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깨달음(통찰)과 변화

남과 비교, 차별로 이어져
원망은 적대감으로 표출돼
독선은 에고의 욕망, 사랑
???????영적 성숙의 기회 열어야

17-1 넘어져 울고 있는 아이를 야단치는 부모가 의외로 많습니다. 자신의 속상함을 아이에게 푸는 경우들이지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아파하는 아이를 꼬옥 보듬어주고 얼마나 아프고 힘든지 어루만져 주고 실컷 울도록 허용합니다. 흐느낌이 되어 잦아들 때까지 충분히 놔둡니다. 그런 연후 어떻게 다쳤는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차근차근 이야기시켜 봅니다. 다그치지 말고 훈계하려들지 말고 처음부터 끝까지 사건이 분명해질 때까지 들어줍니다.

명상도 우선 나의 고통을 수용하고 인정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그동안 겪어온 아픔과 상처를 분명히 알아주고 포옹해주지 않고서 나를 사랑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남도 똑같이 고통을 겪었고 아픔을 가지고 있고 쉽게 상처받을 수 있음을 인정하게 되고 상대를 배려할 수 있게 됩니다. 나를 사랑한다면서 해치는 경우가 많은 것도 상처를 보듬어주지 않아서 상처를 보호하려는 방어 작용이 자신을 쾌락에 탐닉하게 하거나 극단적 행동을 하게 됩니다. 아이에게도 지나친 보호나 방치 또는 학대하는 행동으로 대하게 됩니다.

17-2 사랑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치우친 사랑(偏愛)과 보편적인 사랑(遍愛)입니다. 치우친 사랑은 에고가 강한 사랑입니다. 보편적인 사랑은 에고가 없는 사랑입니다. 에고가 강한 사랑은 나의 것과 나를 강조합니다. 내 가족을 사랑하고 내가 다닌 학교를 사랑하고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과 나라를 사랑하는 것 자체는 선악이 없습니다. 그러나 남과 비교하여 차별할 때 학벌 족벌주의, 지역 차별 민족차별, 인종 차별 종교 차별 등 갖가지 형태로 드러납니다. 이데올로기 전쟁 종교전쟁도 자신만이 옳고 선하다는 독선으로 살육마저 불사합니다. 나와 다름을 용납 못하는 것이 독재입니다.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욕망이 가득 찬 에고의 사랑입니다. 필연적으로 소외가 일어나고 상대방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상채기를 남기게 됩니다.

자식에 대한 편애는 그 결과가 끔찍합니다. 어린 시절 형제는 부모의 사랑과 관심을 차지하려고 갖은 방법을 쓰며 싸우기도 하지만 서로 인정하고 적응하는 법을 배우게 되는데 부모가 편애를 하면 이것은 어린 아이의 통제 범위에서 벗어납니다. 소외와 분리감, 고독감, 위축, 불신과 배신감, 세상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 차서 무차별한 적대감의 표출, 연쇄살인(무차별 총기난사), 아니면 절망적 자살이 일어납니다.

17-3 심리치료나 명상 수행에서 모든 것을 떠나 치유 평가 기준이 있다면 ‘변화가 일어났는가’입니다. 상담치료를 받았건 어떤 마음공부를 했건 그 사람이 질적으로 바뀌었는지 여부가 기준입니다. 관점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는 변화가 없다면 구두선에 불과하지요.

