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 세상에서 누구든지 막론하고 더불어 같이 부처입니다

질문 마음공부를 나름대로 하고 있는데 진전이 없는 것 같아서 답답합니다. 어리석은 질문인 줄 알지만 뭔가 좀 탁 깨달을 수 있는 묘법은 없는 것일까요?

답변 옛날 얘기 하나 할까요? 옛날에 어떤 사람이 공부를 하러 절로 들어갔는데요, 절에 인제 선지식들이 계신 데는 모두 선사님들이죠. 그래 인제 공부를 하시는데 거기 들어간 사람들은, 지금 강원에 가는 사람들은 학인들이고, 모두 그 뒤를 따라서 가는 사람들은, 즉 말하자면 선을 공부하는 스님네들이죠. 근데 스님네들이 한 다섯이서 떡 들어가니깐 “여기는 들어오지 못하는데 어떻게 들어오느냐.” 하니깐 “들어오지 못하는 데도 있습니까?” 이러거든요. 그래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끈 못 봤느냐? 새끼를 매 놨는데 그 끈을 못 봤느냐?” 그러니깐 새끼도 보고 방에 앉아 계신 어른도 보고 그랬다고 하더랍니다. 허허허. 그러니깐 ‘이놈 꽤 저거 하구나.’ 그랬는데 넙죽넙죽 들어가서 앉으니깐 어떡합니까.

살리고 죽이는 거는 그 주장자에 매여 있으니
남이 이러고 저러는 대로 쓸리지 말고
자기 주장자를 세워라.
탁 깨달을 수 있는 묘법은 없나요?

그러니깐 “들어오지 못할 데를 들어왔으니깐 한번 맞아라.” 그러고선 주장자로다가 한 대 치니깐 “아이, 그거 참! 자리가 편안하더니 그 주장자가 들어오는군요.” 그러면서 뭐라고 그러느냐 하면 “제 주장자가 부족해서 스님이 주장자를 주시니 참 감사합니다.” 그러거든요. 그러니까 또 인제 그 다섯 사람이 죽 앉아 있다가 한 사람이 일어나더니 뭐라고 그러느냐 하면 “아이, 저희는 지금 귀신 방귀씨를 못 찾아서 이렇게 돌아다닙니다.” 그러니깐 “귀신 방귀씨를 찾으러 왔어? 그거를 바깥에서 찾으러 다니느냐?” 그러니까 “바깥이고 안이고 간에 모르는데 어떡합니까?” 그러더랍니다.

그러더니 또 한 사람은 있다 하는 소리가 “아, 귀신이 말을 하는데 여기 가면 방귀씨를 찾는다고 그럽디다.” 그래서 “그 귀신이 말을 해?” 그러고선 또 잠자코 있었더니 또 한 사람이 있다 하는 소리가, 아니, 귀신이 하는 소리가 거길 가면 아주 기르기도 좋고 아주 키우기도 좋고 참 좋은 데라고 그러면서, 거길 막아 놨으니까 그걸 박차고 들어가라고 그러더랍니다. 그래서 다들 들어가서 그런 얘기들을 하고 있는데 다른 얘기는 할 거 없이, 거기 있는 사람 하나 부르더니만 “한 방망이씩 때려 봐라, 튀나. 매가 튀나 때려 봐라.” 그러니깐 그냥 한 방망이씩 가서 안기거든요. 한 방망이씩 안기니까 그 맞고 하는 소리가 “어이구!” 그러면서 “방귀씨도 때리니까 아프네.” 이러더랍니다. 그러니깐 “그럼 방귀씨는 얻었구먼.” 이러니깐 “아, 방귀씨는 얻었는데 이거 방귀씨를 기를 줄은 몰라서 그렇습니다.” 그러거든요. 그래서 “그러면 한 방망이 더 때려 봐라.” 그러니까 벌떡들 일어서면서 하는 소리가 합장배를 하고는 그냥 고요히 절을 하더랍니다.

그래 절을 하는데 무슨 생각을 하고 절을 했겠습니까. 어떻게 고이 기르고 어떻게 먹여서 잘 기를 수 있나. 방귀씨를 말입니다. 귀신 방귀씨를 얻기는 했는데 어떻게 잘 키울 수 있으며, 뭐를 먹여야 하며, 그거를 알러 갔는데 방망이로 때린다니까 또 한 번 맞았더라면 좋을 걸 안 맞고는 일어서서 곱게 절을 하더랍니다. 무슨 연고로 그렇게 곱게 절을 했는지 모르시죠? 아시겠습니까?

