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으로만 쫓아다니다 보면 부처님의 뜻을 하나도 알지 못합니다

이 공부를 한 분들께서는 죽으려도 맘대로 죽을 수 있고
살려도 맘대로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생사윤회에 끄달리지 않고 말입니다.

여러분이 공부하시려고 모두 이렇게 한자리에, 항상 같이 앉아 주시는데 한편 감사하게도 생각이 듭니다. 남들은 그렇게 기복으로 자꾸 나가는데, 자기 가짜 면목을 찾으려고 애를 쓰지 않고 진짜 면목을 찾으려고 애를 쓰는 이런 여러분의 그 마음이 얼마나 갸륵한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눈물까지 쨀끔 나옵니다. 하하하…. 감사해서요.

여러분, 테레비에서 ‘임진왜란’ 하는 걸 보시죠? 그랬을 때에 서산 대사 대목이며 일본에서 온 스님의 대목 보셨죠? 물로써 군사를 죽이는 거와 또 물이 치켜 올라가게끔 서산 대사가 던진 문제요. 그거 보셨죠? 또는 일본에서 조선을 탐지하러 왔을 때에 서산 대사가, 그 동자가 나서서 모든 스님들을 붙들어서 못 가게 하고 또 가게 하고 이러는 대목 보셨죠?

여러분은 보시고 어떠한 생각을 하셨는진 모르겠지마는 어떤 분들은 그것을, 즉 말하자면 애들 만화 정도로 인식하거든요. 그런데 만화가 아닌 진짜 그 동자라면, 스님 자체의 모습은 가(假)모습이지만 스님의 진짜 동자는 그렇게 여러분한테 영화로써 보여 주려니까 그 동자가 보이지, 그 동자는 보이지 않는 바로 그 스님의 참동자인 것입니다. 부처님이신 겁니다. 그러면 그 참부처님은 줄지 않으면서 바로 동자가 나가는 것은 보살행을 하는 것입니다.

또 지난번에 그, 임진왜란 때 붓을 던졌다든가 물 수 자를 써서 던졌다든가 하는 거는 가(假), 글씨 쓴 거나 종잇장이, 즉 말하자면 가짭니다. 그 던진 것을 따르지 마시고, 즉 말하자면 우리가 물건을 하나 쥐어서 이렇게 던졌다고 봅시다. 그런다면 그 물건을 쫓아다니지 말고 던진 놈한테 달려들어서 물어라 이겁니다. “왜 던졌느냐?” 하고. 이렇게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그 던진 글씨와 종잇장이 진짜가 아니라 그분의 그 참마음에서 진짜 보살행을 하시는 겁니다. 즉 말하자면 불 수레가 돌듯이 말입니다.

그럼 용도에 따라서 그렇게 무궁무진하게 나갈 수 있다는 겁니다, 용도에 따라서. 물에 관한 건이라면 그렇게 물로 치고, 악이라면 너무 대의적인 문제입니다. 죽이 끓고 밥이 끓는 데에 대선사가 나서서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정말 나라에 큰일이 생겼을 때에 나서는 것이 바로 대인의 그, 불바퀴를 돌리는 용(用)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눈에 보이니까 “어이그! 저거 만화 같애. 저거 만화지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나?” 그럴 겁니다.

그전에도 얘기했지마는 어느 마음공부 하는 분이 그믐밤에 어디를 지나다가 그만 구덩이에 빠졌더랍니다. 덫에 걸린 거죠. 사람들이 짐승을 잡기 위해서 덫을 놨는데 고만 그 구덩이에 빠졌어요. 그런데 도대체 앞뒤가 막혀서 나올 수가 없어, 하늘만 보이지. 그러니 거기서 어떻게 나와야 되겠습니까? 거기서 부처님을 찾아서, 그 부처님이라는 이름을 찾아서 나를 건질 수 있겠습니까? 거기서 어떻게 해야만이 내 육(肉)의 구원을 받을 수 있을는지…. 내 마음의 구원을 받을 수 없다면 육의 구원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람이라는 게, 우리가 그것을 홀랑 발겨서 얘기할 수 없으니 여러분이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가정이든지 남편은 대들보고 여자는 서까래라고 봅시다. 그런데 대들보다 서까래다 할 게 없이 한마음 한뜻으로 한 식구가 모두 모여서 사는데, 여러분한테 항상 말을 하죠. 우리가 살면 이 모습을 가지고 얼마나 살겠느냐? 우리가 재밌게 살고 할 말만 하고 살아도 다 못 하고 사는데, 할 말 안 할 말 다 해 가며 악을 악을 쓰고 이 세상 모두가 제가끔들 그냥 이것이 옳다고 주장을 하고 싸운다면 복도 들어오다가도 딱 나가. ‘이놈의 집에 들어갔다가는 내 맘이 상해서 못 살겠어.’ 하고.

