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가 고가 아니고 참인간으로 벗어나기 위한 과정이다

부처님의 마음은 전 우주 법계를 다 쥐어도 쥔 사이 없이
다 한마음으로 돌아가는,
어떤 것도 세울 게 없이 세우면서 당당히 흐르고 있는
여러분의 마음입니다.

어떤 맘으로 주인공을 찾아야 하나요

질문 : 누구나 자기의 삶이 더 힘들다고 생각하겠지만, 저 또한 갚아야 할 빚 때문에 매일 힘든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끔 대행 스님의 모습과 법문을 대하면서 지친 마음을 애써 다독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는 게 답답하기만 하고 어느 날 주인공에 맡기라는 말 또한 너무 공허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럴 때는 어떤 마음으로 주인공을 찾아야 하는지요.

답변 : 첫째는 무조건 ‘네가 있다는 것을 네가 증명하는 거다.’ 하고서 관하는 거고, 둘째는 가정살이 돌아가는 것 전부 ‘그놈이 하는 거니까.’ 하고 관하는 거죠. 그놈이 하는 건데 뭐가 그렇게 답답하고 그렇습니까, 네? 이거 보세요. 내가 말하는 건 잘되고 못되고 그걸 떠나서 말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답답한 것도 거기서 나오는 거, 잘 안되는 것도 거기서 나오는 거, 잘되는 것도 거기서 나오는 겁니다.

그것이 다 내 속에서 나오는 건데 진짜 우주간 법계와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일체제불이 한 골수에 들어서 한자리를 할 수 있다면…. 내일 죽는다, 이따 죽는다, 우리 식구가 다 멸망한다 이러더라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그런 결사적인, 나를 버린 그 마음이 정통으로만 들어간다면 뭐가 그렇게 어렵겠습니까? 뭐가 답답합니까?

그게 다 욕심입니다. 그렇게 생각 안 됩니까? 욕심입니다. 그 욕심을 부리지 않고 그냥 닥치는 대로 늠름하게 넘어가면서 진짜 칼을 뺄 때는 그냥…. 이거 보세요. 악으로 사는 사람이 칼을 썩 뺐을 때는 사람을 죽이는 칼이 됩니다. 그러나 살리는 칼을 썩 뺐을 때는 수많은 중생들을 다 살릴 수 있고, 한 나라를 세울 수가 있고, 한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전체를 다 한 칼로다가 부릴 수도 있다 이 소립니다. 그런데 뭐가 그렇게 답답합니까? 내일 죽으면 어떻고, 이따 죽으면 어떻고, 식구가 다 죽으면 어떻습니까? 어차피 한 번 죽을 거! 안 그렇습니까?

이 말이 너무 잔인하고 너무 안됐다고 생각합니까? 아휴 참! 이 세상, 이 길, 그냥 걸을 뿐이에요. 우리가 그냥 살 뿐이에요. 왜 사나? 내가 어디서부터 이렇게 와 가지고 지금 무엇을 하고 가는지 알아야 답답하지 않다 이 소립니다. 야! 이거 뭐, 캠핑 와서 잠시 있는데, 내가 생각하고 이러는 것이 우주간 법계에 다 통신이 되는구나. 이럴진대 내가 뭘 그렇게 걱정하랴.

하나도 걱정할 게 없어요. 소 한 마리를 잡는다 해도 걱정이 없고, 소 한 마리를 죽인다 하더라도 걱정이 없고, 이 세상이 다 없어진대도 걱정이 없고. 그렇기 때문에 세상을 살릴 수가 있는 거지, 아니, 그놈의 거 하나하나 걱정을 하는 사람이 어떻게 세상을 건지고 살릴 수 있겠습니까? 가정도 그래요. 이판사판이에요. 두 가지뿐에요. 죽느냐 사느냐 요거뿐이지, 거기에 또 뭐가 붙습니까?

어떤 스님이 날더러 이렇게 말하더군요. “스님, 이 토굴의 문에 못 좀 박아 주십시오.” 그래서 “못은 왜?” 그러니까 “들어간 뒤에 바깥에서 못을 박아서 못 나오면, 죽지 않으면 얻을 거 아닙니까? 죽지 않으면 얻고 얻지 못하면 죽고, 이거 둘뿐 아닙니까?” 이거예요.

