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성스러움과 속됨

성직자가 도둑질을 했습니다.
성직자가 도둑이 되는 순간입니다.
성직자가 성추행을 했습니다.
성추행범이 되고 맙니다.
성직자가 살인을 했습니다.
살인수로 수감됩니다.

성직자나 살인자는 타고나지 않고 신분이나 지위로 결정되는 게 아니라 그 행동에 있군요.

16-1 앙굴리말라는 부처님 당대에 살인마로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했는데 원래는 브라만 계급으로 한 종파의 수제자였습니다. 하루는 스승이 지방으로 떠나면서 앙굴리말라에게 사모님과 제자들을 잘 보살피라고 부탁합니다. 그는 존경하는 스승의 분부를 성실하게 이행했지요. 스승이 며칠 후 돌아왔을 때 그를 시샘하던 제자 하나가 스승에게 그가 앙굴리말라가 사모님과 통정했다고 음해합니다. 불같이 일어나는 분노와 질투를 애써 감추고 스승은 앙굴리말라에게 평소처럼 자애롭게 이야기 합니다. “네가 나 없는 동안 사모님과 제자들을 잘 보살폈으니 너에게만 비법을 전수하겠다. 천명의 손가락 마디로 목걸이를 만들면 진리를 얻게 될 것이야. 그러겠느냐?” “예, 스승님.” 그날부터 앙굴리말라는 999명을 죽이는 살인마가 됩니다. 마지막 손가락 마디를 채우려다가 길을 가는 부처님을 만납니다. 옳다구나 하고 잡으려 하지만 아무리 빨리 쫓아가도 부처님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까까중아, 게 멈춰라”고 소리 지릅니다. 부처님은 빙그레 돌아보며 “나는 이미 멈추었다. 너야말로 멈추거라” “무슨 궤변이냐?” “너는 살인과 탐욕을 멈추지 못하고 있지만 나는 이미 탐욕과 분노를 멈추었다” 부처님의 온화한 모습과 자비로운 말씀에 감화된 앙굴리말라는 그날로 출가하여 음해의 가르침과 자신의 명예욕으로 인해 살인한 어리석음을 깨닫고 열심히 수행하여 번뇌를 끊은 님이 됩니다. 그는 원한에 찬 유족들의 돌멩이 세례를 받지만 조금도 원한 없이 고요히 죽음을 맞습니다.

앙굴리말라에 대한 가르침
‘현재의 행동, 미래의 결과’
‘업’이란 행위 책임 가져야


16-2 인도에서 브라만 계급은 태생적으로 성직자입니다. 천민 계급은 영원히 천민입니다. 이것은 브라만교(또는 힌두교)의 불문율입니다. 그러나 브라만도 천민도 태생적으로 숙명적으로 결정되지 않는다고 불문율을 비판하고 나선 종교 혁명가가 있었으니 고타마 붓다가 바로 그입니다. 그는 행위에 의해 그 사람이 결정된다 하였습니다. 업(카르마-행위)) 결정론은 운명론으로 오해되기도 하지만 사실은 운명론에 대한 비판입니다. 사기치면 성직자가 아닌 사기꾼이 되고 천민이라도 행위가 삶이 청정하고 고결하면 성직자가 된다면서 당시 브라만교의 고정된 계급관을 통박합니다. 그래서 붓다는 철저하게 출생 신분의 차별을 두지 않고 제자를 거두었지요. 대대로 성직자 지위를 누리던 브라만 계급에게는 엄청난 모욕이었기에 붓다는 수없는 브라만 사제들의 도전과 공격을 받습니다.

16-3 수행자는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의 행동을 닦는 이를 일컫습니다. 성직자는 외양적 의복이나 종교 의례를 집전하는 형식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 아니고 전념으로 삶을 수행에 헌신할 때 붙여지는 존칭입니다. 우리가 흉내 내기 어려운 행동으로 삶을 살아가기 때문에 존경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요즈음은 행위를 맑히는 자가 아닌, 성스러운 장소나 성스러운 분위기 등 외적 성스러움에 가치를 부여하여 그 속에 안주하고 의지합니다. 그리하여 보다 성스럽고 권위롭기 위하여 더 높은 첨탑과 더 큰 불상의 웅장한 사원과 교회를 짓습니다.

16-4 장자연 사건이 잊혀질만 하자 최숙현 사건이 터졌습니다. 둘 다 연예계와 체육계에 은밀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폭력의 단면입니다. 폭력 행위는 성폭력이 동반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위를 이용하여 약자가 항거하기 어렵게 만들어 자살에 이르게 한 사건들이지요. 참혹하게 인격을 유린하여 그 분노와 억울함이 극에 달하건만 감독 기관과 사법 기관이 약자보다는 강자에 휘둘려서 해결될 기미가 없자 극단적 자살로 세상에 호소하기에 이릅니다. 이러한 원성에 공권력이 침묵하면 사회 정의가 어디서 실현될 수 있을까요? 심지어는 성폭행 사건을 담당하는 수사관이 피해 사실을 조사한다며 성추행 또는 성폭행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힘의 우월 관계를 이용한 갑질이 다양하게 사회를 어둡게 만들고 절망하게 만들곤 합니다. 그 현장이 가정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심지어 교회와 사찰에서, 그리고 상담 현장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자살도 폭력이고, SNS나 인터넷, 언론의 폭력도 폭력입니다. 권력의 맛은 마약처럼 끊기 어려워 반복해서 잘못을 저지르게 됩니다. 가르치고 명령하고 감독하는 위치에 있으면 아랫사람의 순종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착각에 빠지게 하고 지배욕을 부추깁니다. 계급의 권위에 눌려 자기 의사를 솔직히 표현 못하는 약점을 이용하는 거지요.