그러니까 내가 있는 이상에는 돈도 생명이 있는 거고 마음이 있어. 내가 없다면 그 돈도 아무것도 없는 거지만. 그러니까 마음의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그런 영향력과 지혜력, 판단력이 부실한 사람들은 역시 구원을 받지 못한다 이거야. 돈의 구원도 못 받을 것이요, 돈도 나갈 것이요, 복이 다 나가. 그리고 오는 것은 무엇이냐. 액이나, 즉 말하자면 인과응보나 유전성이나 또는 업보가 거기에 매달려서 우환이 끊어지질 않아. 그 마음에 따라서 그렇다 이겁니다.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느냐 하면 여러분 가정에 진짜로 이익이 될 수 있고 진짜로 우리가 해야 할 문제이기 때문에 이런 얘기를 합니다. “저분은 만날 시시한 얘기만 해.” 그러지 마시고 더러운 연못에서, 질척질척한 데서 연꽃이 핀다는 거, 그 말이 바로 그런 데 있는 겁니다. 우리 가정에 있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조그마한 내 한 티끌 같은 불에서 우주를 밝힐 수도 있고, 내 마음, 하나의 그 마음에서 한 가정을 화목하게 만들 수도 있고, 복을 들어오게 할 수도 있고, 우환을 끊을 수도 있고, 세계를 조절할 수도 있는 거고 또 거기에서 교양, 지혜, 모든 판단이 나옴으로써 우리 가정도 사회도, 지금 공장이나 어떠한 장사하는, 상업하는 분들이나 모든 게 거기에서 보풀어지는 것입니다, 한마음에서.

그러니 모두가 그 마음에서 가설이 돼 가지고 저 태양에나 혹성에나 별성에나 모든, 이 물에나 해안이나 지상에나 산에나 이러한 데도 다 연결이 돼 있어요. 가설이 돼 있단 말이야, 법망이. 그런데 우리가 마음을 그렇게 한다면 가설이 돼 있는 대로 다 퍼지게 돼. 잘해도 퍼지고 못해도 퍼지게 돼 있어. 내가 아는 것을 부처가 아는 거니까. 내가 아는 것을 법망에서 알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애들한테도 모진 욕을 해서도 아니 되고, 상식적으로 생각하고 교양적으로 생각해도 우리가 그렇게 모진 욕을 해서도 아니 되고, 불안을 일으켜도 아니 되고, 또 모진 생각을 해서도 아니 되고, 미운 생각을 해서도 아니 되고, 증오라는 생각을 해서도 아니 되고, 모든 생각을 잘해야만이 우리가 애를 낳아도 기품이 있고 유유하고 이 세상에서 누구하고도 바꿀 수 없는 그런 자식을 낳을 수 있는 겁니다. 옛날에도 어린애를 배면 “가운데 토막으로 먹어라. 교도소에 가지 마라.” 뭐, 이렇게 저렇게 모든 걸 가렸습니다.

그것은 옛날 노인네들이 몰라서 그런 게 아니라,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현실적이고 과학적이기도 하면서 너무나 지혜가 컸다고 봅니다. 이 마음이 그렇게 묘하게 돌아갈 수 있는 그런 근본의 원리를 가졌기 때문에, 한생각이 그렇게 무섭고 한 증오가 그렇게 무섭고, 그 업보는 뭘로도 끊을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에 마음으로 지은 거 마음으로 끊어야 한다 이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가정이 부유하게 대대손손 끊임없이 부자로…, 부자라는 건 돈이 많아서만이 부자가 아닙니다. 돈하고 모든 게, 일체가 결부된 것을 말하는 겁니다. 마음이 부자라야 돈도 가난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가난하다면 가정도 가난하겠죠. 모두가 가난해요, 일체가 다. 그럼으로써 여러분 앞에, 어느 가정에도 공덕이 깃들고 복이 깃들고 우환과 모든 가환이 녹아 없어지게끔 하는 도리가 지금 내가 일러 드리는 그 도리입니다. 그 도리만 갖는다면 여러분한테 열쇠가 맡겨질 수 있는 것입니다. 중이라고 열쇠가 맡겨지고 중이 아니라고 열쇠가 안 맡겨지는 건 아닙니다. 여러분이 그 습의 증오, 습으로 망하는 수가 있죠. 습을 뗀다면, 습을 뗀다면 참 모든….

