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불만과 감사

여실지견, 문제근본 확인
의료 사태 수가문제 원인
싸고 좋은 서비스는 없다
인위적강제, 악영향 끼쳐

“꿀 속에 독이 있음을 안다면 그 꿀을 먹겠느냐?”

“그 꿀을 어린 자식이 먹으려 든다면 그것을 바라보고만 있겠느냐?”

18-1 붓다의 말씀대로 우선은 꿀맛이지만 결국 독약이라면 그걸 아는 현명한 자는 꿀맛의 유혹을 떨쳐내야 겠습니다. ‘있는 그대로 본다(여실지견)’는 붓다의 명언은 겉만 보아서는 아니 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실과 진실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사실도 표면적으로는 맞지만 속내를 보면 아닌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또는 부분적으로는 사실인데 전체적으로는 전혀 다른 경우도 많습니다. 이럴 때 사실은 진실과 부합하지 않습니다.

아니라고 할 때도 그렇습니다. 아닌 부분도 있지만 상당 부분 맞는 경우가 있다면 전체 부정이 그릇된 것이지요. 실제로 교육 현장에서 단답형은 결과만 보아 정답 아니면 모두 틀리지만주관식은 풀어간 과정을 보아서 계산 결과가 틀렸드래도 8-90% 가점을 줄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상대의 말에 무조건 그게 아니라고 반응하는 사람은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상대에게 가르침 대신 상처를 주고 말아 교육의 효과는 반감됩니다.

18-2 ‘안돼’에 대응하는 진언은 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그래’ 진언입니다.

‘아 그렇구나’ ‘그렇지’ ‘그래 그래’라고 인정하고 긍정하고 수용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말에 이를 적용해보면 이것은 대단한 반응을 일으키고 인정받는 느낌, 지지받는 느낌을 불러 일으킵니다. 자기 자신에게 적용해보면 자신을 위로하고 감싸고 안아주는 치유 효과가 발생함을 느낍니다.

화가 났을 때도 ‘화가 많이 났구나’라고 하는 것과 ‘왜 화를 내고 난리야 못 됐어’라고 하는 반응은 천지 차이가 있습니다. 또 화를 못 참고 화를 낸 자신을 처벌하고 비난하고 후회 한탄하는 것은 죄책감을 키울 뿐 자신의 발전과 성장에는 도움이 되지 않음도 알 수 있습니다. 화나는 감정을 자연스럽게 여기는 것과 ‘화는 나쁘니 화내면 안 돼’라는 태도의 차이는 극명하게 대조적입니다. 전자는 너그럽고 여유와 부드러움이 있는 데 반해 후자는 용서할 수 없는 죄, 용서받지 못할 죄인으로 매도하는 것처럼 추상같고 매섭고 차갑습니다.

18-3 이 세상을 밝게 하는 요소는 부드러운 수용과 이해와 사랑이지 가차 없는 질책이나 처벌 비난이 아닙니다. 전자가 사랑과 기쁨으로 연결되어 있다면 후자는 불만과 적대감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전자에 익숙한 사람과 후자에 익숙한 사람을 잘 살펴보면 금방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전자는 일단 반응이 ‘그래 그렇구나’하고 인정해줍니다. 후자는 ‘아니야’ ‘그게 아니고’라며 일단 부정하고 나섭니다. 전자는 부족함에도 격려를 받아 더 나은 상태로 가능성을 고무시키는 데 반해, 후자는 가능성과 잠재력을 매몰시키고 전체를 부정해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기 쉽습니다. 전자에겐 황희 정승의 이해와 관용이 있지만 후자에겐 완벽주의자의 불만과 분노가 깃들어 있지요.

‘그렇구나’ ‘그래 그렇지’

이 마음의 여백을 갖기 위해서 수시로 호흡을 챙겨 호흡을 바라보는 연습을 하고 지금 몸 상태를 느껴보곤 합니다. (눈을 감고 잠시 자신을 돌아보고 ‘그래 그렇구나’라고 속삭여 보세요. 마음 상태와 몸과 호흡 상태를 연결시켜 살펴보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리 하노라면 화가 올라오건 미움이나 짜증이 올라오건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그대로 인정하고 나오게 된 연유와 배경도 드러나게 되어 현명한 해결도 가능하겠습니다.

18-4 훈육에도 바람직한 원칙이 있습니다. 정신분석가 고트만은 5:1의 룰을 지키라 합니다. 칭찬을 5번 하고 나서 훈계나 지적을 한 번 하는 교육의 황금률입니다. 야단이 효과가 있으려면 5번의 칭찬이 전제되어야 가능하다는 거지요. 아무리 옳은 지적이나 훈계도 부당한 간섭이나 불필요한 잔소리로 들리니까요. 상담을 해보면 칭찬을 받아 본 기억이 거의 없다고 술회하는 내담자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나쁜 게 하나도 없는 무결점은 오히려 강박증을 낳을 수 있습니다. 좋은 점을 살리고 더욱 키우는 것이 치유의 원리입니다. 통제하려 말고 스스로 할 수 있도록 자율성을 키우고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 게 좋은 교육입니다.

18-5 경청과 수용은 개인 간에도 필요한 덕목이지만 단체 간에도 필수적입니다. 이 두 요소는 모두 상대를 존중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경청-수용-존중은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이 삼자 중 어느 하나가 빠지면 관계는 갈등 속에 빠지고 파열음이 일어나게 됩니다. 부부 관계에 적용해보면 금방 답이 나옵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웃음)

관계의 일방성은 관계의 파탄이고 사회 분열의 원인입니다. 어느 한쪽이 우월함을 과시하거나 지배하려 든다면 상호 존중은 사라지고 깊은 불신과 적대감, 그리고 혐오감마저 발생합니다. 이런 마음 상태에선 대화가 단절되고 극한 대립이나 극한 투쟁으로 맞서게 되지요.