여러분이 이 도리를 알면요, 정말 아주 너그럽게 살아갈 수 있고, 너그럽게 두루 할 수 있고, 항상 싱그레 웃고, 남이 갓 미쳤다고 할 정도로 싱그레 웃고 길을 지나갈 수 있고, 소 둥구리를 봐도 싱그레 웃을 수 있어요. ‘저거 가엾다.’, ‘저거 죽으러 가지, 뭐.’ 이런 생각조차 없습니다. 왜? 아주 곧바로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순간에. 소 만 마리를, 아니, 어떤 거든지 만 마리가 모두 죽었다 그럴 때, 그것을 빗물 방울로 친다면 한 골짜기에 다 모였다 해도 한 골짜기에서 한 바다로 들어가는 물일 뿐이지, 한 그릇이지 그게 두 그릇입니까?

여러분의 그 마음은 체가 없고 무량해요. 그래서 무량심이에요. 일심이자 무량심이고, 무량심이자 그 묘법이죠. 무심도법(無心道法)은 그렇게 무량해서, 지금 수만 마리가 죽으러 간다 하는데 불쌍해서 염불을 해 주고 그런다면 그건 벌써 공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수십, 수백 마리가 죽으러 가는데 무슨 염불이 필요합니까? 염불하다 보면 벌써 다 늦는데, 하하하….

그러니까 그 순간에 그냥 모조리 이 한 그릇 자기 마음에다 탁, 거기다가 만 마리고 천 마리고 넣으면 그냥 자기 한 그릇이 돼 버리고 말아요. 그러니 그대로 그냥 인간으로 환토가 되는 거죠. 자기가 돼 버리는 거죠. 그렇게 자기로만 만들어 놓는다면 자동적으로 그냥 나가서 인간이 되는 거예요. 인간이 돼도 그냥 아무렇게나 되는 게 아닙니다. 그 속을 거쳐서 나가는 인간은 나와서도 정말 사람 노릇을 하고 이 세상을 두루 살필 수 있는 지략과 아량과 지혜가 충만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대로, 못났든 잘났든 그대로 그냥 수순히 걸어가세요. 그냥 딱 세우곤 입 딱 다물고 그냥 걸어가다가 딱 닥칠 때 ‘네가 하는 거지.’ 하란 말입니다. ‘너!’ 하고선 말 안 해도, ‘너!’ 할 때 그건 그냥 그대로 깜짝할 사이에요. 그러니 재생이 돼서 체가 나올 때는 거쳐서 나오는 그 시간이 있겠지만 이거는 자동적으로 불이 확 붙어서 끓는 쇠가 돼 가지고 직접 바로 나와요.

우리는 이 세상에 잠시 왔다 가는 거예요. 그러니 앞으로 살기 위한 욕심으로, 가난 때문에, 병고 때문에, 잘 살아야지, 위대하게 돼야지, 이런 것 때문에 이 공부 하지 마세요, 진짜. 진짜! ‘안 돼!’, ‘이거는 어떠한 억겁에 처해 있다 하더라도 내가 안 된다면 안 되는 거지!’ 하란 말입니다. ‘안 돼!’ 하면 그냥 안 되는 거지. 나도 이렇게 왁 소리를 지르고 그랬어요. 그러곤 그냥 손을 번쩍 쳐들어서 그냥 쳤단 말입니다. 야, 이게 진짜 깊은 물이 되기 때문에 큰 배가 뜰 수 있고, 큰 배가 뜰 수 있기 때문에 거기 중생들을 다 태울 수 있는 것입니다.

관해도 안 되는 게 많아요

질문 : 마음공부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만 나름대로 관하면서 하고 있습니다. 근데 관하면 되는 것도 있는데 안 되는 것도 많아서 약간 실망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되는 것도 안 되는 것도 법이라 하지만 아직은 좀 되는 쪽으로 기대를 하게 됩니다.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답변 : 안 되는 것도 놓아야 됩니다. 일부러 지금 공부 가르치느라고 자꾸 시험을 하는데 왜 자꾸 속습니까. 안 되는 게 어디 있어요, 내가 없는데. 아, 내가 공했는데 안 되는 게 거기 붙을 게 어디 있으며 되는 게 붙는 게 어딨느냐 이겁니다. 그대로 내가 그냥 당당하게 하는 거죠. 여북하면 일시무시일이고 일종무종일이라고 그랬나요. 그리고 80종호라 그랬나요. 사무 사유를 한손에 쥐고 말입니다. 그대로 내가 종 칠 때 소리 나는 거지 뭐, 어딨느냐 이겁니다.