그래서 이런 게 있죠. 예전에 스님들께서 시심마 화두를 던진 게 있으시죠? 그게 뭐냐 하면 사람사람이 누구나가 ‘아, 이거 이거, 이거 없는 거 있는 거 몰락 놔도 또 있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그런 문제입니다. 그러니 ‘이게 또 놔도 또 놔도, 몰락 다 놔도 또 있으니 무엇일꼬?’ 하는 것까지도 훌렁 넘어서라 하는 겁니다, 나는. ‘뭘꼬?’ 하고서 10년 20년 가지 말고 ‘이 뭘꼬?’까지 놓고 훌렁 넘어서라. 만약에 그렇게 훌렁 넘어설 수 있다면, 그 습을 다 떼지 않으면 훌렁 넘어설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열쇠를 내가 스스로서 받을 수가 없습니다.

예전에 손오공이 스님 시자로서의 소임을 다하고 부처님을 모시고 다녔는데, 그것이 영화로 나올 때 사람들은 모두 그걸 어떻게 봤는지 모르겠지만, 애들은 만화로밖에는 볼 수가 없고 어른도 만화로밖에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 마음이, 진짜 자기 마음 하나가 다 할 수 없으니까 법신들을 만들고 보살들을 만들어서 똑같은 손오공이 수없이 나가지 않았습니까? 여러분이 봤으니까 이런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럼 똑같은 손오공이 쭉 만 개가 나갔다고 합시다. 근데 똑같은 손오공이 만 개가 나갔는데 여러분한테 보여 주려니까 똑같은 손오공이 보인 거지, 그건 보이지 않는 데서 바로 불바퀴가 용을 하는 그런 도법입니다.

그러면 그런대로 그렇게 만 개가 나갔으면 용도에 따라서 하나하나가, 부처님께서는 다닐 때 둘씩도 다니지 말라 하셨습니다. 왜? 이 우주 삼천대천세계에 너무도 건질 게 많으니 하나하나 용도에 따라서 나가거라. 그러니 그 용도에 따라서 얼마나 많겠습니까? 우리 여기 앉아 있는 분들만 해도 용도가 참 많은데 그,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러니 많은 숫자대로, 숫자가 만이면 만대로 부처가 계시고 손도 천이요, 눈도 천이라고 한 그 말이, 그 천이 천이 아니라 이 우주 공간에 꽉 찼다는 얘깁니다. 있는 대로 말입니다. 그렇게 용도에 따라서 똑같은 손오공이 나갔어도, 용도에 따라서 하나는 이쪽으로 가고 하나는 저쪽으로 가고 하나는 사방으로 꽉 차서 어느 데에 아니 닿는 데가 없이 닿을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랬는데도 손오공이 자기 재주만 믿고 어떤 때는 자꾸 일을 저지르는 수가 많이 있으니까 부처님이 나중에는…, 그래도 부처님 손바닥에서 놀았어. 그래서 나중에는, 부처님은 자비하시기 때문에 때에 따라서는 이 줄을 잡고 있던 걸 늦춰 놔, 가고 싶어 하는 대로. 나도 그렇게 실감이 나게 걸었거든요. 그런데 늦춰 놨다가도 자기가 해 볼 거 다 해 보면 그것이 인제 ‘아, 이게 이런 거구나.’ 그러고선 아예 그냥 싫증이 난다고요. 그럴 때 줄을 딱 잡아 젖히는 겁니다. 그래야 되지 ‘내가 이걸 꼭 해 봐야지.’ 하고 하고 싶어 할 때에 이걸 탁 막으면 그건 부작용이 나는 겁니다.

