天王 제석천, ‘신중도’로 들어가다

불교 대표하는 호법신장 ‘제석천’
아리아人의 신 ‘인드라’에 기원해
‘디가 니까야’ ‘본생담’ 등서 등장
왕후·여신 모습 14세기 後 형성

캘커타 뮤지엄에 소장된 ‘제석굴 설법’. 3세기에 조성됐으며, 파키스탄 로리안 탕가이서 출토됐다. 부처님 오른쪽에 합장하고 있는 신장이 제석천이다.

지난 연재에는 불교의 수호신들을 그린 ‘신중도(神衆圖)’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날개 달린 투구를 쓴 위태천(韋天)에 관해서 이야기하였다. 위태천의 기원을 인도 전통의 전쟁의 신 ‘스칸다’에서 찾았었는데, 그렇다면 불교를 보호하고 전파하는 호법신들 중에서 다른 종교나 문화권에서 차용되어 불교에 자리 잡은 신이 또 있을까 궁금해진다.

‘신중도’에서 위태천만큼 비중을 차지하는 신이 제석천과 범천이라 할 수 있다. 제석천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를 담은 ‘본생담(本生譚, Jataka)’부터 싯다르타로서의 생애를 이야기한 불전(佛傳)까지 자주 등장을 하는 신이다. 이처럼 불교의 초창기부터 존재하던 제석천은 어디에서 기원 했을까? 

제석천(帝釋天, Sakka)은 이름 그대로 풀이하면 ‘하늘나라의 왕’이라는 뜻인데, 아마도 그 기원인 인드라(Indra)가 가진 전설과 능력에서 기인한 것이라 여겨진다. 신들이 거주하는 하늘나라의 왕 인드라는 전형적인 아리아인의 신으로서 무기는 천둥과 번개이며, 후에 불교·힌두교·자이나교에 차용되어 중요한 신으로 자리 잡는다. 불교에서 인드라는 그물을 사용하여 불법을 수호하고 아수라(阿修羅)의 군대를 정벌하는데, 이 그물을 ‘인다라망(因陀羅網)’이라고 칭하며 얽히고설킨 복잡한 인연에 비유하기도 한다. 

제석천이 불교 경전에 등장한 이른 사례를 찾아보면 팔리어 경전인 〈디가 니까야(Dgha Nikya)〉에 등장한다. 그 내용은 제석천은 전생에 마가(Magha)라는 인물로서 선업과 공덕을 쌓은 인연으로 도리천을 다스리는 제석천이 되었으며, 그와 함께 한 33명의 청년들과 제석천이 도리천의 33천을 이룬다고 한다. 또한 우리에게도 친숙한 부처님의 전생이야기 중의 하나인 ‘시비왕본생(尸毘王本生)’에서는 시비왕의 보시를 시험하는 매로 등장을 하기도 한다.

아리아인의 신 인드라가 아닌 불교미술에서 호법신 제석천으로 표현된 시기는 무불상 시기인 기원전 1세기경부터이다. 현존 유물로서 제석천이 불교미술에 표현된 가장 이른 사례는 ‘제석굴 설법(Indra′s visit to the Indrasaila cave)’ 또는 ‘제석천의 방문’으로 알려진 불전의 내용을 표현한 조각에서 찾을 수 있다. 

먼저, 팔리어 대장경 〈사카판하수타(Sakkapanhasutta)〉와 이에 상응하는 한역 경전 〈장아함경(長阿含經)〉, 〈중아함경(中阿含經)〉, 〈제석소문경(帝釋所問經)〉, 〈잡보장경(雜寶藏經)〉, 산스크리트어본 단편 등에 기록된 관련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어느 날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마가다국 암바산다(Ambasanda)의 바라문 마을 북쪽에 있는 인다살라 굴에 계셨다. 부처님께서 이 동굴에 머물고 계실 때 제석천에게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몇 가지 전조가 나타났다. 이에 불안을 느낀 제석천이 부처님을 뵙고자, 건달바의 아들이자 음악의 신 판차시카(Pancasikh, 般遮翼)로 하여금 부처님을 친견할 수 있는지 알아보게 하였다. 제석천의 명령을 받은 판차시카는 벨루와나판두(Veluvapandu)라는 하프를 연주하며 부처님과 교법, 승단과 기쁨을 주제로 하는 음악을 연주하였다. 
판차시카의 연주가 끝나자 부처님께 천신들의 방문을 허락받은 인드라와 판차시카를 비롯한 다른 33천의 천신들이 제석굴 안으로 들어갔다. 원래 제석굴은 많은 신들을 수용할 만큼 큰 공간이 아니었지만, 제석천과 그 일행이 들어서자 동굴은 그들을 모두 수용할 만큼 커졌고 깜깜한 동굴 내부도 천신들이 내뿜는 빛과 부처님의 광채로 환해졌다고 한다. 부처님의 설법을 들은 제석천은 깨달음을 얻고 그 자리에서 죽어서 다시 젊은 제석천으로 태어났다.’ 

