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닦음의 길 18

어떤 이는 스펙터클한 액션영화를 좋아하지만, 반대로 조용한 느낌의 영화를 선호하는 사람도 있다. 외향적인 사람에게는 지루하게 보일지 몰라도, 누군가에게는 묘한 감동과 재미로 다가오는 것이다. 음악도 에너지 넘치는 록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조용한 느낌의 뉴에이지를 즐겨 듣는 이도 있다. 어떤 이는 시원시원하게 말하지만, 조용한 목소리로 말하거나 침묵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불교의 수행체계도 마찬가지다. 간화선과 같이 직접적이고 거침없는 스타일의 수행만 있는 것은 아니다. 묵조선(默照禪)과 같이 묵언(默言)을 중시하며 좌선을 통해 나와 세계를 관조하는 고요한 수행도 있다. 위장이 튼튼한 사람이야 무슨 음식이든 빨리 먹어도 소화를 잘 시킬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천천히 씹으면서 먹는 것이 좋다. 불교의 수행 역시 개인의 성향에 맞는 것을 선택해서 실천하면 되는 일이다. 나와 스타일이 다르다고 해서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그저 난센스에 불과하다.

묵조선은 조동종(曹洞宗)의 10대 조사인 굉지 정각(宏智 正覺, 1091~1157)이 주창한 수행체계다. 당시 간화선 중심의 분위기에서 〈묵조명(默照銘)〉을 지어 조동종의 고요한 스타일의 수행법을 강조한 인물이다. 천동산(天童山)에 오래 머물면서 활동했기 때문에 흔히 천동화상이라 불렸다. 그는 〈묵조명〉에서 “몸과 마음을 고요히 하고 말을 잊으면(默默忘言) 존재의 참 모습이 눈앞에 밝게 드러난다(昭昭現前)”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의 요체는 모든 것을 쉬고 조용히 앉아있는 데 있다. 지관타좌(只管打坐)라는 말로 대표되는 묵조선은 그저 온갖 잡념을 잊은 채 오로지 일념으로 좌선하는 스타일이다.

어찌 보면 매우 고요하면서 단순한 수행법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몸과 마음을 쉬기만 하면 중생에서 부처로 질적 전환을 할 수 있을까? 그에 의하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본래 청정하면서도 밝은 부처의 성품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은 고요하면서 뚜렷이 밝은 신령스러운 바탕이지만, 평소에는 온갖 번뇌, 망상으로 가려져있어서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번뇌 덩어리인 몸과 마음을 쉬기만 하면 본래의 바탕으로 돌아가서 존재의 참 모습이 환히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봤을 때, 수행자가 먼저 해야 할 일은 침묵(?)한 채 모든 것을 내려놓고 좌선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 존재의 실상을 환히 밝히는(照) 지혜가 저절로 작동하게 된다. 견성(見性)이란 이러한 믿음을 갖고 조용히 수행할 때 찾아오는 선물이다. 묵조선에서는 특별히 화두를 타파해야 한다는 목표의식도 필요 없다. 오히려 뭔가를 구하려는 바로 그 마음을 내려놓고 조용히 관조할 뿐이다.

묵조선을 이 땅에 처음으로 소개한 인물은 구산선문(九山禪門) 가운데 수미산문(須彌山門)을 연 이엄 진철(利嚴 眞澈ㆍ870~936)이다. 조동종의 맥은 조선 중기까지 이어졌는데, 〈삼국유사〉를 편찬한 일연(一然ㆍ1206~1289)이나 매월당 김시습(金時習ㆍ1435~1493) 등이 그 전통을 지킨 인물들이다. 그 후 조동종의 자취는 사라졌지만, 오늘날 전통을 복원하려는 노력이 조용히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굉지와 동시대를 살았던 대혜는 묵조선을 강한 어조를 비판하였다. ‘검은 산의 귀신 굴(黑山鬼窟)’로 빠지게 하는 수행이거나 아니면 ‘고목이나 불 꺼진 재(枯木死灰)’처럼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는 비아냥도 난무했다. 조용히 좌선만 하게 되면 무기(無記), 즉 수행할 때 생기는 멍한 상태에 빠져 결코 견성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영향 때문에 간화선 중심의 한국불교에서 묵조선을 배척하는 분위기가 우세했다.

대개 잔잔하고 조용한 영화를 보면 조는 경우가 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하면서 감상하는 사람도 있다. 묵조선을 한다고 해서 모두 무기에 빠지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위험성을 지적하는 것은 괜찮지만, 그 자체를 틀렸다고 부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는 사람들의 다양한 근기에 맞는 대기설법(對機說法)을 강조했던 붓다의 정신과도 맞지 않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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