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삼안국토(三眼國土)

“어떤 것이 눈 세 개인 나라(三眼國土)입니까?”

임제가 말했다.

“내가 그대들과 함께 깨끗하고 미묘한 국토에 들어가서 깨끗한 옷을 입고 법신불을 설하며, 또 차별 없는 국토에 들어가 차별 없는 옷을 입고 보신불을 설하며, 또 해탈국토에 들어가 광명의 옷을 입고 화신불을 설하니 이 눈 세 개인 나라는 모두 행동을 의지해 변화된 것일 뿐이다. 경론가들은 법신을 취해 근본을 삼고 보신과 화신을 법신의 작용이라 하나 산승의 견해로는 법신도 법을 설할 줄 모른다. 그러므로 옛사람이 말하기를 ‘법성신은 뜻을 의지해 세운 것이요 법성토는 법성의 본체에 의지해 말한 것이다’ 하니 법성신과 법성토는 만들어 세운 몸이고 만들어 세운 국토인 줄 분명히 알아야 하느니라. 빈주먹에 노란 잎을 쥐고 금이라고 어린아이를 속이는 것이니라. 남가새나 마름의 바싹 마른 뼈다귀에서 무슨 국물을 찾는단 말인가? 마음 밖에 법이 없고 마음 안에도 없으니 무엇을 찾는다는 말인가?”

눈이 세 개인 나라(三眼國土)는 원래 〈화엄경〉에 나오는 말이다. ‘입법계품’에 선재동자가 53 선지식을 찾아 남행할 때 11번째 만난 선견비구가 머물던 곳이 삼안국토이다. 삼안은 법안(法眼), 지안(智眼), 혜안(慧眼)으로 선지식이 갖추는 세 개의 눈이다.

‘눈 세 개인 나라(三眼國土)가 어떤 것이냐?’는 질문에 답한 임제의 말을 보면 법신, 보신, 화신의 삼신불을 설하는 곳이라는 말인데 이것이 답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선의 질문(禪問)에는 답이 없다. 말로 하는 것은 답이 되지 못한다. 언어의 개념이나 논리로 선을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임제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조주(趙州)의 무(無)자 화두가 나타난 배경은 이렇다.

어떤 스님이 조주를 찾아와 질문을 하려 할 때 마침 마당에 개가 한 마리 지나가고 있었다. 찾아왔던 스님이 이것을 보고 다짜고짜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이에 조주 선사가 “없다”고 답을 했다. 그런데 개가 불성이 없다는 말은 틀린 말이다. 〈열반경〉에 “모든 중생은 모두 불성이 있다(一切衆生悉有佛性)”고 하였다. 개도 중생인데 어째서 불성이 없는가? 이러한 논리로 대응하면 개가 불성이 없다는 말은 틀린 말이다. 그러나 선문답(禪問答)은 말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아니다. 말의 격식이 없어 격외담(格外談)이라 한다. 굳이 말하자면 말로써 충격을 주어서 선의 세계로 들어오게 하는 방편을 쓰는 것이다.

임제는 교가의 견해를 가지고 선가의 참뜻을 알려하지 말 것을 주문한다. 부처님의 본체인 법신도 법을 설할 줄 모른다고 했다.

〈벽암록〉 제1칙에 양나라 무제가 달마를 만나 나눈 짧은 대화가 소개되어 있다.

무제가 물었다.

“어떤 것이 가장 성스러운 진리입니까?(如何是聖諦第一義)”

달마가 답했다.

“텅 비어 성스럽다 할 것도 없습니다.(廓然無聖)”

무제가 물었다.

“나를 대하고 있는 그대는 누구입니까?(對朕者誰)”

달마가 말했다.

“모릅니다.(不識)”

흔히 말하기를 도를 알기 전에는 몰라서 모르고 도를 알고 난 후에는 말을 할 수 없어 모른다 한다. 이때 달마가 한 ‘모른다’는 나중에 달마불식(達摩不識)이라는 공안(公案)이 되었다 한다.

선가(禪家)에서는 지식으로 알고 있는 견해는 교가(敎家)의 견해라 치부하고 도(道)나 선(禪)에 들려면 지식의 세계를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이른바 사교입선(捨敎入禪)이라는 말이 이래서 나온 것이다. 지식 과욕시대는 자칫 진리에 대한 체험은 없이 언어의 유희만 범람하고 사견을 조장하는 폐단이 많아, 안으로 얻는 수행의 체험이나 공부의 내공(內工)이 빈약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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