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도(道)

“여러분, 제방에서 말하기를 닦아야 할 도(道)가 있고 깨달아야 할 법이 있다 하나니 무슨 법을 깨닫고 무슨 도를 닦는다는 것인가? 여러분이 지금 쓰고 있는 마음이 뭐가 모자라며 뭘 고쳐 보태야 한단 말인가?

못난 후학들이 제대로 알지 못하고 저 들판의 여우같고 도깨비 같은 이들의 허튼말을 믿고 사람을 얽어매 놓고 말하기를 ‘이치와 실천이 일치하고 몸과 입과 뜻의 삼업(三業)을 잘 보호하고 아껴야만 비로소 부처가 될 수 있다’ 하는데 그렇게 말하는 것은 봄날의 가랑비처럼 흔하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길에서 도를 통달한 사람을 만나거든, 무엇보다 도에 대해 말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만약 사람이 도를 닦는다고 하면 도는 행해지지 않고 온갖 삿된 경계만 다투어 일어나나니 지혜의 칼을 꺼내 들면 아무것도 없으리라, 밝음이 나타나지 않았는데 어둠이 밝아진다’ 하였느니라. 그래서 옛사람은 또 ‘평상심이 도’라고 하였느니라.

대덕들이여, 무슨 물건을 찾는가? 지금 바로 눈앞에서 법문을 듣고 있는 ‘의지함이 없는 사람(無依道人)’이 역력하고 분명하여 조금도 모자람이 없느니라. 그대들이 만약 조사와 부처와 다름없기를 바란다면 다만 이와 같이 보아 잘못될까 의심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그대들의 마음과 마음이 다르지 않는 것을 살아 있는 조사의 마음이라 하느니라. 만약 다름이 있으면 본성과 현상이 다른 것이겠지만 마음이 다르지 않기 때문에 본성과 현상도 다르지 않느니라.”

임제의 독설 같은 말이 연이어 나온다. 닦아야 할 도가 없고 깨달아야 할 법이 없다는 말을 다시 한다. 지금 쓰고 있는 마음에 이미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다는 뜻에서 하는 말이다. 다시 말해 도와 깨달음은 이미 우리 마음속에 내재해 있으니 더 이상 찾으려 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수행을 잘해야 도를 이루고 법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인데도 닦는데 신경을 쓰지 말고 깨달음에도 관심 두지 말라는 투의 말이다. 이른바 닦음이 없이 닦는(無修而修) 것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반대로 닦되 닦음이 없다(修而無修)라고도 표현된다. 이런 경우를 무위심(無爲心)이라 한다. 무위심으로 하는 것은 잘하고 못함이 없는 것이다. 유위심(有爲心)에서는 시비(是非)를 논할 수 있으나 무위심에서는 주객이 나눠진 상태에서 경계를 의식하며 일으키는 어떤 시비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평상심이 도(平常心是道)’라는 말은 〈전등록〉에 마조(馬祖)가 한 말로 나와 있고, 그 뒤 〈벽암록〉의 남전과 조주의 문답에도 나오는 말이다.

마조도 이렇게 말했다.

“도는 닦을 것이 없다. 평상심이 도일 뿐이다. 무엇이 평상심인가? 꾸밈이 없고 옳고 그름도 없고, 취함도 버림도 없으며, 연속되거나 단절됨도 없고, 천하거나 성스러움도 없는 것이다. 다만 지금 가고 머물고 앉고 눕는 행위가 모두 도이다.”

〈벽암록〉과 〈무문관〉에도 ‘평상심이 도’라는 말이 조주가 스승 남전에게 도를 물었을 때의 대화로 소개되어 있다.

“어떤 것이 도입니까?”

“평상심이 도이니라.”

“그러면 닦아가는 방향이 있습니까?”

“방향이 있으면 어긋나느니라.”

“닦지 않으면 어떻게 도를 알겠습니까?”

“도는 아는 데도 속하지 않고 모르는 데도 속하지 않는다.(道不屬知不知) 안다는 것은 허망한 생각이요, 모른다는 것은 무기(無記)일 뿐이다. 참으로 도에 사무쳤다면 툭 트여 막힘이 없어 시비할 것이 없느니라.”

이 대화 끝에 조주가 크게 깨달았다 .

〈벽암록〉에는 이에 대해 무문(無門)의 송이 붙어 있다.

春有百花秋有月 봄에는 온갖 꽃이 피고 가을엔 달이 밝고 / 夏有凉風冬有雪 여름엔 시원한 바람 겨울에는 흰 눈 / 若無閑事掛心頭 마음에 부질없는 것 걸려 있지 않으면 / 便是人間好時節 이것이 인간의 좋은 시절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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