18-6 이것을 작금의 의료계 집단 행동에 대해 적용하여 분석해 볼까요?

코로나 사태로 본 한국의 의료 수준은 세계 최고 수준에 있음이 입증되었고 방역 일선에 선 의료인들의 자발적 참여도 눈물겨웠습니다. 그런데 이런 의사들이 갑자기 벼랑 끝 극한투쟁을 선언할까요? 정부나 여론은 의사들의 밥그릇 투쟁으로 규정하고 매도합니다. 과연 의대생들과 교수들이 밥그릇을 위해 의사 시험까지 거부하고 나설까요? 의료계가 진정 요구하는 내용은 상세히 알리지 않고 정부의 정책만 알리는 언론도 편파적입니다.

중세 1000년 간 카톨릭 교회에서 자행된, 전통적 견해에 반하는 의견들에 대해 종교재판에 회부하여 공개리에 화형에 처한 마녀사냥은 우민들을 길들이기에 효과적이었지요. 현대판 마녀사냥은 여러 형태로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게 여론재판입니다. 어느 일방의 의견이 다수의 배경을 업거나 권력의 힘으로 강제될 경우 마녀사냥이 되곤 하지요. 포퓰리즘에 편승한 의료정책도 같은 범주입니다. 당사자들인 의료인들의 의견을 배제한 의료정책은 결국 한국 의료계의 질 저하는 물론이고 국민에게 그 피해가 고스란히 돌아갈 것이 명약관화합니다.

18-7 정부는 의료의 공익성을 강조하고, 국민 또한 의료계의 완벽한 헌신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 의료계의 태반은 공공 의료가 아닌 사적 재원에 기반합니다. 모든 의료기관이 국공립이라면 정부의 정책은 타당합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당사자인 의사의 의견을 충분히 존중해주고 협조를 요청해야 합니다. 정부가 주장하는 의료가 공공재가 되려면 의사 양성부터 취직에 이르는 모든 과정이 국가나 지자체에서 관리해야 온당합니다.

그런데 공공 의료를 시행하는 사회주의 국가의 의료 현실은 완벽한가요? 선진국들의 의료 현실도 의사 수가 충분한데도 오히려 우리보다 더 열악합니다. 영국만 봐도 진료 받는데 수 개월에서 수 년을 대기해야 되는 불편을 겪고 있지요. 의사 수가 많다고 해법은 아니군요. 의료정책 입안을 한 학자나 정치인 또는 시민단체가 영국을 모델로 삼는다면 아니 되겠지요.

18-8 의료 정책 갈등에 대한 해법도 상호 존중의 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한편으로 감사한데 그래야 마땅하고 그렇지 못하면 징벌하리라는 태도는 분명 이중적입니다. 이러한 양가적인 태도를 부모가 가지면 그 자녀는 분열증에 걸릴 확률이 높아집니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이고 사회나 국가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일방의 희생만을 요구한다면 매우 불평등한 사회이지요. 게다가 국민의 여론을 빌미로 의사에게 무한 희생을 요구하는 것은 마녀사냥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정책 수립 과정에서 배제된 의료계와 ‘원점에서 다시 협의하자’고 약속하면 될 텐데 정부의 태도는 고압적인 명령입니다. 이러한 양가 감정의 이중성이 사태를 악화시키고 있지요. 의사에게 높은 기대를 거는 만큼 거기에 걸맞는 대우를 해주어야 하는데도 우수한 전공의들이 힘든 외과계나 중환자들 대신 안전하고 비보험으로 쉽게 진료할 수 있는 과목으로 몰립니다. 그 뿌리엔 원가에 못 미치는 낮은 의료 수가 정책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저렴한 바용으로 가장 수준 높은 의료 서비스를 받고 있습니다만, 국공립 병원이나 유수한 대학병원이 모두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는 실정이 그 증거입니다. 지방의 공공 의료기관인 진주의료원을 지자체에서 폐쇄시킨 이유도 적자가 누적된 결과입니다. 지역 의원에서 맹장 수술이나 분만이 사라진 것도 의료 사고에 대한 보장 없는 낮은 수가에 기인합니다.

18-9 상황이 이러한데도 의사를 전체 매도하는 것은 바른 해법이 아닙니다. 균형 잡힌 언론이라면 문제의 땜질 처방 대신 심층 분석을 하여 국민들의 눈과 귀가 되어야 합니다. 코로나 위기 대응에 의료 전문가들에 의존하고 있듯이 의료정책 입안에도 의료 전문가들에게 그 주된 역할을 맡겨야지 행정 관료나 시민 단체가 의료정책을 주도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해답은 ‘원점에서 재논의하자’고 의료계에 약속하고 실제로 원점에서 진지하게 의료 현실을 진단하고 처방하는 제대로 된 협의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지금은 달콤하지만 머지않아 의료 시스템이 붕괴될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면 차제에 의료 체계 전반에 대해 개선을 하는 좋은 기회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오만함 대신 낮춤을
열등감 대신 긍지를
경멸과 무시 대신 존중과 배려를
꽉 채우려기보다 비워내기를
받기보다 베품을
충동적 반응보다 지긋이 지켜보기를
비난과 훈계보다 칭찬과 격려를
불만보다 감사를

나와 남 과이웃에게
그렇게 온 세상에 보낸다면
온누리가 환해지고 밝아질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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