하여튼 우리는 이 세상에서 누구든지 막론해 놓고 더불어 같이 부처입니다. 왜 부처냐. 자불을 누구든지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생명력이 바로 자불이자 불성이자 그게 바로 주인공입니다. 주장자자 에너지자 그렇습니다. 그러니깐 그거를 잘 생각하셔서 내 본마음이, 예를 들어서 한 배가 고프니까 소나무 가지를 잘라 먹으려고 하다가 보니까 소나무 모가지를 이렇게 자르면 그 가장자리에 그거만 남죠? 그러면 소나무도 내 대가리 자른 것처럼 아플 거란 말입니다. 아프고도 쓸모없이 되죠. 그래서 맨 끝에 가장구를 하나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가장구 하나 먹어. 가장구. 이렇게 만났으니 만났으면 인연인데 윗도린 자르지 말고 아랫도리만 잘라 먹어.” 이렇게 말을 하더랍니다, 나무가.

그래서 그거를 잘라서 “참 미안하고 고맙다.” 이럭하고선 잘라서 물을 빨아 먹으려니까 물이 나오지 않아요. 가장자리, 그 회초리 가장구기 때문에. 그래서 그 껍데길 벗겨 버리고선 그 속에 든 그 하얀 거, 그 물만 빨아 먹고선 물을 마시는데, 물을 마시는 데도 물을 막 마시려고 하는데 물을 세 모금만 마셔야지 더 마시면 안 된다 이러거든요. 근데 세 모금이란 뭡니까. 우리가 우주 삼세를 말해도 되고 삼 일을 말해도 되고 그런 거죠. 삼 년을 말해도 되고 삼십 년을 말을 해도 되고. 그렇게 된 도리를 말합니다.

근데 “세 모금만 마시지 더 마시면 안 돼.” 이래서 그걸 먹지 못하고 무슨 생각을 했나 하면 ‘야, 물도 살아 있고 물도 이게 모두…. 우리가 물, 불, 흙, 바람 이걸로 모두 생명들이 돼서 모습들이 생겼지마는 이 생명들이 생기고 이 모습들이 생겨서 하는 것도 이 지수화풍 때문에 모두가 먹고 살고 우리가 또 지수화풍을 먹고 살고 이러니까 그 이유를 가르치려고 그러는가 보다.’ 그렇게 생각하고 한 모금을 먹고선 세 모금을 한 모금으로 그냥 때웠죠. 때우고 나서 한 모금을 먹고 ‘이건 세 모금이 다 들어갔네.’ 이러곤 하니깐 ‘그 삼세가 한꺼번에 들어간 셈이네.’ 또 이렇게 들린단 말입니다. 뜻으로.

그래서 그것을 배우고 이렇게 하나하나 하나하나씩 배워 나간 게 나중에는 다 이렇게 터지는 것이 그땐 성불이 되고, 처음엔 견성이 되고 성불이 되고 이러는 거죠. 그러니깐 여러분들도 그냥 한꺼번에 알려고 애쓰지 마시고 그저 하나하나, 살아나가면서 하나하나 ‘이 먹는 것도 먹는 사이 없이 먹어지는 거로구나. 우린 모두 탤런트 역할을 하고 사는 거로구나. 그런데 어떤 역할을 맡았느냐에 따라서 사는 게 부족지 않고 부족하고 이게 있구나.’ 이거는 누구가 하려고 아무리 앨 써도 안 되는 거고 그렇게 되게끔 아무리 할래도, 잘 살래도 안 되는 거거든요, 그게.

억지로는 못 해요. 자기가 타고 나온 것을 가지고만 사는 거죠. 이천 원 가지고 나왔다면 이천 원만 가지고 평생을 사는 거죠. 그런데 이 공부는 그렇게 하시면 이천 원도 삼천 원도 어려움도 부족함도 이게 전부 없어지는 거죠. 자유껏 사는 거죠. 그러니 자유자재하시고 잘 사십시오. 그러니깐 여러분이 잘 그걸 이해를 하시고 앞으로는 살림하면서도 ‘이 살림이 도(道)구나.’ 이렇게 생각하시고 열심히 하십시오.

