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뉴질랜드 복지 단상

IMF외환위기를 겪고 나서 대한민국은 혁신, 개혁이라는 단어가 난무했다. 당시의 언론 기사를 보면 유독 뉴질랜드의 개혁에 대한 기사가 찬사 일색으로 등장한다. 나는 1999년 교수에게 6년에 한 번 1년간 주어지는 안식년을 뉴질랜드 오클랜드 대학에서 방문교수로 보냈다. 오직 뉴질랜드의 개혁을 연구해보기 위해서였다. 뉴질랜드의 개혁은 신자유주의적 개혁으로 이름 높았다. 공기업을 민영화하고 민간인을 계약직 공무원으로 채용하고 발생주의 회계를 도입하여 국가재무제표를 작성하는 등 가히 혁명적이라 부를 만 했다.

복지 국가에 대한 이상도
현실에서 다른 반응 보여
나와남의 복지, 기준달라
공동 생존 관점 접근해야

그때 뉴질랜드에는 한국 교민이 많지 않았고 이민 초기 시절이어서인지 동양인을 생소하게 생각하는 뉴질랜드 국민이 많았다. 공원에 가도 말을 거는 사람이 있었고 헬스클럽에 운동하러 가도 이런 저런 질문을 했다. 대개 질문은 빤했다. 일본사람이냐고 묻고 아니라고 하면 중국사람이냐고 묻는다. 역시 아니라고 하면 약간 당황해하며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다. 한국이라고 하면 ‘아...한국’ 하면서 한국에 대해서는 별말을 하지 않는다. 그 다음에 대개 하는 질문은 여기서 뭐하느냐, 이민왔느냐, 언제 왔느냐 등등이다. 내가 뉴질랜드 개혁을 연구하러 왔다고 하니 대부분의 뉴질랜드 사람들은 의아하다는 표정이었다. 자기나라가 뭘 잘하길래 자기가 잘 알지도 못하는 대한민국에서 여기까지 왔느냐는거다.

하지만 뉴질랜드의 정부개혁은 워낙 세계적으로 이름이 높았기에 하루에 평균 1개국에서 뉴질랜드를 방문해 개혁에 대해 조사하고 갔다고 한다. 물론 한국도 여러번 왔다 갔는데 매번 올 때마다 동일한 질문을 했다고 의아해했다. 좀 부끄러운 일이었다. 정보가 공유가 안되고 기록이 안되는 우리나라 특성이 아닌가 싶었다. 어찌되었건 다른 나라에서는 엄청 칭송하는데 막상 뉴질랜드 국민의 반응이 시원찮았다. 나는 국민의 열렬한 지지 속에 개혁이 진행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가보니 그게 아니었다.

뉴질랜드 개혁은 진보적인 노동당 정부가 추진했는데 너무나 보수당적인 정책이어서 지지자들이 이탈하였고 결국 정권을 잃게 된다. 선거 때 보수당은 정권을 잡으면 노동당의 개혁정책을 폐기하겠다고 공약했다. 정권을 다시 찾은 보수당은 약속을 지키지 않고 노동당의 개혁정책을 계속한다. 보수당의 이념에 딱 맞는 정책이기 때문에 구태여 폐기할 필요가 없었던거다.

뉴질랜드 개혁이 국민의 지지를 얻지 못한 가장 큰 이유의 하나는 각종 복지혜택의 축소였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표현에 걸맞는 뉴질랜드의 복지혜택은 정말 감탄할 만했다. 예를 들어 관광여행을 온 내 친구의 아들이 아파서 병원에 갔는데 어린아이는 병원비가 무료여서 한 푼도 지불하지 않았다. 병원에 가기전에는 의료보험에 가입하지 않았으니 얼마나 많은 치료비가 나올까 걱정했는데 쓸데 없는 기우였다. 각종 복지혜택이 축소되자 자살율이 치솟고 국민의 불만이 고조되어 결국 노동당이 정권을 잃은 것이다.