여러분이 생각을 깊이 해 보시면 아실 것입니다마는 세 살 먹은 어린애나 네 살 먹은 어린애나 또는 요렇게 두 살 먹은 어린애, 한 살 먹은 어린애를 만약에 잘못한다고, 울고 그런다고 자꾸 때려 보십시오. 그럼 더 웁니다. 그럼 저만 손해야. 어른만 손해야. 병나고 그러면 더 손해고. 그런데 만약에 어른들도 죄가 있다면 모르는 죄뿐이지,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죄가 있다면 바로 모르는 죄입니다. 허허허….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사람들이 모르니까 어린애로 생각하고 ‘그 어린애를 때리면 뭘 하나.’ 했습니다. 때리면 더 울기나 하지. 이걸 잘 깊이 새겨들으십시오. 그러니까 모른다고 밉다고 그러고 아무 데서나 때리지 않았습니다. 때리지 않고 항상 자기가 어린애로 돼 있었을 때의 과거의 자기라는 걸로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자비하시고 얼마나 도량이 크십니까?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의 그 뜻을 판단하고 그 뜻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은산철벽이다 뭐다 이러는 것도 그 뜻을 따라야 된다는 얘깁니다. 그 뜻을 따르지 않고 만날 물질로만, 색으로만 본다 한다면, 색으로 쫓아다니다가 볼일 못 보면 부처님의 뜻을 하나도 알지 못해요.

저 스님은 만날 한 말 되하고 한 말 되하고 한다 싶더라도, 천 번을 하더라도 잘 새겨들어 보십시오. 그런다면 진흙, 그 더러운 물에서 아주 예쁜 연꽃이라는 그 향기 내음이 바로 거기에서 나오게 되고, 열쇠도 거기서 나오게 되고, 온 누리에 자기가, 참자기가 온 누리에 꽉 차 있을 수 있고, 자기의 사리가 온 누리 우주에 꽉 찰 수가 있다는 얘깁니다. 사리가 별다른 겁니까? 여러분의 마음의 사리가 온 우주에 다 담겨 있는데, 어떤 사람은 스님이 열반하시면 사리 나올 때를 기다리고 그게 안 나오면 그냥 탈을 잡고 섭섭해하고 온통 무시하고, 이러한 문제들도 좀 음미해 볼 수 있는 생각이 필요합니다.

색만 보고 취하지 마십시다. 우리가 지금 당대의 요 모습을 가지고 얼마나 살겠습니까. 모두가 색을 보고 취한다면 요 모습을 벗을 때 아픔을 견딜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는, 이 공부를 한 분들께서는 죽으려도 맘대로 죽을 수 있고 살려도 맘대로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생사윤회에 끄달리지 않고 말입니다. 그리고 사람에 의지해서 나지도 않습니다. 내가 맘대로, 이 즉시에 태어난다 하면 이 즉시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옛날에 어느 나라에 태자 될 아이가 없어서 어느 스님께 빌러 왔는데, 애기를 꼭 줘야만 하겠는데 그냥 줘서 될 일이 아니더랍니다. 왜냐하면 아무 애기나 줘서는 인군이 될 수가 없더랍니다. 그런데 두 스님이 친구였는데 하나가 열반하셔서 그리로 태어나셨다고 하는데, 난 그렇게 생각 안 합니다. 그 스님은 그대로 계시면서 그 스님이 바로 그리로 태어나셨어도 천백 화신입니다. 그리로 태어나셨어도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았더라는 얘깁니다. 그 뜻을 아셔야 합니다.

그 스님이 열반하셔서 그리로 태어나셨다는 거는 여러분을 가르치기 위해서 “야, 망건 쓰고 버선 신고 이거, 40년 살기가 참 얼마나 어려우냐.” 하는 것을 여러분한테 가르치느라고 방편을 쓰신 겁니다. 사람으로 태어나면 얼마큼 고초가 많고 얼마큼 애로가 많은지를 여러분한테 알려 주고 가르쳐 주기 위해서 방편을 쓰신 거고, 또 모르는 사람한테는 그렇지마는 아는 사람은 그 말을 안 해도 그 뜻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좇아가는 게 아니라 그렇게 말씀하신 그 뜻을 좇아가 보면 뭐가 나오느냐 하면, 아, 천백억화신이라니, 아니, 그 스님이 열로 되면 아니 되나, 만으로 되면 아니 되나? 이 공간에 꽉 찼는데 그 스님이 하나 빠졌다고 줄어들 수 있을까? 그러니 그 스님은 부처이신 거라. 산 부처라. 산 불이야. 그렇기 때문에 이 바닷물에서 물 한 그릇 뚝 떠서 줬단 말이야, 목마른 사람한테. 그 식이야. 그러면 그 바닷물이 줄었겠습니까, 늘었겠습니까?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이 물 한 그릇 갖다가 들이부었는데도 아니, 거기 두드러집디까?

