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닦음의 길 20

대화(dialogue)란 서로 다른 두 가지(dia) 방식(logos)이 만나서 나누는 이야기다. 그렇기 때문에 대화는 기본적으로 통하기가 쉽지 않다. 진보와 보수 간에 소통이 어려운 이유도 삶을 바라보는 방식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때로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양식이 만나서 묘하게 소통하는 경우도 있다. 이번에 살펴볼 염불과 선이 그렇다. 염불은 아미타불의 본원력에 의지해서 서방정토에 낳고자 하는 타력적 신앙이지만, 선(禪)은 치열한 자기 수행을 통해 깨침에 이르는 자력적인 길이다. 전혀 다른 성격의 두 수행체계가 어떻게 갈등이 아니라 멋진 화음을 만들어낸 것일까?

흔히 정토신앙은 말법시대(末法時代)에 유행하는 신앙이라고 일컬어진다. 불교에서는 붓다의 입멸 후를 세 시기로 구분하는데, 바른 가르침이 펼쳐지는 정법시대(正法時代)와 정법은 사라지고 형태만 남게 되는 상법시대(像法時代), 그리고 오탁악세(五濁惡世)의 말법시대가 그것이다. 세상이 오염되고 중생들이 죄를 많이 짓는 말법시대에는 아미타불의 본원력에 의존하는 염불수행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중국에서는 남북조의 혼란기를 거치면서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면 정토에 태어난다는 인식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처럼 정토신앙이 대중화되면서 새로운 움직임 또한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들은 아미타불과 서방정토가 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의 자성(自性)이라고 인식하였다. 유심정토(唯心淨土) 자성미타(自性彌陀)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아미타불과 서방정토를 내 마음으로 압축해서 해석한 것이다. 이는 곧 ‘마음이 부처(心卽佛)’라는 선불교의 핵심을 염불의 입장에서 수용한 것이다. 선(禪)에서도 정토와 아미타불이 자성의 또 다른 표현이라면 이를 받아들이는 데 별다른 문제가 없게 된다. 한국 선불교를 대표하는 보조 지눌이나 태고 보우(太古 普愚, 1301~1382), 서산 휴정(西山 休靜,1520-1604) 등도 이러한 입장에서 선과 염불의 하모니를 연출하였다.

그런데 염불과 선을 ‘하나’로 더욱 끈끈하게 묶어주는 수행체계가 있다. 염불선(念佛禪), 혹은 염불화두선(念佛話頭禪)이 바로 그것이다. 이 수행법은 한국불교 근현대의 고승으로 알려진 청화(靑華, 1924~2003) 선사가 주창하면서 널리 알려지기도 하였다. 화두를 참구하는 간화선과 아미타불을 염하는 수행체계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묘하게 소통(疏通)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염불선의 핵심은 ‘염불하는 놈이 누구인가(念佛者是誰)?’ 하고 스스로 돌이켜보는 데 있다. 다시 말하면 염불 자체가 화두의 주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염불하는 자신을 간절하게 참구하다 보면 어느 순간 자성미타가 눈앞에 나타나 견성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러한 염불선은 〈육조단경〉 덕이본으로 유명한 몽산 덕이(蒙山 德異, 1231∼1308)의 영향이 크다. 그는 여말선초 우리 불교계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그에 의하면 염불하는 이가 누구인지 간절한 마음으로 반조(返照)하다 보면 어느 순간 아미타불을 친견하게 된다고 하였다. 염불이 곧 화두가 되는 것이다. 고려말 태고 보우 역시 당시 유행하던 ‘무(無)’자 화두 대신 아미타불을 참구하라고 강조하였다. 그렇게 수행이 깊어지면 어느 순간 내 마음이 곧 아미타불임을 깨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통은 조선시대에도 계속 이어지는데, 특히 서산대사는 염불과 선이 하나라는 입장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그는 〈심법요초(心法要抄)〉에서 “참선이 곧 염불(參禪卽念佛)이며, 염불이 곧 참선(念佛卽參禪)”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염선회통(念禪會通)의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국불교의 특징을 회통에서 찾는 이들이 많다. 서로 다른 사상들이 만나서(會) 대립과 갈등이 아니라 높은 차원에서 하나로 통(通)하는 성격을 지닌다는 것이다. 선(禪)과 교(敎)가 그랬던 것처럼, 염불과 선도 그렇게 만나 하나가 되었다. 이러한 수준 높은 만남은 상대의 가치와 특성을 이해하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다. 특히 진보와 보수, 남과 북, 동과 서 등 대립과 갈등이 심해지고 있는 오늘날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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