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법정 스님 1

 

 

 

 

 

 

 

 

 

 

<서신 1>

사진과 사연 기쁘게 받았습니다. 사진 솜씨가 보통이 아니군요. 간판 내 걸어도 손색이 없겠습니다. 채소밭에서는 상치와 아욱이 잔뜩 자라 오르는데 혼자서는 다 뜯어 먹을 수가 없습니다. 가까운 데 살면 좀 뜯어갔으면 좋을 텐데 그럴 수도 없군요. 이제 여름 냄새가 후끈거립니다. 오늘은 발을 꺼내 걸었습니다. 요즘 저녁으로는 국수를 삶아 먹고 있는데 콩 담가 놓은 게 있어 오늘 저녁은 밥을 해 먹어야겠습니다. 지난봄에 와서 고성능 스피커로 떠들던 소리 아직도 우리 불일의 뜰에 맴돌고 있습니다. 날마다 좋은 날 이루십시오. 6월 15일 불일암에서 합장

 

 

 

 

 

 

 

 

 

 

<서신 2>

참으로 지루한 장마철입니다. 푸른 하늘과 햇볕 본지 아득한 옛적입니다. 어제 비바람에는 파초가 갈기갈기 찢기고 달맞이꽃이 많이 꺾이었습니다. 높은 곳에 살면 툭 터진 앞을 내다보는 대가로 비바람을 다 받아주어야 합니다. 일장일단이란 바로 이런 걸 가리킵니다. 이게 다 세상 살아가는 도리이지요. 처사님이랑 집안이 두루 청안하신지요? 장마철이라 집안일에 열심일 줄 믿습니다. 아이들에게는 엄마의 일거일동이 그대로 산교육입니다. 집안 너무 비우지 말고 맛있는 것 해 먹이십시오. 물론 목소리도 좀 낮추고요. 7월 13일 합장

 

법정 스님을 뵙기 시작했을 때, 나는 20대였고 스님은 30대였다. 지금에서 생각하니 스님이나 나나 눈부신 시절이었다. 삶 자체가 눈부신 것이긴 하지만 지금과 많은 것들이 달랐던 그때를 돌이켜보면 늘 가슴이 뛴다.

스님은 우리나라 현대불교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선지식 중의 선지식이라고 생각한다. 한 시대의 대중을 화두 하나로 깨어있게 한 스승이셨다. 비록 그때의 가르침이 아직도 인류 대중에겐 요연한 일이지만 한 시대가 그렇게 지나간 것에는 그 의미가 적지 않다고 생각한다. 언제 또 그런 맑고 향기로운 가르침을 한 시대가 공유할 수 있을까. 종교를 떠나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두드렸던 그 가르침을 새삼 떠올려본다.

그렇게 한 시대의 어른이었던 스님을 가까이서 뵐 수 있었다는 것과 주고받은 서신이 남아 있다는 것이 내겐 더 없이 영광이고 기쁨이다.

스님과 주고받은 서신 속에는 지극히 일상적인 이야기들이 대부분이지만 그 속엔 드러내지 않은 스님의 인정과 가르침이 들어있다.

<서신 1>은 언젠가 스님을 뵙고 돌아와 사진과 함께 올린 서신에 대한 답신이다. 텃밭의 풀 한 포기를 바라보며 많은 생각을 하셨을 스님을 떠올려본다. 한 시대의 화두였던 ‘무소유’를 다른 말로 바꾸면 아마도 ‘인류애’가 아닐까. 국수를 삶고 콩을 담고 밥을 짓는 일에 삶을 두었던 하루하루가 큰 가르침인 것을 이제야 알 것 같다.

<서신 2>는 어느 해 장마철에 주신 서신이다. 비바람에 파초가 찢어지고 달맞이꽃이 꺾인 모습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 사실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고 싶었던 스님을 생각해본다. 그 마음이 아직도 철없는 나와는 많이도 다른 것이다.

1981년 6월, 불일암에서 법정 스님(왼쪽)과 필자 대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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