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닦음의 길 21

등산을 하다 보면 산행은 운동이 아니라 수행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어떤 이들은 뭔가 복잡한 문제가 있을 때 생각을 정리하려고 산에 가곤 한다. 처음에는 복잡한 생각들을 머릿속에 떠올리면서 천천히 걷기 시작한다. 그러나 오르막이 나오면 상황이 완전히 달라진다. 뭔가를 정리하겠다는 생각 자체가 들지 않는다. 산을 오르느라 힘들어 죽겠는데, 무슨 생각이 일어나겠는가. 내 의지와 관계없이 생각이 텅 비워지는 무념(無念)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정상에 오르고 나면 머리가 맑아지면서 자연스럽게 마음 정리가 된다. 그저 땀을 흘렸을 뿐인데, 본래의 목적을 달성한 셈이다.

산행을 하면 마음 정리가 잘 되는 이유는 바로 앞서 언급한 무념에 있다. 땀을 흘리면서 복잡한 생각, 번뇌가 모두 텅 비워졌던 것이다. 그렇게 고요한 마음이 되면, 지금의 나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다. 산행을 수행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다. 절 수행 역시 산행과 비슷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절 수행을 시작할 때는 뭔가 생각을 할지 몰라도 100배, 1000배가 넘어가면 몸이 힘들어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 무념의 상태가 된다. 그렇게 절 수행을 마치고 나면 번뇌, 망상이 사라지고 고요한 상태가 된다. 절은 무명(無明)으로 찌든 몸과 마음을 함께 닦는(心身雙修) 수행이다.

절 수행이 지금처럼 대중화된 것은 아무래도 성철(性徹, 1912~1993) 선사의 영향이 크다 할 것이다. 선사가 3천배를 해야 자신을 만날 수 있다고 한 일화는 널리 알려져 있다. 어쩌면 선사를 찾아온 사람은 3천배를 하면서 스스로 문제를 해결했을 것이다. 절을 하는 동안 자신을 괴롭혔던 번뇌가 사라졌을 테니 말이다. 2000년에는 법왕정사에서 오랫동안 일반인들과 함께 절 수행을 해온 출가사문이 〈절을 기차게 잘 하는 법〉이라는 책을 출간해서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노력들로 인해 오늘날 절 수행의 위상은 한 단계 올라가게 되었다. 그동안 보조적인 수행법으로 인식되었던 절이 어느 정도 독자적인 수행체계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절 수행은 불교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닐까? 서산대사는 〈선가귀감〉에서 절의 의미를 공경(敬)과 굴복(伏) 두 가지로 압축하였다. 먼저 절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을 공경하는 행위다. 왜냐하면 나란 존재는 본래 부처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절 수행은 본래 부처인 참 성품을 공경하는(恭敬眞性) 거룩한 행위가 되는 것이다. 둘째로 절은 무명을 굴복시키는(屈伏無明) 수행이다. 절이란 자신을 최대한으로 낮추어 누군가에게 예를 표하는 행위다. 절을 하심(下心), 즉 교만한 마음을 내려놓고 자신을 낮추는 수행이라고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절은 번뇌, 망상의 껍데기를 벗겨내고(伏) 본래의 참 성품이라는 알맹이를 드러내는(敬) 수행이라 할 수 있다.

공경과 굴복이 가능한 것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절을 하면 자연스럽게 무념이 되기 때문이다. 무념(無念)이라고 할 때 마음(念)이란 다름 아닌 번뇌, 망상, 삼독, 무명 등을 가리킨다. 한마디로 아상(我相), 즉 나에 대한 집착이라고 할 수 있다. 절은 단순히 자신의 몸만 낮추는 것이 아니라 마음도 함께 낮추는 수행이다. 그렇기 때문에 절 수행이 잘 되면 ‘나’라고 하는 상(相)이 완전히 소멸되어 본래 무아(無我)임을 깨칠 수 있는 것이다. 깨침이라는 불교의 본래 목적에 절 수행이 부합된다는 뜻이다. 절 수행이 단순히 보조적인 수단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는 이유다.

이처럼 절 수행은 분명한 문제의식을 갖고 시작해야 한다. 내가 왜 절을 하는지, 절 수행이 나의 실존에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하고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기계적으로 절 수행을 하면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절은 아상을 제거하여 무아를 깨치기 위한 수행인데, 오히려 ‘나는 3천 배를 몇 번 했다’는 아만을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아상으로 자신을 높이고 상대를 낮춘다면, 절 수행으로 건강을 얻는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결코 놓쳐서는 안 되는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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