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국가·국민정치론

개혁 진보와 안정의 보수
발전과 국민의 행복 지향
극단평가, 상호비방 자제
???????‘국민행복’에서 중도 회통

프랑스의 루이16세와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 혁명으로 단두대에서 사형된다. 당시 왕을 비롯하여 많은 귀족을 처형하기 위해 가장 효율적 사형제도인 단두대가 고안되었다.

길로틴이라는 칼을 사용한 단두대는 그야말로 목을 싹뚝싹뚝 매우 빠르게 자를 수 있어서 많은 사람을 처형하기 좋은 기구였다. 단두대는 프랑스의 왕과 귀족 만이 아니라 로베스피에르에 반대하는 온건파 혁명세력을 사형시키는데 사용되었다.

로베스피에르는 공포정치로 이름 높다. 프랑스 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혁명 세력 중 강경파였던 로베스피에르는 자신도 결국 반대파에 의해 단두대에서 죽는다.

프랑스 왕정을 무너뜨린 혁명세력은 온건파와 강경파로 나뉘어 끊임없이 투쟁했다. 국민의 적을 무너뜨린 후 다시 혁명세력이 스스로 분열되었으니 온건파가 국민을 위하는 세력이었을까 강경파가 국민을 위하는 세력이었을까?

온건파와 강경파는 회의 때 끼리끼리 앉았던 모양이다. 온건파는 오른쪽(우)에 앉았고 강경파는 왼쪽(좌)에 앉았다고 한다. 좌파와 우파의 기원은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온건파는 우파로 불리웠고 강경파는 좌파로 불리웠다.

오늘날은 우파는 보수, 좌파는 진보를 지칭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보수와 진보로 나누고 있을까?

보수는 인간의 이성과 능력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보수는 인간이 옛날 제도를 버리고 쉽게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보수는 과거의 제도가 갖고 있는 좋은 점 때문에 과거 제도를 소중하게 간직하려고 한다.

진보는 인간이 옛날 제도를 벗어나 개혁함으로써 더 나은 미래를 가져다 줄 수 있다고 믿는다. 보수는 가정과 국가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역사를 소중하게 생각하다보니 때로는 국수주의로 치닫는다. 진보는 사회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국가를 넘어 세계주의적 관점에 기운다.

보수라고 해서 미래 지향적인 발전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과거의 제도를 급격하게 벗어난 도약이 가능하다고 믿지 않기에 점진적으로 한 발 한 발 나아갈 뿐이고 과거의 제도에 더 많은 비중을 둘 뿐이다.

불교는 브라만교의 폐해를 목격한 부처님이 내세운 개혁적인 종교다. 계급제도를 부인하고 여성의 출가를 허용하였다. 친시장 친자본적 경제관을 피력하고 사회계약론에 기초한 자유 평등의 민주주의 정치관을 제시하였다. 이렇게 보면 불교는 진보다.

<장아함경>은 ‘또 나라에 옛 법이 있거든 너는 그것을 고치지 말라. 이런 것들이 전륜성왕의 수행해야 할 법이다’고 설한다. 다시 <장아함경>은 ‘오직 이 한 왕은 제 뜻대로 나라를 다스리면서 옛 법을 이어 받지 않았다. 그 정치는 공평하지 않아 천하는 원망으로 호소하고 국토는 줄어들며 백성들은 시들어졌다.…왕이여, 지금 국내에는 총명과 지혜가 두루 통달해 예와 이제를 환히 알고 선왕들의 정치의 법을 갖추어 아는 학자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들을 불러 그 아는 것을 물어보지 않으십니까? 그들은 마땅히 대답할 것입니다.…왕은 그 말을 듣고 옛날의 정치를 행하고 법으로써 세상을 보호했다’고 설한다. 이렇게 보면 불교는 보수다.

연기법은 진보도 아니고 보수도 아니다. 있음에서 없음을 보고, 없음에서 있음을 보는게 연기법이다. 진보이되 진보를 벗어나며 보수이되 보수를 벗어난다. 불교적 정치관이란 때로는 진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보수이기도 하며 때로는 진보와 보수의 중간지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진보도 아니고 보수도 아니고 진보와 보수의 중간도 아니라는 말이 된다.

시장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보수적인 정치관은 시장에 가능하면 개입하지 않는 정부관을 지지했다.

정부는 시장실패의 경우에만 시장을 규제하고 시장에 개입하되 나머지는 시장의 자율에 맡겨야 한다는 정치사상은 야경국가를 낳는다. 야경이 범죄를 방지하기 위해 밤에 순찰을 하듯이 낮에는 시장에서 모든 일이 이루어지도록 하고 정부는 밤에 범죄나 방지하면 된다는 정치관이다. 시장에 최대한 자유를 주고 정부는 범죄 예방에만 전념한다면 ‘작은 정부’를 의미한다.