예를 들어서 아는 게 나오더라도 그냥 좋다 하지도 말고 ‘아, 거기서 하는 거지.’ 무조건 한 일 년 반 내리 그냥 놔 버려야 돼요. ‘거기서만….’ 날더러 그전에 이랬어요. 이 스승이 날더러 ‘죽어야 너를 본다.’ 아, 이런단 말이죠. 그래서 죽기 위해서 차바퀴로 들어갔어요. 새벽에 떠나는 걸 알고요. 무척 큰 차니까 뭐, 한 번만 넘어갔다 하면 창자가 꿰지든지 뭐가 나지 않겠어요? 그래서 까맣게 입고 바퀴 밑에 들어가서 숨어선 이리로 넘어가게끔 딱 드러누웠는데 그 차가 안 가요. 반드시 떠날 텐데도.

그러니까 ‘죽어야 너를 본다’ 그래서 죽으려고 했더니 내가 죽는 게 아니라 마음이 죽어야 된다는 얘기예요. 그러니까 그 나를 형성시킨 그 주인이 바로 제가 지금 들이고 내고 있는데 왜 자기가 거기 덧붙이기로 안 되느니 되느니, 덧붙이기로 그러느냐고요. 남 일하는 데, 안 되든지 되든지 왜 상관을 하느냐 이 소리에요. 그러니 ‘내가 살았다’ 이 소리 아닙니까. 아주 거기에 그냥 아비를 찾아서, 자식은 아비를 찾아서 그냥 거기 혼합이 돼야지 어떻게 그렇게 자식 따로 아비 따로 이렇게 있겠느냐 이겁니다.

이런 게 있어요. 두 가지 여건이 있습니다. 한 가지는 거기다 맡기는 일이 되고, 한 가지는 안 되는 일이 있다면 ‘아, 거기서밖에 해결을 못 하지. 거기서 하는 일인데, 뭐.’ 속마음으로. 그렇게 하면 그냥 놓는 게 되지요. 또 ‘아, 나를 가르치기 위해서 이렇게 또 시련이 오고 이런 게 오는구나. 아이, 감사해. 주인공, 감사해.’ 아버지라도 그래도 좋고 뭐, 엄마라 해도 좋고. 기르는 건 엄마고 낳는 건 아버지거든. 그러니 기르는 거나 낳는 거나 뭐 다른 게 있느냐 이겁니다. 그러니 어머니도 아버지도 둘이 아니다. 정자 난자가 둘이 아니에요. 하늘과 땅이, 천지가 둘이 아니듯이. 그걸 한데 합쳐서 자기는 거기에다가 주인공이라 그러는 건데, 주인공만이 내 아비다 이겁니다. 자기 아비에요, 그냥. 천지를 한데 합쳐서 자기 아비에요, 그냥. 공했으니까. 전체가 공했잖아요, 자기까지도. 이름해서 주인공이다 이겁니다, 그것도.

그러니 ‘거기에서, 주인공 아닌 참주인공이 이렇게 하고 가는데 참 감사합니다.’ 또는 ‘거기서밖에 해결 못 하지. 안 되는 것도 거기서 하는 거니까 되게 하는 것도, 빨리 돌려서 되게 해 주는 것도 거기다.’ 이렇게 하는 거밖엔 없어요. 모두 일체 다 거기다 맡겨 놓으세요. 아, 물을 만방으로 갖다 바다에 둬 봐요, 두드러지나. 한 바다에요. 그러니까 무조건, 그저 못난 척하고 그저 모자라는 척하고 그냥 무조건이에요.

