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불교 커뮤니케이션이란?

수행·포교도 커뮤니케이션
언어의 중요성 흔히 간과해
교감 바탕서 불교감동 전달
새로운 시대 법보시로 승화

불교와 스피치, 혹은 불교와 커뮤니케이션 하면, 갓 쓰고 양복 입은 것쯤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다. 불교스피치라고 하니, 교육을 받기 전에는, 다들 그게 무엇이냐는 질문이 대부분이었다. 그만큼 불교와 스피치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으로 보였고, 사회관계성에서 서로 무관한 것으로 오해받았다. 그러나 불교 안에 사부대중이 있고, 그 안에 스님들의 공동체, 재가불자의 모임, 법회, 예불, 불교의 각종 행사, 수행단체 등 이 모든 것도 사회관계성이며 커뮤니케이션이 중심이 된다. 또한 재가불자와 스님과의 관계, 수행에 대한 도움, 교육, 포교 등도 모두가 커뮤니케이션이다. 또한 오랜 옛날부터 전해 내려온 각종 경전들 또한 커뮤니케이션의 일환이다. 수많은 고승들의 귀감이 되는 이야기와 그들이 내려주는 화두,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경전문구들, 더구나 당장 TV나 인터넷영상만 틀면 나오는 스님들의 법문퍼레이드 등도 모두가 다 커뮤니케이션이다. 불교학의 강의나 서적, 논문, 그리고 포교행위도 모두 커뮤니케이션이다.

큰 범주에서 커뮤니케이션이라고 하면, 그 안에 언어적 요소와 비언어적 요소가 들어있으며, 여기에서 언어적 요소를 스피치라고 한다. 흔히 스피치는 말하기, 말하는 방법, 표현 등으로 이야기되어진다. 일단 스피치나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용어 자체가 영어이다 보니, 다른 말로 대체하기가 딱히 필요성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흔히 사용하고 있고, 학문적인 용어나 일상어에서도 스피치나 커뮤니케이션은 두루 쓰이다 보니, 이 용어가 굳어져버린 것도 있다.

왜 불교에서는 유독 스피치와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본능적인 터부가 생겨났을까? 타종교에서의 광적인 선도에 대한 집착과 거기서 오는 민폐의 볼 상 사나운 행태 때문에 지레 고개를 돌려버린 탓도 있고, 불교자체 내에서의 잘못된 오해가 면면히 굳어진 까닭일 수도 있다. 21세기를 달려가고 있는 이때에 불교는 전통문화를 유지 보존해가는 유일한 종교문화로서 그 역할을 다한다고 자부할 수 있다. 그러나 시대에 맞는 불교의 응용적 발전과 적극적인 포교활동에서는 매우 소극적이며 불교 자체를 그저 근근이 보존만 하고 있는 형국이다. 더구나 2015년 통계청이 발표한 총인구대비 종교인구에서 불교인의 급격한 감소와 비종교인의 증가는 많은 것을 시사하는 것으로 남아있다. 굳이 조사결과가 아니더라도 유아~ 청년층까지의 세대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긴박감은 누구나 공감하는 바이다. 급변하는 시대의 세대차이는 그 간격이 많이 벌어진다고 하여도, 불교에서의 텅빈 자리는 곧 우리의 미래를 대변하는 모습이기에 쓰디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포교의 금밭이라는 이주민과 탈북민은 이미 입국 때부터 불교를 버리기부터 한다. 이러한 시대적 조망을 철저히 인식하고 시대에 맞는 불교수행과 포교활동은 어떠한 것인가 고민해야 한다.