위 경전의 내용을 묘사한 조각과 벽화가 기원전 1세기경의 바르후트 스투파에서부터 기원후 1세기경의 산치 스투파, 2세기 마투라 지역 등을 거쳐 중앙아시아지역에서도 6세기까지 유행하였다. 

파키스탄 로리안 탕가이(Lioryian Tangai)에서 출토된 3세기의 ‘제석굴 설법’은 경전의 내용과 더불어 불교 초기의 제석천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 중앙에 동굴 속에 선정에 든 부처님께서 가부좌한 모습이 보이며, 동굴 외부는 화염으로 부처님의 빛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부처님의 좌측에는 하프를 손에 든 판차시카와 오른쪽에는 두 손을 합장하고 고개를 숙여 부처님께 경배를 올리는 제석천이 서 있다. 여기에서의 제석천은 아리아인의 신 인드라와 비슷한 높은 모자와 장신구를 착용하고 있어, 불교에 차용된 초기에는 남성적인 인드라의 모습을 유지한 채로 묘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 쇼타쿠인에 소장된 고려불화 〈제석천도〉. 14세기에 초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왕후와 같은 화려한 복식으로 제석천 신앙의 정착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익숙한 왕후나 여신의 모습을 한 제석천은 언제 어디에서 형성된 것일까? 중국의 경우 제석천과 관련된 불화는 원대(元代, 1271~1368) 이전의 작품이 현존하지 않아서 단적으로 말할 수 없으나, 수륙재(水陸齋)를 지내기 위해 제작한 수륙화(水陸畵)에 시녀들을 거느리고 이동하는 왕후와 같은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아마도 중국에 들어와 신중으로서 자리 잡은 제석천은 본생과 불전에 묘사되었던 인드라의 모습은 버리고, 신중으로서 적합한 복식을 갖추어 신앙의 대상으로 탈바꿈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우리나라의 경우 고려시대 14세기 초반에 그려진 일본 쇼타쿠인(聖澤院) 소장 ‘제석천도’는 용머리가 장식된 대좌에 앉아 왕후 혹은 귀부인과 같은 복식과 화려한 보관을 착용하고 부채를 들고 있다. 제석천이 들고 있는 부채를 자세히 살펴보면 높은 암벽 위에 집이 그려져 있는데, 바로 제석천이 산다는 선견성(善見城)과 수미산(須彌山)을 표현한 것으로 이미 제석천 도상이 정립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 고려에서 제석천 신앙이 구체화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제석천 신앙은 신라 화엄사의 승려 홍경(洪慶)이 태조 11년 928년에 대장경의 일부를 중국에서 가져와서 이를 제석원(帝釋院)에 두고 제석도량(帝釋道場)을 열면서 시작되었으며, 고려시대에는 더 발전하여 궁중에서 더 자주 제석도량이 행해졌다고 한다. 고려의 제석도량은 천신인 제석의 권위를 통해서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왕권의 신성함을 강조하기 위해 시작되었으나, 점차 무병장수의 기복적인 성격이 강해졌다.

이후 거란의 침입으로 호국안민의 기원까지 더해진 제석 신앙은 더 많은 제석천 그림과 상을 필요로 하였을 것이며, 이러한 요구로 제작된 것이 14세기 쇼타쿠인과 정가당문고미술관(靜嘉堂文庫美術館) 소장의 ‘제석천도’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고려시대의 ‘제석천도’는 조선시대 제석천 도상의 기반이 되었으며, 중국과는 다른 예배 존상으로서의 특징을 창조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숭유억불 정책으로 제석천의 호국적인 면모는 쇠퇴하였지만, 여러 재앙을 없애고 복과 장수를 비는 기복적인 성격을 유지하며 단독적인 주존 보다는 범천과 위태천 혹은 여러 신중들과 함께 그려지는 경우가 많아졌다. 

1741년에 그려진 흥국사(興國寺) ‘제석천도’를 통해서 고려시대를 거쳐 400년 이상의 시간이 흘렀지만, 정면을 향한 당당한 정좌와 선견성과 수미산이 그려진 부채를 지닌 모습에서 고려 ‘제석천도’의 전통과 특징을 이어져 오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비록 하늘나라의 왕 제석천이 신중 신앙의 발전과 함께 여러 신들을 함께 구성하는 ‘신중도’ 속으로 들어갔지만, 원래부터 지니고 있었던 아수라를 정벌하고 불법을 수호하는 힘은 조금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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