A양은 약물치료는 싫고 심리치료만 받고 싶다 하였습니다. 고교시절부터 우울해지고 외모에 대한 불만, 자기 비하, 자신감 결여, 부모와 학교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했지요. 공부는 싫고 하고 싶은 걸 해야겠는데 반대만 한다며 분개합니다. 끄떡하면 ‘죽고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하였고, 손목에 자해한 흔적들이 많았습니다. 대인관계가 힘들어 급우들과도 자꾸 틀어지고 좌절의 연속이었지요. 학교도 바꿔보았지만 새로운 환경에 적응이 어려워 자퇴하고 맙니다. 게임 등 쾌감을 주는 것들에 몰입해보지만 그 순간뿐 불안은 가중되고 점점 상황이 악화되어 희망이 안 보인다는 것이었습니다. 햇수로 2년 넘게 정기적 심리치료와 함께 명상을 배운 후 마음의 평온을 회복하여 마지막 면담 중에 스스로 토로한 말이 인상 깊습니다. 이제 자신의 얼굴을 보아도 밉상이 아니고 오히려 예쁜 편인 것같고 예전과 달리 얼굴이 밝고 편해졌다고 주위에서 말한답니다. 친구들도 자기를 만나는 게 편하고 즐겁다고들 하며 윗사람을 대할 때도 긴장하거나 눈치 보던 관계에서 자유로워졌다 하였습니다. 한 번은 자신의 호흡을 한 시간 정도 바라보았는데 너무 편하고 행복한 느낌을 받았는데 자신에 몰입된 느낌을 처음 경험하였다 하였습니다. 끄떡하면 상처받곤 하였던 다른 사람의 지적을 더 이상 비난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소외당할까 봐 겁나서 움츠리고 상대방에게 자신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방식에서 자신의 감정을 스스럼없이 드러내니 대인관계가 원만하게 이루어지는 것 같다 하였지요.

A양은 질적으로 변하였음을 자신도 주변 사람들도 인정한 사례입니다. 호흡 바라보기를 권유한 것은 A양이 심리치료 받기 시작한지 6개월째로 기억하는데 그동안 틈틈이 호흡을 바라보다가 최근에 몰입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질적 변화는 호흡 집중과 몰입에서 온 게 아닙니다. 통찰(깨달음)에서 비롯된 것이지요. 자신을 그렇게 졸라매던 것들에서 풀려난 것도 정서적 깨달음이 일어난 후입니다.

17-4 흔히 깨달음을 지적 깨달음으로 오인하는데 깨달음의 지혜는 머리에서 오지 않습니다. 진정한 깨달음은 회한과 사랑, 감사 등 깊은 감정의 충격과 함께 오므로 정서적 깨달음, 곧 가슴의 통찰이라 하지요. 고통의 의미를 알게 되면 고통을 불러 일으킨 대상(사람 또는 상황)에 대한 원망이나 증오는 물거품처럼 꺼지고 대신 용서와 사랑, 그리고 감사의 념이 솟아나게 됩니다. 상처를 준 사람들과 고난이 모두 은인이고 축복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분노도 이런 과정을 밟아서 비로소 분노가 사그러지는 것이지 그냥 참거나 이해만으로는 불씨만 눌러주는 효과밖에 없어서 또 바람 불면 재점화됩니다. 깨달음은 봉숭아 씨앗처럼 터집니다. 봉숭아 씨앗이 까맣게 영글기까진 수많은 시간과 햇빛과 수분과 영양분들이 필요하지요. 이러한 과정 없이 씨앗이란 결과는 몰록 일어나지 않습니다. 마치 산 속 깊은 골짜기 조그만 물부터 계곡물, 천과 시내, 그리고 작은 강줄기와 큰 강물이 되어 마침내 바다에 이르는 것과 동일하다 하셨지요.

17-5 고통의 상황은 우리로 하여금 정신적 영적 성숙의 기회가 왔음을 뜻합니다. 그동안 나름대로 행복하기 위해 열심히 뛰었건만 왜 이렇게 되었는지 찬찬히 돌아볼 기회가 온 것이지요. 상담자는 고통의 메시지를 잘 해석하여 전달할 수 있어야 하지만 그 시기와 방법이 문제입니다. 서둘러 설명하다가는 주입식 교육이 되어 깨달음 대신 지식만 늘게 되니까요. 내담자는 스스로 가지고 있는 능력을 보려하지 않고 현실(고통)에 안주하려 듭니다. 이러한 내담자를 새로운 상황 -자립과 성숙-으로 안내하는 길은 그를 존중하고 경청하고 그의 모든 표현을 공감적으로 수용하는 것입니다. 서두르지 않고 경이로운 눈길로 지켜보되 환자 스스로 자신을 잘 보고 해결책도 스스로 찾도록 기다릴 줄 알아야 하지요. 이러한 치료자의 태도를 통해 내담자는 부모나 세상에 투사했던 불만과 원망을 되돌리기 시작하며, 부모도 치료자도 대신 해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스스로 채우며 나아가 마침내 통찰에 이르게 됩니다.