물론 언어가 모든 포교에서 전부라고 할 수는 없다. 언어가 주는 깊이감의 한계, 심층적 뿌리의지, 진실된 그 무엇을 다 표현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지극히 필요한 도구이다. 물의 소중함을 모르는 물고기처럼, 우리는 언어의 중요성에 대해 간과해버리곤 한다. 불법도 역시 말과 글이 연결되어 전해지고 있으므로 당연히 스피치 커뮤니케이션의 범주에 있다. 이를 하나하나를 의미있게 본다면 불법으로 훨씬 더 가깝게 가지 않을까 싶다. 일단, 불교에서는 말에 대해, 부정적인 분위기로 몰아가는 경향이 있었다. 동아시아문명 중에서 유교의 영향이 짙게 베인 까닭이다. 그러나 정작 중국유교나 중국불교에서 말에 대한 경시는 심하지 않았다. 인도와 중국에서 수 십 갈래로 크로스(cross)되고 혼합(mix)되어 넘어와, 우리식으로 양념 친 한국식 유교가 다시 버무러지며 우리만의 독특한 한국불교문화가 형성되었다. 앞으로 불교스피치커뮤니케이션에서는 숨어버린 말에 대한 정정당당한 입지를 바로 세우고, 말이라는 수단으로 불교포교활성화의 시동을 거는 역할을 강조할 것이다. 긴 세월동안 전해진 그 거대한 힘도 바로 글과 말 즉 커뮤니케이션이 아닌 것이 없었으며, 이에 대한 정확한 고마움과 필요성을 인지하고 이를 다시 바로 세워 21세기의 불교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본다.

스피치(speech)와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은 말과 관계성, 이 정도의 합성어로 이해되곤 한다. 현대적 스피치의 개념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상대에게 자신의 의견이나 주장을 조리 있게 전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커뮤니케이션에서 스피치만 보더라도, 그것은 상황의 다양성에 따라 자신의 생각부터 발표, 대화, 전화, 면접, 상담, 주장, 보고, 설득, 협상, 홍보, 인터뷰, 토론, 회의, 연설, 강연, 강의, 포교, 설법, 교육 등 많은 분류로 나아간다. 세대로 넘어가는 모든 것, 즉 삶의 전부라 해도 될 것이다. 사람은 아침에 눈을 뜨면서 잠자리에 들어가기까지 말을 한다. 심지어 자면서까지 스피치는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 기억여부와 관계없이 꿈을 꾸는 행위도 스피치라 할 수 있다. 말의 역사는 곧 한 사람의 역사이며 인생이다. 그동안 말에 대한 경시는 조선역사 500년, 그 이상의 역사를 갖고 있다. 세계화로 인해 말의 중요성이 근래에 와서야 부각되었을 뿐이다.

특히 반려동물 1000만 가구 시대를 맞아, 동물과의 교감과 대화도 쉽게 볼 수 있다. 동물뿐 아니라 식물과도 대화를 나누고 사랑과 정을 쏟은 결과는 식물의 성장으로 보답하는 커뮤니케이션 행위를 쉽게 볼 수 있다. 커뮤니케이션은 인간의 전유물은 결코 아니다. 인간의 지능을 앞지르는 인공지능이나 AI, UFO등은 인간과의 커뮤니케이션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모든 자연과 생명체들 앞에서 겸손해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가 하면, 우리는 무의식의 기저까지도 가늠해볼 수 있는 시대에 와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하나가 다 보이지 않는 파동과 입자로 날아간다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것, 그 모두가 결코 숨길 수가 없다. 부처님은 〈금강경〉에서, 9류 중생은 인간이 인간관계에서만의 커뮤니케이션이 아닌, 우주전체의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느껴지거나 느껴지지도 않는 무한의 존재들과의 광대한 커뮤니케이션을 이미 부르짖었다.

불교스피치와 불교커뮤니케이션은 지식과 이론으로만 그친 불교공부에서 이제는 입을 열어 내가 배운 만큼, 들은 만큼, 타인에게 아주 조금이라도 전달 할 수 있는 연습을 해서 진정한 불교공부의 완성을 만드는 작업이다.

관념적으로 말하지 말라. 구체적으로 말하라. 말로 할 수 있을 때까지는 말로 해줘야 한다.

