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닦음의 길 19

법회의식 가운데 정근(精勤)이라는 순서가 있다. 이는 쉬거나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열심히 노력한다는 뜻인데, 대개 법문이 끝난 후반부에 진행되는 의식이다. 이때가 되면 의식을 집전하는 사람이 염불(念佛)을 시작하며, 법회에 참가한 불자들은 염불을 따라하면서 절을 하거나 불전함으로 나아가 각자 준비한 보시금을 내고 자기 자리로 돌아온다. 정근은 법회가 열리는 법당의 주불(主佛)에 따라 그 대상과 내용이 달라진다. 만약 대웅전에서 법회가 열리면 ‘삼계의 도사이자 사생의 자애로운 어버이며 우리들의 스승이신 석가모니 부처님께 귀의합니다(南無三界導師 四生慈父 是我本師 釋迦牟尼佛).’로 시작하는 석가모니불 정근을 한다. 법당이 무량수전이라면 아미타불 정근을, 관음전에서는 관세음보살 정근을, 지장전이면 지장보살 정근을 한다.

염불은 가장 대중적인 수행이라 할 만큼 불자들 사이에서 널리 실천되고 있다. 평소에도 손으로 염주를 굴리면서 ‘나무아미타불’을 염하는 이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염불을 하는 목적은 무엇이며, 불교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염불의 목적은 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의 본원력(本願力)에 의지해서 서방정토(西方淨土)에 태어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염불하는 대상이 석가모니불보다는 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인 경우가 많다.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에는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에게 귀의함으로써 종교적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 바람이 담겨있다.

염불은 내용에 따라 몇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가장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칭명염불(稱名念佛)이다. 글자 그대로 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 등의 명호를 입으로 소리 내어 부르는 것이다. 이때 북이나 징, 목탁을 치면서 큰 소리로 염불하기도 하는데, 이를 고성염불(高聲念佛)이라 부른다. 둘째로 관상염불(觀想念佛)은 입으로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아미타불을 간절히 생각하면서 행하는 수행이다. 그리고 실상염불(實相念佛)이라고 해서 모든 생명의 참 모습(實相)을 관하는 염불도 있다. 아미타불은 공간적으로 한량없는 빛(無量光)이며 시간적으로 영원한 생명(無量壽)을 의미한다. 실상의 차원에서 본다면, 염불은 우리들 생명의 근원인 영원한 빛과 생명 자리에 돌아간다는 자기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염불의 목적이 서방정토에 태어나는 것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자력적(自力的) 근본불교와는 이질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스스로 수행해서 깨침에 이르는 붓다의 근본 가르침과 달리 염불은 절대 타자, 즉 아미타불의 힘에 의존한 타력적(他力的) 신앙이라는 뜻이다. 흔히 정토신앙에서는 깨침에 이르는 방법으로 난행도(難行道)와 이행도(易行道) 두 길이 있다고 말한다. 자기 수행을 통해 깨침에 이르는 것이 어려운 길이라면, 염불은 쉽고도 빠르게 도달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이다. 오직 간절한 마음으로 아미타불에게 귀의하기만 하면 극락왕생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아미타불의 48대 서원에서도 “어떠한 중생이라도 지극한 신심과 환희심을 내어 열 번만 나의 이름을 부르는 이가 있다면 반드시 왕생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이러한 타력적인 측면 때문에 염불을 가볍게 보는 시선도 없지 않지만 이는 큰 오해다. 염불의 대상이 석가모니불이든 아미타불이든 관계없이 그분들의 명호를 오직 일념으로 부르다 보면 어느새 모든 번뇌, 망상이 사라지고 마음이 청정해진다. 그렇게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이 모두 사라지면 맑고 고요한 마음으로 세계를 바라볼 수 있다. 수행을 통해 깨침에 이른 여러 선사들이 염불을 중시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염(念)이라는 한자를 풀어보면 현재(今)의 마음(心)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그러니까 염불은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의 마음이 곧 부처’라는 뜻이 된다. 염불을 통해 지나간 과거에 대한 집착과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불안을 떨쳐버린다면, 우리는 바로 지금을 있는 그대로 살 수 있는 것이다. 현재의 나를 구속하는 번뇌, 망상이 사라졌으니 말이다. 염불의 불교적 의미도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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