이렇게 자재력이 있고 이렇게 광대무변한 이 법을 여러분은 그 도리를 모르고 만화로만 생각하고 그 말귀만 따라서 좇아다니지, 색을 보고 쫓아다니지, 부처님이 돌을 던지고 “저거 뭐냐?” 하면 돌 굴러가는 걸 보고 그 돌을 쫓아갈 겁니다, 아마. 그리고 또 돌이 이렇게 이렇게 됐다 하면 돌인 줄 안다 이겁니다, 응? 벽을 치면 봇장이 울리는 걸 알아야 될 텐데, 종을 울리면 종 울리는 소리만 듣고 그걸 소리라고 하거든. 그걸 듣는 거라. 종 치는 거하고 소리하고 듣는 거야. 그 소리만 좇아다니다가 뭘 합니까? 그 뜻을 좇아야지.

우리가 지금 향 하나 꽂고 향 피우는 것도 바로 법문이요. 여러분은 말을 해야만이 법문으로 듣지 마시고 내가 이것을 하나 들고 이렇게 말을 하는 것도, 말을 해도 함이 없고 이걸 들었어도 든 것이 없다 이겁니다. 그러나 이 든 이 자체의 근본이 무엇이냐는 겁니다. 말, 이것이 성품 따라서 어디서 나오는가? 그 뜻을 알아야 된다 이겁니다. 그러면 내 뱃속도 알면…. 예를 들어서 자기 뱃속을 자기가 알아야 내 뱃속도 알 수 있고 또 역대의 부처님 뱃속도 알 수 있고 그 뜻을 알 수 있다 이 소립니다. 이 우주의 섭류의 뜻을 알 수 있기 때문에 여러분이 맘대로 자유자재할 수 있는 그런 열쇠를, 열쇠 아닌 열쇠를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공부하면서 가정에서 어떠한 불화가 일어나도, 내가 항상 당부하는 것은 아무리 속이 상한다 할지라도 가정이 화목 화목 화목, 죽을 때까지 화목, 화목해야 됩니다. 아까 얘기한 거와 같이, 세상에 해 보고 싶은 거 다 해 보고 나니까 모든 게 시들한 거라.

여기에 앉아 계신 어느 분이 그런 분이 있습니다. 이름은 밝히지 않겠습니다. 아, 재밌게 애들 낳고 잘 살았습니다. 근데 여자를 얻어 가지고는 나가서 영 돌아본 체를 안 합니다. 야, 돈도 다 까불지 그냥, 아주 그냥 매기단을 칩니다. “얘야, 주인공에 맡겨 버리고 가만둬라. 저 하고 싶은 대로 이 줄을 늦춰 줘라, 늦춰 줘. 가는 대로 늦춰 줘라. 이 마음과 마음의 줄은 남편이라는 거하고 아내라는 거하고 줄이 있다. 이 줄을 그냥 늦춰 줘라. 그리고 자비로써 그냥 놔둬라. 여기다 맡기고 놔둬, 그냥.” 그랬더니 한참 가다가, 이 줄은 쥐고 있으니까, 여기에 같이 가설이 돼 있으니까, 돌아다니다 돌아다니다가 나중에는 싫증이 났어, 그만. 허허, 고생만 되고.

야, 이거 그냥 버린 것도 아깝고 그냥 싫증이 나 버리니까 그 줄이 인제 슬슬 늦춰진단 말이야, 돌아오느라고. 그러니까 돌아오는 대로 줄이 느근하게 되니까 그냥 그것만, 느근한 대로만 잡아당기는 거라. 아, 그러니까 집으로 쏙 들어왔는데 바짝 쥐었단 말이야. 허허허. 그러니까 너무도 사랑하거든. 가서 경험을 하고 보니까 “야, 세상에 손이 들이굽지 내굽지 않더라. 세상에 다니면서 봐도 너 같은 아내가 없고, 너같이 예쁜 아내가 없고, 마음씨 그렇게 착한 아내가 없더라.” 이러고서는 그냥, 그냥 위에다 놓는 거라, 응? 그러니 전자의 애정이, 없던 애정도 솟아 나오는 거라.