-원효 스님 〈무량수경 종요〉-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으신 후, 이 깊은 진리를 감히 누가 알겠나 싶어 침묵을 결심할 때, 하늘의 범천은 그래선 안 된다는 간곡한 청을 한다. 이것을 모든 중생들에게 알려줘야 한다고 했다. 이 진리를 누가 이해하겠는가 하는 의문에 대해, 범천은 끊임없이 그렇지 않고, 알아들을 사람들도 있으니 걱정 말고 전법행을 해야 한다고 청했다. 그제서야 부처님은 알아들을 자도 있고 둔한 자도 있음을 알아차렸다. 결국 부처님은 입을 열기로 결심했고 범천은 감사해하며 자리를 떠났다. 이 순간이 불교의 시작을 알리는 일대사 중대한 사건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원효스님도 당나라 유학을 접고, 대중포교, 민중포교, 전법행으로 마음을 돌렸다. 조용히 글만 쓰는 것에서 더불어, 민중 속으로 들어가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하였다. 수많은 저서를 쓴 대학자이면서, 대중 속에서는 부처님의 이름하나만이라도 간절히, 끊임없이 부르도록 권했다. 이러한 전법행은 불교 커뮤니케이션의 재생의 꽃을 이룬다.

이 시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명확해졌다. 21세기 한국불교의 포교는 내가 한마디를 전할 수 있는 용기와 자신감의 배양이다. 이것이 부처님을 향한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며, 부처님을 닮아가는 지름길이다. 우리는 부처님의 지혜로운 스피치방법을 배워야 한다. 21세기는 IT, 인터넷의 발달로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가는’ 세상이다. 진정한 대승보살행을 위한 도구들이 많아졌다. 이 모든 것을 포교나 전법에서 정리할 수 있으며 답을 찾을 수 있다. 이제 불교도 입을 열어야 한다. 이제 우리는 말해야한다. 배워서 나눠야 기도와 보살행이 완성된다. 나와 내 가족만을 위해 기도는 탐심일 뿐이다. 삼독을 끊자고 하는 수행이 기도활동에서 반대로 가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이타적 포교행위라는 보다 크고 넓은 차원의 보살행이 더 깊은 기도 행임을 알려야 한다. 가장 큰 복덕은 법보시임을 몸소 실천하는 불자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부처님의 지혜를 배우기만 하고 이를 나누는 자비행이 수반되지 않고서는 진정한 불자라 할 수 없다. 법보시의 복덕이라는 것은 곧 지혜와 자비행이며, 이 둘을 조화롭게 실천했을 때 비로소 부처님의 제자라 할 수 있다.

대승불교는 초기불교에서의 폐해에서 등장한 새로운 불교개혁운동이었다. 나만 행복을 찾고 안이한 종교에서 벗어나 대중과 함께 하는 폭넓은 이타행을 강조하면서 일어난 운동이었다. 여기서 등장한 보살은 종전의 아라한의 개념을 훌쩍 뛰어넘었다. 이타심을 먼저 부각시킨 이러한 개념부터가 불교를 한층 업그레이드시킨 주요핵심내용이 된다. 한국불교는 대승불교이고, 이타심을 먼저 생각하고 나 또는 나의 수행과 기도를 그 다음으로 여기는 보살운동이다. 따라서 보살행으로서나, 자신의 수행으로서나, 공덕을 쌓는 발원으로나 다 통하는 것이 포교행(전법행)이다.

불교스피치 전문가 이현정 박사는…

조계종 교육원과 전국비구니회, 포교디지털대학서 스피치를 강의 하는 전문가다.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동국대서 신문방송학으로 석사학위와, 정치학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한 저자는 불교방송 공채 1기 아나운서, KBS·EBS 자문위원, 사단법인 한국다문화센터 공동대표 등을 거쳐 현재는 다문화TV 자문위원, 글로벌교육문화연구원 다문화연구소장, 조계종 교육원 승려인증교육 강사 등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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