개혁 전의 뉴질랜드 복지혜택은 여러 가지 면에서 감탄할 만했다. 아이가 많으면 나라에서 수당이 나오는데 액수가 제법 많았다. 원주민인 마오리 족 중에서는 아이를 셋 낳고 나라에서 나오는 수당만으로 부부가 일하지 않고 살아간다고 어떤 뉴질랜드 사람이 불평을 했다. 우리는 ‘복지’하면 게으르고 무사 안일한 저소득층이라는 도식으로 반응하기 쉽다. 그처럼 복지란 대한민국에서는 별로 인기 있는 단어가 아니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과거의 여론조사를 보면 ‘가난은 그 사람 탓이다’라는 답변이 50%가 넘었다.

불교 경전은 이상적인 군주를 전륜성왕으로 칭한다. 전륜성왕은 어떤 왕일까? 경전은 무엇보다도 전륜성왕이라면 국민에게 복지를 제공해야 한다고 설한다. 중아함경은 “나라 안에 빈궁한 자가 있거든 재물을 내어 구제하여 주라”고 설한다. 장아함경은 “‘나라에 외로운 이와 노인이 있거든 마땅히 물건을 주어 구제하고 가난하고 곤궁한 자가 와서 구하는 것이 있거든 부디 거절하지 말라”고 설한다. 또한 장아함경에는 부처님의 비유 속에 나오는 왕과 대신의 대화에서 왕의 말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모든 인민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여 모자람이 없게 하였다.”

증일아함경은 “보시하기를 좋아하여 사문과 바라문을 공양하고 외로운 노인을 모셔 기르며 빈궁한 이에게 보시하였다. 네 성문과 성 복판에 창고를 만들어 두고 금, 은, 잡보, 코끼리, 말, 수레와 의복, 침구, 의약, 향, 꽃, 음식을 쌓고, 고독한 이를 위해서는 그 아내를 주선해 주며 갖가지로 보시하되…”설한다. 몸이 아프면 치료해주고 배고프면 밥을 주고 머물 곳을 마련해서 침구까지 마련해주는 총체적인 복지국가가 불교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국가의 모형이다.

증일아함경에 쓰여 있는 ‘고독한 사람에게 아내를 주선해주라’는 구절은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할 구절이다. 사람은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라는 말이 있다. 인간은 단순히 먹고 사는 일, 즉 생존의 기본권에 보장되는 차원을 넘어서야 행복하다고 느낀다. 인간의 외로움까지도 해결해주고 가정까지 마련해주는 삶의 질 차원의 행복을 위한 복지국가가 불교가 추구하는 이상국가이다. 전륜성왕의 역사 속 모델로 간주되는 아쇼카 왕은 이와 비슷한 시도를 하였지만 경전에서 주장한 수준에는 훨씬 못 미치는 복지국가에 불과했다. 과연 오늘날 불교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을까?

복지에 대한 국민정서는 아직도 부정적이다. 복지는 뭔가 가난한 사람에게 퍼주는 느낌을 준다. 우리 국민의 머리 속에 있는 복지에 대한 정서는 오랜 기간 형성된 것이라 지금도 달라졌다고 속단하기엔 이르다. 최근의 여론조사를 보면 복지에 대한 국민여론은 호의적으로 돌아섰지만 막상 복지정책이 확대되면 반발이 더 클지도 모른다. 여론조사는 어디까지나 여론조사이다. 막상 현실에서 닥치면 반응은 다를 때가 많다.

아무리 복지에 대한 국민정서가 부정적이라 해도 불교교리는 복지국가를 이상적인 국가로 생각한다. 연기법에 의해 나와 네가 분리된 존재가 아니고 나와 세상이 독립된 별개 실체가 아니라면 우리는 타인의 힘든 삶을 외면할 수 없다. 오늘날 형성되어 있는 나는 다른 사람과 생각, 말, 행동을 주고 받으며 형성된 것이다. 나라는 임시적 존재는 대한민국에서 태어났기에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자랐기 때문에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한국 사람과는 다르다. 나에게는 세상의 요소가 있고 나 이외의 모든 타인의 요소가 있다. 대한민국의 기후와 토질이라는 요소도 분명 나 안에 있다.