이것이 바로 남자든 여자든 우리가 이 주인공에 다, 주인공 줄에다가 모든 것을 놓게 되면 아무리 나쁜 사람도 참 착해져. 그리고 사랑을 받게 돼. 아무리 아들이 나쁘고 도둑질을 하고 그래도 전자의 인연줄로 인해서 그런 거니까 그 인연줄을 녹여 주기 위해서는, 그저 그런 것도 걱정하지 마라. 여기 줄만 쥐고선 그냥 다 놔두면, 그렇게 믿고 놔두면 그냥 저절로 녹아 버리는 거야. 그런데 여러분은 그게 아니야. 줄을 쥐고선 그걸 붙들고 바들바들 뛰니까, 이게 가는 거 그냥 당기고 당기고 하니까 가 보질 못하는 거야. 가서 그냥, 이것을 좀 느긋하게 두면 그냥 갔다가 한번 휘 돌아서 ‘아, 이런 게 이런 거로구나.’ 그러고는 다시는 안 갈 텐데도 불구하고 그걸 가 보고 싶은데 보질 못하게 딱 쥐고서는 늘어지니까 그냥 신경질을 내고 온통 야단이 나는 거죠. 좋아요, 그게? 그러니까 그냥 탁 던져요, 응? (중략)

끝으로 한마디 당부 말씀 해 드릴 거는, 공부하는 사람들이 삼독의 욕심으로, 또는 욕심으로 인해서도 그렇지만 욕심을 버렸다 하더라도 하나하나의 모습으로 우리가 억겁을 거쳐 오면서 살아나오던 그 습이 있습니다. 뱀의 모습이든지 곰의 모습이든지 원숭이의 모습이든지 고양이의 모습이든지 어떠한 모습을 가지고 우리가 거쳐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옛날에 잠재해 있던 그 습이 공부를 하려면 그냥 쏟아집니다. 꿈에 나오는 한정 없이 쏟아지는 그 모습들이 누군 줄 아십니까? 여러분이 이 인간이 되기까지 거쳐 나올 때에 살던 그 습입니다. 그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거를 딴 남이라고 생각하고 ‘꿈에 이런 걸 봤으니 어이구, 내가 언짢지.’ 왜 언짢습니까? 예?

우리한테 많은 재산도, 물건 이것도 본래 무면목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걸 깨끗하게 다듬고 분 바르고 이렇게 했어도 이것은 가짜야. 아무리 잘났든 못났든 이건 가짜다 이거야. 그러니 자기라고 하지 말라 이거야. 그러나 자기, 가(假)자기가 있기 때문에 진짜 자기가 있으니 가자기가 모든 거를, 부처님의 뜻을 잡고서 모든 거를 놔라 이거야. 놓되, 여기서는 분명히 놓는다고 하고 가서는, 집에 가선 악을 쓰고 그러는 거예요. 아, 이러니 어떡합니까? 송구스럽단 말입니다. 내가 다 민망스러워.

그러니 여러분이 겁을 거쳐 오면서 살던 그 습에 의해서 속지 마시고, 환상을 보고 속지 마시고, 자기의 모습을 보고 놀라서 속지 마시고, 꿈이 나빠서 안 되느니 되느니 이렇게 속지 마시고, 또 싸움이 일어나더라도 어떠한 문제든지 조용히 좋은 말로, 하다가도 안 되면 딱 멈추고, 말하지 말고 여기다가 맡겨 놓는 그러한 사람이 되신다면 큰소리가 영 없고 화목이 깃들고 복이 들어오고 공덕이 될 것입니다. (중략)

편안하게들 사십시오. 나는 그것을 원합니다. 한 생 이렇게 알뜰하게 관하고 정진하고 살아서, 세세생생을 우리가 보람 있게 참, 부처님의 자리에서 이 세상에 모습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으면서도 그 모습들이 다 나 아님이 없이 될 수 있다면, 당당하게 내가 지금 태어나려면 태어나고 죽으려면 죽고 맘대로 할 수 있는 그런 자유권을 가질 때 그 보람이란 정말이지 눈부신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은 이걸로써 끝을 마치겠습니다.

※위 법문은 대행 스님께서 1986년 9월 4일 일반법회에서 설법하신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에서도 같은 내용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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