 화두를 제시하고 실참(實參)을 요구하게 된 것이다. 사바세계가 음성교체(音聲敎體)라 말을 사용하기는 하지만 말을 필요로 할 때는 깊은 사유의 세계에도 이르지 못하고 허상만 쫓아다니는 것이다. 말 없는 이언(離言)의 세계가 실상인 진여(眞如)이므로 말을 의지하는 의언진여(依言眞如)는 방편에 불과한 것이다.

임제는 세간법이나 출세간법이 모두 자성이 없고 헛된 이름뿐이라고 말한다. 자성이 없고 실체가 없는 이름에 속아 끝없는 분별을 내고 있는 것이 모두 중생의 망업(妄業)일 뿐이라는 것이다.

달마의 〈사행론(四行論)〉에 무소구행(無所求行)이 있다. 아무것도 구하지 않는 것이 참된 수행이라는 뜻을 가진 매우 역설적인 말이다. 미혹한 사람은 구하는 것이 있고 깨달은 사람은 구하는 것이 없다고 한다. 구하는 것이 있으면 욕구가 일어나 어떤 대상을 찾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이 결국 마음을 힘들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구하는 것이 있으면 괴로울 뿐이다(有求皆苦)”고 하였다.

부처의 몸을 허깨비 같은 것이라 하면서 어머니가 낳아준 몸(娘生己=娘生身) 밖에 찾을 몸이 없다는 것을 일깨워 주고 있다.

‘신심탈락(身心脫落)’이라는 말이 있다. 몸과 마음이 떨어져 나갔다는 말인데 모든 번뇌와 집착이 떨어져 나가, 자유롭게 되었다는 뜻이다. 송나라 때 천동 여정(天童 如淨)이 납자들이 좌선 중에 조는 것을 보고 “참선은 몸과 마음이 떨어져 나가야 하는 것”이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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