입이 거칠어 가족들 마음을 상하게 해요

질문 : 저는 마음은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 입이 좀 거칠어서 가족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이 자꾸 생깁니다. 안 그러려고 다짐을 하는데도 또 거친 말이 툭툭 튀어나오니 이 습을 녹이기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어찌하면 좋을까요?

답변 : 한마음으로 돌아가는 그 능력은 아주 광대무변합니다. 여러분 앞에 무수한 능력이, 바로 동심으로서의 동력이 움죽거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인공이라는 그 자체는 동력이 움죽거리고 있고, 발전소에서 전기가 나가듯이 그렇게 동력에서 나가는 그 전기의 발전소에 가설된 우주의 법계는 무수한 우리의 마음과 마음들이 전달이 되는 것입니다. 전달이 됨으로써 좋게 불을 켜면 좋은 것이고 나쁘게 생각을 한다면 나쁘게 돌아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마음을 항상 편리하고 좋게 생각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마음 한 번 잘못 쓰면 구덩이에 빠지고 마음 한 번 잘 쓰면 구덩이에서 나올 수도 있느니라.” 했습니다.

여러분이 그냥 무심코, 자녀들한테도 그렇고 남편한테도 그렇고, 남편은 여자한테 그렇고 그냥 무심코 “이, 똥 같은 거.” 또는 뭐, 예전에 남들이 하는 소리 들었습니다. “에이, 염병을 하고 땀을 낼 년.” 뭐, “에이, 나가서 뒈져라.” 요새도 그럴는지 모릅니다. “나가서 저런 건 그냥 어휴, 뒈졌으면…. 차라리 안 봤으면….” 하고 이러한 욕들을 하시는데 절대로 그런 욕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왜? 내가 가장 내 몸과 같이 아끼고 내 마음같이 생각하고 내 아픔같이 생각하는 한가족이, 바로 짚단이, 바람이 불면 짚단이 날아갈까 봐 같이 의지하고 같이 동여매서, 어떠한 비바람이 불어도 그것을 같이, 쓰러져도 같이 쓰러지고 살아도 같이 살자고 맺어 놓은 인연들을 어떻게 그렇게 무심하게 그냥 그렇게 욕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또 바깥으로 나가게끔 악을 쓸 수가 있겠습니까.

남자나 여자를 막론해 놓고 바깥으로 그 목소리가 나가게끔 된다면 벌써 악의적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절대로 악쓰는 법, 욕하는 법 그 모두를, 상 찌푸리고서 마음을 괴롭히는 법, 이런 것을 다 아마도 주인공에다 놓고 녹여야 될 것입니다. 그것은 왜 그럭하면 안 되는가 하면, 내 한생각의 마음과 더불어 말 자체가 바로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모릅니다. 자기는 무심코 생각하고 한번 욕한 것이 그대로 이행이 될 때 얼마나 무섭습니까? 그것은 자기가 긁어서 부스럼을 만들어서 피가 나게 하고 아픔을 자기가 당하는 법이나 똑같습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무심코 말하고 그냥 그것이 그 후에 다가오는데 그게 거기서 오는 줄은 모릅니다. 이 마음 한 번 잘못 쓰고 말 한 번 잘못 쓰는 거, 주워 담을 수는 없습니다.

부처님의 법이 얼마나 엄중하고 그 법이 준엄한지, 옛날에 어느 인군이 말입니다, 그 나라의 신하들을 데리고 순찰을 도시다가 어느 절간엘 들어섰습니다. 그랬는데 그 절간에 들어서자마자 신하들은 그 중이라는 것이 인군에다 대면 그 뭐, 아무것도 아닌 걸로 보일지 모르지만, 이 우주의 섭류를 공부하신 그분의 그 진심한 도심은 누구도 감히 거기에 응접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법당에 앉아 계신 그 스님더러 하는 소리가, 인군이 납시는데 어떻게 신하가 와서 배례를 안 하느냐고 하면서 “냉큼, 이 중 놈!” 하고 욕을 했습니다. “중 놈이 제 것이 나가서 배례를 안 하다니!” 하고 당장 목을 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스님께서는 앉아 계시다가 “조건이 하나 있다.” 했습니다. “무슨 조건이냐?” 하고 신하는 아주 도도하게 아만을 부렸습니다. 그랬으나 이 스님께선 조용히 한마디 했습니다. “내가 한 발짝을 떼어 놓는 대로 일 년이 흉년이 드는데도 내가 일어서야만 하겠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니깐 어쭙잖은 소리 하지도 말라 하는 식으로 배척을 했습니다. 당장 그런 나발 같은 소리, 지금으로 치면 나발 같은 소리 하지 말고 일어나서 나가서 얼른 배례 해라 했습니다. 그럴 때 잠자코 그 스님은 “그러면 나 아닌 내가 할 수도 있지.” 하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한 발짝 두 발짝 떼어 놨습니다. 그랬는데 일곱 발자국을 떼니까 벌써 그 인군은 거기 앞에 닥쳤더랍니다.