17-6 명상 상담에서 가슴으로 들으라는 이야기를 자주 합니다. 가슴에 귀가 있는 것처럼 가슴으로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으라는 것이지요. 그것은 가슴으로 듣고 가슴으로 보고 가슴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머리로 이해하는 게 아닌 가슴으로 대상을 만나는 것이지요. 이것은 명상의 골자이기도 합니다.

대화에서 단절이 일어나는 것은 경청이 없고 자신의 이야기에 골몰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생각과 판단, 자신의 신념을 상대에게 피력하느라 상대의 이야기는 귓가로 흘리기 때문이지요. 내 생각(판단, 신념)이 개입되면 상대방을 온전히 바라볼 수 없고, 상대방을 온전히 들을 수 없습니다. 공감과는 거리가 한참 멀어지게 되지요. 다른 사람을 나의 요구에 맞게 변화시키려는 것이지요. 대화가 아니라 관계가 끊어짐을 경험하곤 하지요. 공감은 인간 행위가운데 가장 높은 품성 중 하나입니다, 공감하려면 먼저 내 생각과 판단을 비우고 상대방을 온전히 느껴보아야 합니다.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느끼는 것이지요.

17-7 영적 스승들은 우리 존재의 중심이 가슴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요가의 차크라(에너지 센터)에서 ‘가슴 차크라’는 가슴 중앙에 위치한 에너지 센터로서, 그것이 열리면 사랑의 에너지가 피어납니다. 한번 연습을 해보실까요?

눈을 감고 호흡을 잠시 바라본 후 깊이 아끼는 사람을 한 사람 떠올려 봅니다. 그 사람의 소중함을 한번 느껴보세요. 가슴이 따뜻하게 열리지 않나요? 반대로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떠올려 보세요. 가슴이 아프지 않나요? 정도에 따라 가슴이 찢어지게 아플 수도 있습니다. 이제 싫어하는 사람을 떠올려 보세요. 당시 분노하고 반발하던 때를 떠올리면 가슴이 막히고 답답함을 느끼게 됩니다. 다시 소중한 사람을 떠올리면서 가슴이 다시금 따뜻해지게 하고 눈을 뜹니다.

17-8 가슴이 치유와 사랑의 근원입니다. 이 가슴은 아주 지혜롭기도 하지요. 삶을 느끼는 것도, 공명을 통해 삶에 연결되는 것도 가슴입니다. 가슴은 배척이 아니라 포용하는 법, 판단이 아니라 수용하는 법, 저항이 아니라 허용하는 법을 알고 있습니다. 머리로 생각하기보다 가슴으로 느끼는 법을 배울 때 삶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어린 시절 우리는 열린 가슴으로 온전히 살았지만, 점점 가슴을 닫고 머리를 굴리며 상대방의 눈치를 보고 사랑을 잃지 않으려 애쓰기 시작하였지요. 가슴이 아파 괴로운 것을 피하려고 머리를 쓰고 가슴을 닫고 살기 시작하였지요. 이제 명상을 통해 자신의 가슴에 귀 기울이고 다시금 여는 법을 알게 되면 가슴이 가장 지혜로운 스승이자 친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가슴을 열면 삶은 더 이상 생각의 대상이 아니라 가슴의 경험이 되고 비로소 살만한 세상이 됩니다.

가슴으로 사람을 만나고
가슴으로 세상을 만나면
새로운 삶을 경험하게 된다네.

산도 구름도 계곡 물소리도
이름 모를 나무와 풀,
길가의 돌멩이들과도

교감할 수 있다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