몸과 마음 자유스럽게 쓰고 싶어요

질문 공부한 도인들은 마음을 자유자재로 쓰신다는데 저희 같은 범부들도 마음공부를 하다 보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자기 몸과 마음을 갖고도 왜 마음대로 안 되는지 답답하기만 합니다. 저도 몸과 마음을 자유자재로 쓰고 싶습니다.

답변 그러니깐 자유권을, 인간에게는 다 자유권을 줬는데, 마음을 자유권으로 쓰라고 줬는데 자유스럽게 쓰질 못해요. 이게 적다 크다 판단을 하기 때문이죠. 속으로는 이게 적다, 많다 이렇게 판단을 하지만 만약에 급한 일에는 판단도 필요 없습니다, 그게.

예전에 6·25 때 모래톱에서요, 총이 막 날아오니깐 총알이 다리에 맞아서 다리가 그냥 이렇게 부러졌는데도 막 그냥 뛰는 거 있죠, 급하니까. 마음이란 그렇습니다. 마음이 느긋하면 좀 천천히 걸어가게 돼 있고, 또 마음이 누긋하면 아프다고 그냥 꾀를 부릴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러나 마음이 게으르지 않은 사람은 아파도 그냥 ‘일어나야지. 할 건 해야지.’ 할 때에, 마음이 그렇게 돌아갈 때 바로 일어서집니다. 여러분들이 가난하다, 뭐하다 하지만 그렇게 마음이 차차분해선 그냥 깔아지고, 병원에 가서 진찰을 하면 ‘난 이제 죽는다.’ 이런 거 있죠, 왜? 그런 거 많지요. 그러니까 자기 마음이 죽으니까 이 몸속에 있는 생명들도 다 죽는 거예요. ‘인젠 죽었다.’ 하는 거요. 이 몸속에서 작용을 해 줘야 할 생명들이 ‘나는 죽었다.’ 하니 그게 살 수 있겠습니까?

생각들을 해 보세요. 위 공장의 책임을 맡아 가지고 있는 관리인 또는 간장 관리인, 소장 관리인, 대장 관리인, 콩팥 관리인, 방광 관리인, 척수·척추 관리인, 이 모두의 관리인들이 다 폭삭 그냥 죽는 거예요. 마음이 말입니다. 의욕이 없어지고.

그러니까 아이, 이건 첫째 선두자가, 앞에 선 선두자가, 마음이 ‘야, 이건 다 죽겠구나. 인젠 죽었다.’ 이러면 그 밑으로 쭐쭐 내려가면서 다 죽겠다는 거예요. 일어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죽는 거죠. 그러니까 살리고 죽이는 거는 그 주장자에 매여 있으니, 그렇게 남이 이러는 대로 쓸리지 말고, 저러는 대로 쓸리지 말고 내 주장을 세워라 이겁니다. 악하고 선한 거를 다 놔야 된다 이런 원리가 거기에 있는 겁니다. 다 거기에 한데 합해서 돌아가죠.

여러분들이 살아나가면서 정히 급하고 그럴 때도, 이 국난에 이렇게 처해 있을 때도 여러분들이 미리미리 이런 걸 알면은, ‘회사가 어떠한 지경에 놓여 있게 된다. 이렇게 이렇게 될 수 있겠구나.’ 할 때에 벌써 미리미리 이걸 처리를 해야 되겠죠. 다 인제는 꺽어지고 다 저거 한 연에 이걸 일으켜 세우려니까 힘들죠. 가정도 그렇고 모든 게 다 그래요. 부부지간에 싸우고 헤어지는 것도 그렇고 모든 게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내가 있기 때문에 모두가 싸우는 거거든요. 내가 없다면 뭐가 싸울 게 있습니까? 부부지간에 만난다 하더라도, 자식의 인연을 짓는다 하는 것도 다 끼리끼리 만나는 인연입니다. 금은 금대로 모이고 인연이 되고 무쇠는 무쇠대로 인연이 되고, 시장에 가면 사과는 사과대로 인연이 되고 배는 배대로 인연이 되고, 이렇게 인연이 된 사람들끼리 한 가정이 됐다면 그 가정에서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그러니 모두 내 탓으로, 각자 내 탓으로 돌리고 둘 아니게 그렇게 사랑할 수 있고, 부드러운 말 해 줄 수 있고 부드러운 행동 해 줄 수 있다면, 그 집은 아주 화합이 되고 부유하게 늘어 가고 안 되는 일이 없이 그렇게 잘 걸어갈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마음을 마음대로 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을 가지고 내 마음대로 쓰지 왜 만날 그렇게, 그렇게 좁게 그냥 자기 마음을…. 꿈을 꾸고도요, 그것도 맘대로 못 해요. 아, 그거 그냥 주인공에다 탁 놓고 ‘그것도 거기에서 화해서 보이는 거니깐 거기에서 다 알아서 하겠지.’ 하고 탁 놓으면 될 거를 ‘이게 꿈이 나쁘니 무슨 일이 생길까. 뭐가 저거다.’ 이렇게 생각을 하니깐 일이 생기고 마는 거죠. 그게 팔자 운명이에요. 마음을 마음대로 쓰는 사람들은 팔자 운명이 붙지를 않아요.