고려시대의 한민족은 500만명이었다고 한다. 삼국시대는 몇명이었을까? 그 이전은 또 몇명이었을까? 자꾸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소수의 사람이 한민족의 기원이다. 알고보면 우리 모두 참으로 가까운 가족이다. 온 인류가 아프리카의 루시라는 흑인 여성의 후손이라고 한다. 인류학적으로 루시라고 이름 지은 뼛조각이 모든 인간의 선조라는 주장은 너무나 아득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비슷하게 생긴 한민족이 동류의식을 느끼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한 가족이나 마찬가지인 우리가 복지로 물질을 서로 나누고 생존의 최소수준을 보장해주는 것은 그렇게 아깝고 화나는 일은 아니다.

복지국가가 불교가 추구하는 이상국가의 모습이라면 당장 내년 예산부터 복지항목을 대폭 증액해야 할까? 이건 또 다른 이야기다. 그동안 경제학에서는 두 가지 주장이 대립했다. 하나는 낙수효과 이론이고 하나는 분수효과 이론다. 부자가 잘 살아야, 기업이 돈을 벌어야 가난한 사람이 먹고 산다는 주장이 낙수효과 이론이다. 반대로 가난한 사람의 소득이 증가해야 기업도 돈을 벌고 부자도 돈을 번다는 주장이 분수효과 이론이다. 어떤 주장이 맞을까? 1929년 경제대공황을 벗어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 아직도 경제학자들의 의견이 엇갈리듯이 낙수효과과 분수효과에 대한 논란도 마찬가지다. 그 누구도 어떤 주장이 맞는지 판단할 수 있는 권한도 능력도 없다.

복지예산을 증액해야 한다는 정치적 견해와 산업단지 예산을 증액해야 한다는 정치적 견해가 있다고 하자. 불교신도라면 복지예산 증액을 주장해야 할까? 낙수효과를 주장하는 불교신도는 복지를 위해서도 산업단지 예산을 증액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산업단지를 개발하여 일자리가 창출되고 기업이 돈을 벌고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면 세금도 많이 걷히고 복지를 위한 재원도 마련된다는 주장이다. 얼마나 논리적인가? 사실 지난 수 십 년 동안 이러한 생각이 분수효과를 주장하는 생각을 압도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나도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반대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즉 복지예산을 증액해서 가난한 사람이 돈을 쓰게 해야 기업도 돈을 벌고 부자는 더욱 돈을 번다는 분수효과 주장이다.

복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불교신도라고 해도 낙수효과를 믿는 신도와 분수효과를 믿는 신도의 생각이 이처럼 극명하게 다르다. 불교 이상국가가 복지국가라는 불교교리는 복지예산을 증액할까 산업단지 예산을 증액할까라는 논란에는 별로 도움이 안 된다. 그렇다고 너무 실망할 필요는 없다. 만약 수 십 년 동안 낙수효과 이론에 의해 예산을 편성했으나 도무지 복지가 나아지지 않았다면 한 번 쯤은 분수효과 이론을 시행해보아야 한다. 진정 복지를 위한다면 말이다.

복지국가 망국론이 세상에 나온지는 수 십 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1인당 국민소득은 물론이고 국민 행복도에 있어서도 복지국가가 상위 10개국을 휩쓸고 있다. 낙수효과가 맞지 않는다는 증거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여전히 낙수효과를 주장하는 사람은 다른 주장을 하겠지만 분수효과에 기반한 정책을 한번은 시행해볼 만하다. IMF, World Bank, OECD 등은 최근에 그동안 세계를 지배했던 낙수효과 이론에 대해 의문을 표시하면서 분수효과 이론을 지지하고 있다. 불교의 관점에서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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