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벌’ 도교, 불교와 통섭하다 ?

불교, 中자생종교 도교와 경쟁?
‘노자화호·비법분경’ 마찰산물

宋代부터?'佛·儒·道' 교류 시작
서로 흠모하며 숭배 대상 교체
19세기 韓사찰 벽화에 등장도

마곡사 대광보전 벽화 부분. 도교의 팔선(八仙)을 그린 벽화다. 왼쪽 지팡이를 짚고 있는 신선이 이철괴, 중앙에 두꺼비와 놀고 있는 신선이 해섬자다. 오른쪽 역시 팔선 중 한 명으로 추정되나 누군지는 불분명하다.

중국 도교의 불교 탄압
중국 역사에는 ‘3무1종(三武一宗)’으로 회자되는 사건이 있다. 네 차례의 대표적인 불교 탄압, 즉 ‘법난(法難)’을 가리킨다. 그 규모와 후과가 너무 컸기 때문에 불교사뿐만 아니라 ‘역사’의 기록에 남아 있다. 그런데 3무1종 중 가장 폐해가 컸던 세 번의 법난에는 모두 도교 혹은 도사(道士)들이 연루되었다. 

3무1종은 모두 왕의 이름을 딴 것이다. 북위(北魏)의 태무제(재위 423~452), 북주(北周)의 무제(재위 560~578), 당(唐)의 무종(재위 840~846) 등 무(武)자가 들어가는 세 명의 왕과 당나라 이후의 오대시대(五代時代)에 있었던 후주(後周)의 세종(재위 954~959) 시대를 가리킨다.

북위의 태무제는 한때 불교를 신봉하기도 했지만 스승이었던 최호(崔浩) 그리고 도사(道士) 구겸지의 권유로 도교로 개종한다. 당시 기록에는 북위에는 불교 사찰이 약 3만 개, 승려가 약 300만 명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태무제의 도교 신봉 정책에 따라서 50세 이하 출가자는 모두 환속해야 했고 사찰은 몇몇을 남기고는 모두 파괴됐다. 중국 역사에 기록된 도교의 첫 번째 불교 탄압이다.

북주의 무주에 의한 법난은 유교를 신봉한 무주의 정책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법난의 초창기 주동자는 도교 도사인 장빈(張賓)이었다. 하지만 장빈 역시 제발에 걸려 넘어졌다. 불교를 ‘정리’하자 그 다음에는 ‘도교’가 타파 대상이 됐기 때문이다.  

당 무종 때 폐불은 흔히 ‘회창폐불’이라 불리는데 어느 때보다 피해가 컸다. 여기에도 배후에는 도사가 있었다. 황제의 신임을 얻고 있던 도사 조귀진(趙歸眞)이 도교 신앙이 두터운 무종을 끌어들여 폐불을 사주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후주의 세종 때 폐불은 앞의 세 번의 법난과 비교하면 미미했다. 당나라 이후 법제로 정해져 있던 불교관리 정책을 재확인하고 철저히 시행이 되었는지 점검하는 차원이었다. 도사(道士)의 개입도 없었다. 

법난의 역사는 불교가 거쳐 간 어느 지역에서도 있었던 역사다. 인도에서도 수차례 있었고 중국, 티베트, 스리랑카 등 불교가 발 딛은 여러 나라에서 반복됐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도교VS불교 그리고 ‘신화’ 조작
앞에서도 살펴봤지만 중국에서 불교가 주로 경쟁하던 종교는 다름 아닌 도교였다. 도교는 유교와 함께 중국에서 자생한 토착 종교였다. 유교를 종교로 보지 않는 학자들도 많기 때문에 사실상 중국에서 일어나 세계로 퍼진 종교는 도교가 유일하다고 볼 수도 있다.

중국에서 도교가 인기가 있었던 이유는 두 가지 정도다. △고대부터 중국인들이 믿었던 애니미즘에서 파생된 여러 종류의 민간 신앙에 바탕을 두고 있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 사이에 인기가 있었던 여러 ‘인물’들이 신선으로 등장시켰다. 프로 스포츠의 ‘올스타전’을 방불케 한다. 물론 불교식으로 말하면 ‘응병여약(應病與藥)’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여하튼 자생종교인 도교와 외래 종교인 불교가 경쟁을 하는 형국이 오래 계속되다 보니 ‘양측’에서 만들어낸 전설과 신화가 켜켜이 쌓였다. 대표적인 게 도교 측에서 만들어낸 ‘노자화호설(老子化胡說)’과 불교 측에서 만들어낸 ‘비법분경(非法焚經)’이다.

노자화호설은 노자가 오랑캐(胡)들의 나라인 인도로 건너가 석가모니 부처님으로 다시 태어나 오랑캐들을 위해 법을 펼쳤다는 주장이다. 사실상 도교와 불교가 근원이 같다고 하는 이런 주장은 불교를 억압할 목적으로 도교 측에서 만든 것이라는 주장이 일반적이다. 

불교 측에서 만들어냈던 ‘비법분경’ 역시 흥미롭다.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자 도사들이 나섰다. 어떤 기록에는 불교가 전래된 지 4년 후쯤인 후한 명제 때 얘기라고 한다. 5악(五嶽, 태산·화산·항상·형상·순산)의 도사들이 주축이 되어 황제에게 불교를 받아들이지 말 것을 주청한다. 그냥 받아들이지 말라고 하기에는 자신들도 군색했는지 ‘대결’을 제시한다. 

