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본래의 道

“여러분들이 제방에서 도를 말하면서 ‘닦을 것이 있고, 깨달을 것이 있다’고 하지만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설사 닦아 얻는 것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가 생사의 업일 뿐이니라. 여러분들이 육도만행(六度萬行)을 빠뜨리지 않고 닦는다 해도 나는 모두 업을 지을 뿐이라고 보느니라. 부처를 찾고 법을 찾는 것도 지옥의 업을 짓는 것이니라. 보살을 구하는 것도 또한 업을 짓는 일이며, 경전을 읽는 것도 업을 짓는 일이니라.

부처와 조사는 할 일이 없는 사람이니라. 그렇기 때문에 번뇌가 있고 하려는 것이 있거나(有漏有爲) 번뇌가 없고 하려는 것이 없는 것(無漏無爲)이 모두 청정한 업이 되는 것이니라.

어떤 눈먼 무리들은 밥 먹고 나면 바로 좌선하고 관행(觀行)을 하며, 망념의 번뇌를 꽉 붙잡아 일어나지 못하게 하며 시끄러운 곳을 싫어하고 조용한 곳을 찾으나 이것은 모두 외도의 수법이니라.

조사가 말했다. ‘그대가 만약 마음을 머물게 해 고요함을 살피고 마음을 일으켜 밖으로 비추고 마음을 거두어 안으로 맑게 하며 마음을 한곳에 집중하여 선정에 들려 한다면 이와 같은 것들은 모두 조작하는 것’이라 했느니라.

여러분이 지금 이와 같은 법을 듣고 있는 그 사람을 어떻게 닦으며, 어떻게 깨닫게 하며, 어떻게 장엄할 수 있겠는가? 그 사람은 닦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며, 장엄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니라. 만약 장엄할 수 있다 한다면 일체의 모든 물건도 모두 장엄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착각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임제록〉에서 말하는 임제의 법문은 매우 파격적이다. 어떤 면에서는 불교의 수행에 관한 상식마저 엎어버린다. 이 장에 와서 하는 말도 상식을 뛰어넘는 이야기다. ‘도는 닦을 것도 없고, 깨달을 것도 없다.’ 왜 이렇게 말하는가? 도(道) 자체에서 보면 닦을 것이 없다. 깨달음도 깨달을 것이 없다. 마치 눈이 눈을 보지 못하는 것처럼 도에 들어가 버리면 도가 안 보이는 것이다. 도가 도를 닦는다 할 것이 없다. 깨달음도 마찬가지다. ‘부처를 부처다 하면 부처가 아니다’는 말은 자주 써온 말이다. ‘선(禪)을 선(禪)이라 하면 선이 아니라는 말도 해 왔다. 노자의 〈도덕경〉에도 ‘도를 도라 하면 본래의 도(常道)가 아니다’ 했다. 이러한 말들은 도에 계합(契合)된 경지에서 하는 말이다.

〈원각경〉에는 “일체중생이 모두 원각(圓覺)을 증득했다(一切衆生 皆證圓覺)”는 구절이 있다. 원각을 증득했다는 말은 이미 깨달아 있다는 말이다. 규봉 종밀(圭峰 宗密)이 원각경 소(疏)를 지으면서 이 구절의 증(證)자를 갖출 구(具)자의 잘못이 아닌가 의심된다는 사견(私見)을 내어 소에 적었다가 나중에 임제종 황룡파의 진정 극문(眞淨 克文)으로부터 ‘깨진 범부의 누린내 나는 놈’(破凡夫 腥衣漢)이라는 혹독한 비난을 받았다는 일화가 있다.

상식적인 지견(知見)으로 깨달음에 계합(契合)되기는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이 선(禪)의 입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일으키고 생각을 움직여서(起心動念) 고의적으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을 임제는 철저히 부정해 버린다. 모두가 업을 짓는 일일 뿐이라고 말한다. 임제는 육도만행을 해서 부처가 되고자 하는 것은 죽은 송장을 타고 바다를 건너려고 하는 것과 같다는 비유를 들어 본분공부(本分工夫)의 극칙(極則)을 드러내는 말도 하였다.

깨달음의 순간을 ‘앞생각 뒷생각’이 끊어지는 것이라고 표현해 놓은 말도 있다. 일종의 돈오(頓悟)의 경지를 설파해 놓은 말이라고 볼 수 있는 이 말은 잠을 자던 사람이 잠을 깰 때 순간적으로 깨는 것이지 깨기 전에 미리 잠을 깨어야겠다고 생각하고 깨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중생이 수행을 완성해서 부처가 된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말을 고차원적으로 비약시켜 이미 부처다 더 이상 부처 되려고 할 것이 없다는 식으로 말하는 여기에 공부의 핵심 묘미가 있다고 한다.

조사의 말을 소개하는 조사는 하택 신회(荷澤 神會)다. 신수(神秀)의 점수를 비판하면서 한 말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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