16-5 언어적 폭력을 폭력으로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큰 소리로 야단치고 비난하고 욕설하여 아이들의 마음에 멍을 남기면 그 행위는 그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도 모르게 학습되어 자라서 자신도 그 행동을 답습하게 됩니다. 최근까지도 가정 폭력은 가정사라고 보아 넘겨 출동한 경찰들도 미온적 태도로 일관하였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집요하게 따라 다니는 스토킹은 결별을 선언한 애인에게 집까지 찾아가 살해 위협을 하건만 적극적 조치를 취하지 않아 부모까지 살상하는 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사회의 안전망 강화와 함께 근본적으로는 인간은 그 누구도 소유물이 될 수 없는 존중 받아야 할 존재라는 보편적 인식이 필요합니다.

16-6 무아의 심리사회적 의미는 무소유입니다. 자식은 존중 받아야 할 인격체로 소유할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하는 무지가 내 것으로 생각하고 지나치게 집착하거나 함부로 학대하는 행동을 낳습니다. 아동 학대의 주범은 대부분 부모입니다. 병적 애착과 혐오로 기인한 상처가 평생을 지배하고 삶에서 폭력적 성향을 표출하는 배경이 됩니다. 이 무지의 신념이 모든 고통의 원인이라고 붓다는 선언합니다. 12연기는 “잘못된 생각과 믿음이 그릇된 행동을 낳는다(無明緣行)”로 시작합니다. 올바른 견해와 생각이 바른 행동을 낳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자신의 과오를 자각하는 깨달음이 중요합니다.

노자도 “낳되 소유하지 않고(生而不有) 기르되 지배하지 않는다(長而不宰)”고 도와 덕을 정의합니다. 만물을 낳았으되 자기 것으로 삼지 않음은 도의 품성이고 만물을 기르되 지배하지 않음은 덕의 작용이라는 뜻으로 현대의 참교육의 원리가 담겨 있군요.

16-7 자신이 현재 하고 있는 행동의 영향은 미래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견해는 탁월한 진리입니다. <밀린다 팡하>에서 알렉산더 대왕의 후손인 메난드로스(밀린다) 왕이 인도의 고승 나가세나 존자에게 질문합니다. “어떤 사람은 오래 살고 어떤 사람은 단명하고 어떤 사람은 부귀한 집안에 태어나고 어떤 사람은 빈천한 집안에 태어나고 어떤 사람은 선량하고 어떤 사람은 인색하고 탐욕스러운데 왜 이렇게 다릅니까?” 라는 질문에 “업이 다르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합니다.

일란성 쌍둥이라도 업이 다르므로 성격도 삶의 방식도 다르다는 것으로 80억 인구면 80억 종류의 삶이 제각각 펼쳐지는 것입니다. 각자의 삶을 주인공이 되어 개성 있게 살아가는 게 중요합니다. 그 책임을 운명이나 신이나 부모와 나라에게 떠넘기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요. 자신의 삶은 어디까지나 자신이 만들어 나가는 것이지 운명이나 신이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삶을 어떻게 펼치느냐는 자신이 어떻게 마음을 쓰고 행동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 깨달은 님의 가르침입니다.

16-8 윤회에 대해서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믿지 않는다구요? 그러면 불자가 아니군요.(웃음) 계절이 순환하듯이 업설이나 윤회설은 믿음이 아닌 사실입니다. ‘업이 생을 이어 상속된다’는 가르침은 단순히 윤회한다는 믿음을 넘어서는 혁명적 사유입니다. 불변의 영혼이 있어서 태어나기 전이나 갓난아기 때나 청소년기나 장년기를 거쳐 노년에 이르기까지 변함없는 자아가 있다고 믿고 그 영혼이 다시 환생하거나 전생한다는 믿음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쪽에는 그런 영혼은 없고 몸이 죽으면 끝이라는 견해가 자리하고 있지만, 붓다는 행위로서 업이 연이어진다고 말합니다. 과거생의 나와 현재 생의 나와 미래 생의 나는 불변의 나가 아니고 동일하지 않지만 없는 게 아닙니다. 아기의 내가 있고 청소년의 내가 있고 노년의 내가 있듯이, 행위(업)에 따라 수시로 의식이 변하고 마음 상태가 변하며 그 업이 전생으로부터 다음 생까지 면면히 이어진다고 니까야(초기경전)에서 붓다는 누누이 설명합니다.

16-9 위에서 열거한 모든 사건들의 이면에는 제어되지 않은 탐욕과 분노가 또아리를 틀고 있음을 봅니다. 특히 앙굴리말라에서 새겨보아야 할 점은 첫째, 살인자마저 본래부터 살인자가 아니라 잘못된 신앙과 자신의 탐욕이 살인을 행하게 하는군요. 둘째, 살인자마저 수행자가 될 수 있고 깨달으면 탐욕과 분노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 존경하는 스승이나 경전의 가르침이라도 맹목적으로 믿지 말고 자신과 타인에게 이익이 되는지 숙고해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넷째, 자신이 한 행동은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이고 마지막으로, 내면의 의도를 잘 살펴보아 참회하면 자신의 업을 정화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어 다음 생에 가지고 갈 유일한 자산은 자신이 평생 살아온 행위(업)라는 붓다의 가르침은 자살이 모든 것의 해결이거나 끝이 아님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성스러운 건 무언가 밝고
맑고 빛나고 담백하다.
속됨은 무언가
어둡고 탁하고 칙칙하고 끈적거린다.
성과 속의 차이는 욕망의 절제와 욕망의 추구.
욕망의 파노라마에서 방향의 전환.

<한별정신건강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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