도교와 불교의 성물을 제단에 쌓아놓고 불을 질러 타지 않는 쪽이 승리한 것으로 하자는 내기였다. 결국 황제의 윤허로 보름에 맞춰 불교가 전래되었던 백마사 남문 앞에 단이 쌓인다. 도교의 단에는 신상과 경전이, 불교의 단에는 불상과 경전 그리고 사리가 올라갔다. 

도교 측에서는 북두칠성에게 제사하는 의식을 통해 불을 억제하기를 기원하며 불을 붙였으나, 타오르는 불길을 막을 수 없어 경전이 검게 탔다. 그러나 불교 단에서는 사리가 방광을 하면서 불기운을 눌러 경전이 노랗게 변색돼 타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껏 전통적으로 도교의 경전이 검은색인 이유 그리고 불교의 경전이 누런색인 이유다. 물론 ‘기록’으로 남아 있긴 하지만 이런 건 믿어도 그만 안 믿어도 그만이다. 

이렇게 지지고 볶고 하는 싸움은 13세기경까지 계속된다. 대략 송나라 시기 때다. 하지만 이때 이후로 불교와 도교는 급격히 가까워진다. 사실 이때는 불교와 도교뿐 아니라 불교와 유교 그리고 도교와 유교까지 적극적으로 사상 혼합이 일어났던 때라고 볼 수 있다. 엄밀히 말하면 도교는 선종과 성리학을 적극 수용하기 시작했고, 송대 신유학은 불교가 다루던 마음의 문제와 심성론을 채용하기 시작했다. 불교도 적극적이었다. 송대 장상영이 쓴 〈호법론〉이 상징적이다. 유·불·도 삼교 합일을 토대로 불교를 변호한 것이다.

논산 쌍계사 대웅전 벽화 부분. 불사의 여신 서왕모가 그려져 있다. 서왕모는 도교에서 최고의 여신으로 추앙받는다.

도교와 불교의 ‘베끼기’
물론 송대로 추정할 수는 없지만 도교와 불교가 서로 흠모하고 숭배하는 대상을 교체한 예를 한 가지씩 살펴보자. 

도교에서 숭상하는 주요 신 혹은 신선 목록에는 낯설지 않은 이름이 여럿 있다. 아미타불, 미륵불, 정광불, 관음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 달마 조사 등이다. 심지어 석가모니 부처님의 이름도 있다. 물론 도교의 주요 신인 옥황상제나 삼관대제보다는 한참 격이 떨어진다. 

흥미로운 건 도교의 신들은 대개 탄생한 날과 죽은 날을 표기하는데 각각의 부처님들에도 탄생일을 표기했다는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탄생일은 당연히 4월 8일이다. 그런데 도교의 주장에 따르면 아미타불은 11월 17일 생, 미륵불은 1월 1일 생, 정광불은 1월 5일 생, 관음보살은 2월 28일 생이다. 근거가 무엇인지에 대한 자료는 찾지 못했다. 아마 남겨진 자료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물론 중국에서의 이야기다. 관우는 도교에서 무신이자 재물신으로 추앙받는다. 인기가 얼마나 높았는지 청나라에는 관제묘(관우의 사당)가 없는 마을이 없었다고 할 정도였다. 관우는 불교에서도 모셨는데 그 이름이 관제보살이다. 

물론 아무런 불교적 기반이 없었던 건 아니다. 〈삼국지〉에서 관우는 사후에도 원한을 잊지 못하고 애마인 적토마를 타고 다니며 자신의 머리를 돌려달라고 나타났는데 옥천산에 나타났을 때 보정 대사로부터 “그렇다면 네가 죽인 수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는 말을 듣고 크게 깨달았다는 대목이 나온다. 소설 속의 이야기가 절로 들어온 경우다. 

이밖에 우리나라에서는 그 존재가 희미하지만 중국에서 특히 추앙되는 ‘관음’이 있다. 바로 ‘송자관음(送子觀音)’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삼신할미’ 정도 되는, 아이를 점지해 주는 관음이다. 그런데 그 원류를 좇다 보면 송자관음은 중국 도교의 신선인 ‘송자낭랑’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불교와 도교는 서로의 보살과 신선을 필요할 때마다 맞트레이드하며 교류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사찰로 온 도교의 신선
한반도에서도 도교의 뿌리는 깊다. 고구려 때는 국교의 지위까지 상승하기도 했다. 나중에는 우리 고유의 신선사상과 결합해 꽃을 피운다. 물론 유자(儒者)들은 드러내 놓고 반대했다. 하지만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신선 이야기와 그림은 넘쳐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넘쳐난 이야기와 그림이 사찰에 출현하기 시작한다. 대개 19세기를 전후한 무렵이다. 대개 사찰 건물 벽체는 100년의 기간을 두고 수리를 하게 되는데 이때 벽화도 대개 새로 그리게 된다. 이때 물고기나 포도 같은 그림들과 함께 곳곳에 도교의 신선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물고기나 포도는 다산이나 부귀를 상징하는 그림들이니 민중의 염원을 수용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도교의 신선들이 왜 사찰 벽화에 등장하게 됐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여하튼 조선 후기 불전으로 유명한 마곡사 대광보전 내부에는 도교의 팔선 중 이철괴, 유해섬 등의 모습이 남아 있다. 논산 쌍계사에는 서왕모의 모습이 남아 있다. 이밖에 몇몇 사찰은 조선 후기 그려진 도교의 신선들이 벽화로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런데 사실 일반인 그리고 절에 무시로 출입했다고 하는 사람들도 벽화에 그려진 신선을 ‘불교 인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불교에도 워낙 다양한 부처님과 보살 그리고 신중이 있으니 그냥 그 중에 한 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꼼꼼하게 살펴보면 의외로 사찰에 사는 신선들은 꽤 많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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