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정법과 사법

“여러분, 여러분들이 어쩌다 노장들의 입속말을 듣고 이것이 참된 도라 여겨 불가사의하다 하고, 나는 범부의 마음이라 감히 저 노숙(老宿) 도를 헤아릴 수 없다 하나니. 눈먼 바보들이여! 그대들 일생을 이따위 견해를 만들어 멀쩡한 두 눈을 못 쓰게 만들어 버리느니라. 춥다고 부들부들 떠는 것이 꽁꽁 언 얼음 위의 당나귀나 망아지 같구나. 그러면서 ‘나는 감히 선지식을 헐뜯을 수 없나니 구업이 생길까 두렵도다.’ 하느니라.

여러분, 무릇 큰 선지식이라야 비로소 감히 부처와 조사를 헐뜯고 천하를 시비하며, 삼장의 가르침을 배척하고 철없는 소아들을 꾸짖고 욕하며, 역순(逆順)의 경계를 향해 제대로 공부하는 사람을 찾고자 했느니라. 그래서 나는 12년 동안을 될 만한 한 개의 업성(業性)이라도 찾으려 했지만 겨자씨만큼도 얻지를 못했느니라. 만약 새색시 같은 선사라면 절에서 쫓겨나 밥도 얻어먹지 못할까 봐 불안해 편하지 못했을 것이니라. 자고로 선배들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믿어주지 아니해 쫓겨나곤 했으나 쫓겨난 뒤에 비로소 귀한 사람인 줄 알게 되었느니라. 만약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다 무조건 인정해 준다면 무엇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사자가 한 번 포효하면 여우의 뇌가 찢어진다’ 했느니라.”

‘도가 같아야만 알아볼 수 있다(同道)方知)’는 말이 있다. 수행이 덜 된 사람들은 수행이 높은 경지에 이른 이들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하수들은 상수의 경지를 모른다. 그래서 어떤 것이 정수(正手)인지 모르고 잘 속게 된다고 한다.

이 장에서 임제가 하는 말은 공부하는 사람이 남의 말에 현혹되어 속지 말라는 말이다. 내 공부가 빈약하면 남의 말에도 잘 속고 그릇된 지견을 만들어 사견에 빠지는 수가 많다는 것이다. 임제는 이런 사람들을 눈먼 사람들이라 혹평을 하고 있다. 법을 바로 볼 줄 모르니까 눈이 멀었다 하는 것이다.

대혜 종고의 어록인 〈서장(書狀)〉에도 ‘할안한(球眼漢)’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임제록〉의 ‘할루생(球屢生)’과 같은 말로 눈먼 사람이라는 말이다. 눈먼 사람이 해를 못 보는 것처럼 정법을 바로 보는 바른 눈을 갖추지 못했다고 비판하는 말이다. 대혜는 간화선(看話禪)이라야 옳은 수행법이라 주장하고 묵조선(?照禪)을 비판하면서 묵조사사배(?照邪師輩)의 무리들이 남의 눈을 멀게 한다 하였다. 또 사법(邪法)을 가르치는 사사배(邪師輩)들이 도마죽위(稻麻竹葦) 같다 하였다. 중국 선종사에서 5종으로 나눠진 선종들이 각각 내세우는 종풍(宗風)에 차이가 있어 온 것처럼 종지를 바로 세워 정법 선양을 하는 것도 방편이 달랐다. 궁극의 깨달음을 향하고 견성(見性)을 목적으로 하는 선(禪)이지만 임제는 임제 가풍이 있고 스승 황벽은 황벽 가풍이 있는 것이다. 시대와 곳에 따라 방편상의 응용 실천이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임제의 시대인 9세기와 대혜의 시대 12세기에도 이와 같은 비판이 있었던 것을 보면 선수행의 세계에도 언제나 정법과 사법의 논란이 끊어지지 않은 모양이다.

임제의 말 가운데 서글픈 독백이라 할 수 있는 말도 나와 있다. 공부인을 찾기 위하여 12년 동안 눈여겨 살펴보았으나 찾지 못했다는 말이다. 임제가 찾는 공부인은 무엇보다 불조(佛祖)를 능가할 수 있는 기백이 있는 사람이다. 앞 장에서 말한 ‘곳에 따라 주인이 될 수 있는 사람’이다. 과감히 자기 허울을 벗고 진실한 성품을 보여 줄 수 있는 사람이다.

〈선가구감〉은 임제의 가풍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임제의 가풍은 맨손에 단칼로 부처도 죽이고 조사도 죽인다. 고금의 현요(玄要)를 가리고 용과 뱀을 주인과 손님으로 시험한다. 금강보검을 쥐고 나와 대와 나무에 붙은 정령을 쓸어내고 사자의 위엄을 떨쳐 여우나 이리의 간을 찢는다. 임제종의 가풍을 알려 하는가? 푸른 하늘에 벼락이 치고 평지에 파도가 일어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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