그런데 그때에 마침내 신하가 있다 하는 소리가 “배례를 하라! 인군이 오셨는데 중 놈의 새끼가 무슨 잔소리가 있느냐?” 했습니다. 그러자 그 스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만약에 이 몸을 한 번 꾸부린다면 7년에 일곱 발자국, 7년을 가뭄이 들어서 이거는 속수무책으로 이 법에 거역은 못 하리라.” 했습니다. 그래도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천둥 같은 호령을 하기를, 신하가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자 그이는 “그럼 그렇게 하지.” 하고선 또 절을 했습니다. 한 번 구부렸습니다.

그러고선 돌아서서 그 해부터 흉년이 들기 시작을 했습니다. 일 년이 흉년이 돼, 이태가 흉년이 돼, 삼 년이 흉년이 되니까 있던 거는 다 먹고 인제는 땅이 쩍쩍 갈라져서 도저히 농사도 지을 수 없고 백성들이 다 죽게 생겼습니다. 그래서 인군은 그 사실을 모르는 채, 신하들을 다 불러서 “이 짐이 공덕이 없어서, 덕이 없어서 이 백성들이 이렇게 고생을 하니 이 노릇을 어떻게 하면 좋은가? 그러니 제를 지내야 비가 오려나.” 하고서 만수성찬을 차려 놓고선 기우제를 지내라고 했습니다.

그랬는데 그 신하가 가만히 생각을 하니까 그때 삼 년 전의 일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도 어디 그럴 수가 없어서 제를 지내도 비는 안 오고 칠 년이 닥쳐도 안 오기 때문에 백성들은 다 죽게 되고, 죽는 사람이 절반이었습니다.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깐, 인군은 인군대로 다시 모이라고 해서 또 기우제를 지냈는데도 비는 안 왔습니다. 그러자 그분이 얘기를 했습니다. 사실이 이만저만하고 이만저만했는데 그때 당시에 이렇게 이렇게 됐었노라고 하니까 임군이 호령을 했습니다. 왜 진작 말을 하지 않고 이렇게 이날까지 두고 이 백성들이 다 굶어 죽게 만들고 이렇게 불충을 저질렀느냐고 호령을 했습니다. 호령을 하면서 자기가 손수 임군의 의복을 다 벗고 사복을 하고 그냥 그 절에 가서 삼배를 깍듯이 하면서 아주 간청을 했습니다. 잘못했노라고 사죄를 하니 그 스님은 거기에서 고만 그 법을 풀었더랍니다.

이것은 지금 현재에도 법에 의해서 저촉을 받은 사람이 5년 징역을 받았든지 10년 징역을 받았든지, 그것은 그 서류를 감히 찢어 버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거보다 더 무서운 것은 보이지 않는 그 세계의 마음의, 그 우주간 법계의 법이라는 것은 정말이지 그것은 어느 누구도 빼도 박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생각에 마음이 누그러지니 그 우주의 그 모든 일체 신들이 다 한마음이 돼서 바로 그 법을 풀었더랍니다. 그래서 그날부터 비가 오기 시작을 해서 풍년이 들고, 또 어차피 죽은 거는 죽고 사는 거는 살듯이 그렇게 됐던 그 백성들은 또다시 먹을 것이 풍족하게 농사를 짓고, 그래서 그 나라의 백성을 잘 이끌어 가지고 갔다는 얘깁니다. 그래도 그 임군은 지혜가 있었던지 그렇게 했더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니 부처님 법이 얼마나….