이게 그걸 모르면 팔자 운명으로 돌아가지만, 우리가 과거도 현실이고 미래도 현실이고, 현실도 공했다. 그저 마음에 따라서 육신이 움죽거리니까 어떤 거 움죽거렸을 때 내가 움죽거렸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매사 게 다 그렇죠. 그래서 반가워서 악수를 하니까 “어떤 게 먼저 가더냐?” 하니까 마음이 먼저 가더라. 그러니깐 손이 그냥, 그냥 따라서 가더라. 그러니까 몸뚱이 하나 움죽거리는 게 전체예요. 전첸데 그렇게 움죽거리는 걸 잘 리드해서 잘 다스려서 이렇게 자기가 마음을 잘 내면 될 거를, 요만한 것도 잘 못 내고 크게 만들어선 그냥 불려 가지고는 오히려 그냥 자기가 상처가 나고 문제가 이루어지는 거죠.

여러분들이 살면서 그 마음을 안유시켜서 편안하게 만들고 사는 게…. 한 철 사는 게, 캠핑 나와서 한 철 사는 게 그렇지, 뭐.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냄비가 있으면 냄비대로 솥이 있으면 솥대로 그냥 이렇게 사는 거지, 뭐. 한 철 사는 건데. 그렇게 좀 마음을 넓게 쓰고 그렇게 한 철 산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영화에서 탤런트들이 한 철 고렇게 영화 막이 내리면 그뿐인 거를, 뭐, 갈 때 거지 역을 맡으면 어떻고 머슴 역을 맡으면 어떻고 대왕 역을 맡으면 어떻습니까? 칼잡이 역을 맡든 도둑 역을 맡든, 어떤 역을 맡아도 그 단순하게 한 막이 내리면 그뿐인 줄 알고 있으니깐 그거 아무렇게나 나가도 편안한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길다고 몇천 년 몇만 년 살고 이러는 줄 알고 이 모습을 가지고 그냥 모두 이거는 차곡차곡 욕심 많게 쌓아 두려고 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부질없는 일이죠, 모두가. 이 모두가 부질없는 일이죠. 그래서 내가 낑겨 둔 뭐가 있다면 빨리 내줘야 마음이 시원하니까 빨리빨리들 나누어주는 것이, 또 마음도 역시 그래야 우리가 회향을 했다고 할 수 있죠. 집을 지어서 끝을 마쳐도 회향이고, 밥을 지어서 밥을 먹고 나도 설거지를 다 해야 회향입니다.

저 나무들도 보세요. 나무들이 말입니다, 다 자기 뿌리에 그냥 몽땅 다 달려 있는데 싹이 무슨 걱정입니까, 글쎄. 바람이 부니 걱정입니까, 비가 오니 걱정입니까? 걱정할 게 하나도 없어요. 뿌리에다가, 뿌리에서 다 하는 거기 때문에 뿌리가 싹을 죽이게 되면 요 뿌리가 더 내려서 깊이 박혀요. 그것도 생각이 있고 말을 하고 그래요. 흔들흔들해서 비가 와서 넘어질 것 같으면 그냥 뿌리를 그냥 사방에다가 그냥 넓게 박아요. 저런 나무들도 그런 생각을 하고 ‘아이고, 올해는 많은 비가 오고 많은 장마가 드니까 내가 뿌리를 튼튼하게 둬야겠다.’ 하는 생각이 있어서 그렇게 실천을 하는데 하물며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못 해서 어떡합니까.