시장은 효율적이지만 형평성은 결여된다. 영국의 경우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어린아이들까지 공장에서 노동에 내몰리며 각종 사회적 문제를 초래했다. 저임금으로 인한 빈부격차는 생존권도 보장받지 못하는 계층을 양산했고 프랑스 혁명은 이러한 불만의 표출이다. 영국의 보수주의자들은 가난한 계층에 복지혜택을 제공하는 온정적 보수주의를 추진하며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했다. 시장자본주의의 병폐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가 더 많이 시장에 개입하고 규제해야 한다는 진보주의자의 시각은 일부분 온정적 보수주의와 맥을 같이 한다. 진보주의자는 복지를 비롯한 시장실패의 영역에 정부의 역할 증대를 요구하였고 결과적으로 큰 정부가 등장한다.

원래 보수와 진보의 구별은 인간의 이성과 능력에 얼마의 신뢰를 부여할 것인가에 달려 있었다. 한마디로 보수는 변화로 인한 이익은 변화로 인한 손실보다 작다고 생각하지만 진보는 변화로 인한 이익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시장개입에 대한 관점의 차이로 인하여 보수와 진보의 구별에도 다른 기준이 생겼다. 가능하면 시장에 맡기고 정부는 최소한의 시장실패 교정만 하자는 작은 정부 주의자들은 보수이다. 복지 등 시장실패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자는 큰 정부 주의자들은 진보다.

불교의 연기법은 수많은 인과 연이 임시적 결과를 만들어내며 이러한 임시적 결과는 또 다른 인과 연이 되어 연기한다.

연기적 세계에서는 계산에 의한 정부의 개입은 한계가 있기에 시장에 맡기는게 더 좋다. 이러한 측면으로 보면 불교는 시장에 더 많이 의존하는 보수다. 불교는 가난한 사람에게 집과 먹을 것을 제공하고 심지어 외로운 이에게 배우자를 주선해줄 정도로 복지를 지향한다. 복지는 정부에 더 많이 의존하는 진보의 정책이다.

이렇게 보면 불교는 진보다. 우리는 고정관념과 이분법에 젖어 반드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착각에 빠진다. 불교는 진보도 보수도 진보와 보수의 중간도 아니며, 진보이고 보수이며 진보와 보수의 중간이기도 하다. 우리는 있음에서 없음을 보고, 없음에서 있음을 보아야 한다.

나는 진보도 아니고 보수도 아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도 진보 혹은 보수로 분류하기 어렵다. 특정 정책에 있어서는 보수라 할지라도 다른 정책에 있어서는 진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제정책, 교육정책, 국방정책, 대북정책 등 모든 정책 영역에서 사람들의 생각은 다양하게 다르다. 그런데도 우리는 어떤 사람을 진보라고 낙인찍고 모든 정책에서 그 사람이 진보적인 관점을 갖는 것으로 왜곡한다.

게다가 뭐가 진보고 보수인가도 애매하다. 원래 보수는 인간의 이성을 신봉하지 않고 관습과 기존제도를 더 신뢰하는 사람들에게 붙인 명칭이다. 그러나 오늘날은 시장경제를 신봉하고 작은 정부를 주장하는 것이 보수이고 시장경제를 상대적으로 덜 신봉하고 상대적으로 큰 정부를 주장하는 것이 진보이다.

한국에서는 북한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갖느냐에 따라서 진보이고 보수가 결정되기도 한다. 사람들은 어떤 기준을 사용할까? 진보나 보수라는 단어를 사용하려면 이것부터 분명히 해야 한다. 단어 개념부터 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진보냐 보수냐를 논한다는 것 자체가 코미디다.

나는 무상복지는 반대이고 선별적 복지에 찬성이다. 이것을 보면 보수 같다. 기업은 믿을 수 없는 존재이니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점에서는 진보 같다. 그렇지만 기업에 정부가 직접 돈을 나눠주어서는 안 되고 국민이 우수기업을 선택하도록 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에 이 점에 있어서는 시장을 신봉하는 보수다. 연봉 2억원 이상의 소득을 올리는 사람에 대해서는 매우 높은 소득세를 부과하자고 생각하기 때문에 진보라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인간의 이성을 별로 신봉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면에서는 보수다. 우리는 진보와 보수의 구별에서 벗어나서 국가를 위해 뭐가 제일 좋은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우리나라에 진짜 보수가 있나 궁금하다. 왜냐하면 어떤 정당이 정권을 잡아도 시장에 맡기지 않고 관치에 열심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요즘은 모든 정당이 복지에 적극적이니 구별이 안된다. 오직 북한에 대해 강경한 입장인지 온건한 입장인지에 따라서 보수와 진보를 구별한다면 도대체 무슨 이익이 있을까? 유럽의 기준으로 보면 민주당은 온건한 보수이고 정의당이 진보이다. 많은 국민이 정의당을 공산당 정도로 생각하지만 유럽 각국의 가장 대표적인 진보정당인 사회민주당 수준 밖에 안된다.

우리가 부처님의 제자라면 보수와 진보의 이분법적인 도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중도는 항상 중간이나 평균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중도는 때로는 보수이기도 하고 때로는 진보이기도 한 관점이다. 중도는 평균이고 중간일 수도 있다. 중도는 때로는 약간의 과부하나 약간의 과부족이다. 중도는 선입관, 고정관념, 편견, 아집, 독선, 슬픔, 기쁨, 분노가 없는 생각과 행동이다. 집착이 없어야 하며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떠나야 한다. 여당 지지도 아니고 야당 지지도 아니라고 중도인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사물과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여실지견(如實知見)이 중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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