지금 왜 내가 이런 얘기를 하느냐 하면, 모든 위 부처님이 계시다 하더라도 얕게 보지 말고, 나와 같이만 생각하고, 내 아픔같이만 생각하고, 내 몸같이만 생각하고, 내 마음같이 생각하고, 항상 겸손함을 가지고 항상 검소하게 사는 그 아리따운 마음, 청정한 마음으로서 그 불심을 진심으로 가질 수 있다면, 우리가 다 평전하게 우주에, 참근본으로서의 한마음으로 돌아가는 그 능력이 바로 여러분 앞에 주어지지 않나, 이렇게 봅니다. 그리고 그 마음 한 생각, 한 말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여러분이 잘 깊이깊이 한번 다시 옷깃을 여미면서 생각해 보시기를 빕니다.

부처님 마음과 여러분의 마음이 달리 있는 거는 아닙니다. 부처님의 마음은 전 우주의 법계를 다 쥐어도 쥔 사이 없이 다 한마음으로 돌아가는, 그 한마음이라는 언어도 붙지 않는 그 자리에 바로 이렇게, 어떤 것도 세울 게 없이 세우시면서 당당히 흐르고 있는 여러분의 마음입니다. 그러니 생각 한 번 잘못하고 말 한 번 그냥 잘못하면 그렇게 자손들이라도 잘되지 못하게 되죠. 바로 뿌리가 한쪽이 썩는다면 싹도 한쪽이 썩듯이 그렇게 한다면 되겠습니까?

시부모를 친부모처럼 의지하고자 했는데

질문 : 저는 어릴 적 고아원에서 자라서 그런지 부모님이 계신 친구들이 너무 부러웠어요. 그래서 결혼하면 시부모님을 내 친부모님처럼 의지하고 살고 싶었고, 마음공부를 하니까 어느 정도 자신도 있었는데, 살다 보니 그게 마음처럼 잘 안됩니다. 시부모님이 저를 못마땅해하시고 나무라시면 남편도 덩달아 부모님 편을 드니 저는 남편이 더욱 미워집니다. 얼른 한마음으로 평온하게 살고 싶은데, 자꾸 관하고 돌려 보지만 마음의 힘이 약한지 크게 달라지지 않습니다.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답변 : 마음 안으로 두고 항상 낱낱이 그 마음으로 돌리세요. 자기 마음 안으로 돌려요. 그러면 그것이 다 해결 날 때가 옵니다. 고집멸도 사제법이 결국은 이런 거예요. 고가 고가 아니고 인간이 참인간으로 벗어나기 위한 과정이라고 봐야 돼요. 그러면 지금 댁이 시어머니 시아버님을 모시고 이렇게 고생을 하는데 억압적인 말을 하고 당치도 않은 말로 모함을 해서 참, 남편한테 매도 맞고 별의별 일 다 있지 않겠어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바로 내 탓이지 남의 탓이 아니다. 부모의 탓도 아니요, 남편의 탓도 아니니, 내 주인이 바로 그쪽으로 연결을 시켜서 나에게 부딪치게 해서 나를 다지고 다져서 둥글게 만들기 위한, 모진 거를 없애게 하는 그 과정이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면 바로 그것이 도를 이루는 길입니다.

우리가 초식을 심어서 자랄 때까지는 그냥 길러야지 별수 없거든요. 아무리 따 먹을 때가 급박하고 아무리 그것을 빨리 추수를 해서 먹어야만이 우리가 살 수 있을지라도 ‘이거 언제 자라서 먹을 수 있을까. 또 언제 길러서 내 낭군 삼을까.’ 하하하. 노랑두 상투 말입니다. 옛날에 그런 속담의 말이 있죠. 그렇게 해도 어느 땐가 가야 그것이 익어 들어간다고요.

그러니 당신이 익음으로써 그쪽도 익어요. 당신이 그렇게 급한 마음으로 가기 때문에…, 급한 마음도 꼭지가 덜 떨어져서 급하거든. 꼭지가 덜 떨어졌음으로써 그쪽도 그렇게 자꾸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 당신이 하루바삐 꼭지가 떨어져서 익음으로써 그쪽도 그게 멎어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모든 건 자기 탓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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