짜장면 소릴 내가 잘하는데 하여튼 보지도 않고 먹어 보지도 않았다면 요다음에 짜장면 얘기를 해 드려도 그 먹고 싶은 생각을 못 합니다. 그러나 들은 게 있으면 먹고 싶은 생각을 하게 되죠. 그러니까 ‘스님이 이러한 말씀을 그전에 하셨는데 나도 좀 해 볼까.’ 이렇게, 급하면 그렇게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그것에 맛이 들어 그 줄을 잡고 따라가는 겁니다. 한 발 한 발 딛다 보면 이 세상을 두루 할 수도 있는 것이 바로 이 공부, 방편입니다. 방편이자 실천입니다, 그게.

천도재 지내고 싶은데 돈이 없어서…

질문 조상 천도재를 지내고 싶은데 돈이 없어서 마음만 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꼭 상을 안 차려도 우리가 마음을 잘 낸다면 천도가 될 수 있을까요?

답변 난 어떤 때는 그래요. 여러분들이 지극정성으로 없는 돈도 해 가지고 그냥 조상들을 위해서라든가 뭘 이렇게 해 가지고 오시는데 “아이고, 당신네들이 부처요.” 내가 그럽니다. “이러는데 어찌 부처가 안 되리.” 이러고. 그리고 또 때로는, 내가 언젠가 그랬죠. “빚을 내서 가져오지도 마라. 당신네 고통이 내 고통이다.” 이랬죠. 또 때로는 여러분이 정성을 들이는 거를 남에게 줘서 보내는 것도 있어요. 왜 남을 줍니까? 내가 가져와서 해도 시원치 않은데. 그게 공덕이 다 되리라고 생각도 못 할 텐데 어떻게 남을 줘서 그 심부름을 시킵니까? 그 심부름값은 안 빠지는 겁니까? 심부름값도 빠지는 겁니다. 그래서 절에서는 이 쌀을 그냥 무겁게 이고 와도 그걸 스님네들이 받지 않습니다. 그이네 공덕이 사해질까 봐. 초 한 자루를 가져와서 이렇게 가져오고 그 무겁게 그 뭘 들고 와도 아주 그냥 “고생하는 끝에 좀 더 하십시오.” 그러고 그냥 안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정성을 들이는 거를 딴 사람 통장에다 넣어 준다, 대신 해 달라 이러는데 그러면 그거 무횹니다. 어떻게 그게…, 하다못해 예를 들어서 문 바깥에서 저, 돈 한 잎 쌀 한 되박을 이렇게 가져와도, 그것만 가져와도, 마음으로 깊이 생각하고 왔으면 그거를 벌써 문 바깥에서 아니라 문 안에서 생각하는 반면에 벌써 부처는 알고 있다 이겁니다. 자기가 알고 있으니깐 일체가 다 알게 되는 거죠. 자기가 마음 나쁘게 쓰고 이렇게 마음먹는다면 일체가 다 알게 되지, 그거 보지 않고 듣지 않는다고 모를 것 같습니까. 다 알면서도 말을 안 할 뿐입니다. 모두가 자기가 짓고 자기가 받는 거니까 말입니다.

그러니깐 그 꾀를 피지 마시고 그 항상 자기가 할 거는 요만한 거 한 푼이라도, 하다못해 요만한 한 조가리라도 가져왔으면, 그거 없는 집은 있는 집 백만 원보다도 더 큰 거 아닙니까. 그것을 가져올 때 정성스럽게, 마음을 정성스럽게 넣어서 정성스럽게 갖다 놓으면 그거를 그 집을 위해서 정성스럽게 또 써 주는 스님네들이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집 스님네들은 남의 돈은 이렇게 가져오는 거를 그냥 그저 아무렇게나 쓰지 않습니다. 절대 요만한 거 하나 허탈히 쓰는 법이 없습니다. 항상 그렇게 알고 가기 때문이죠.

이 모두가 우리의 마음에 달려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음을 항상 그렇게 하고 있으니까 항상 일체제불과 우주와 더불어 다 그냥 연락이 되고, 다 이렇게 연락이 돼서 예전에 그 부처님한테 연등부처가 “너 이다음에 태어나면 석가가 되거라.” 이러고 수기를 주셨습니다. 여러분들은 생각은 어떻습니까? 수기를 준 연등부처가 따로 있고 수기를 받은 석존이 따로 있겠습니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지금 자기의 불성이 발현이 되고 자기가 지금 현재 자기와 둘이 아니게 그게 상봉을 한다면 모두가 이 몸뚱이 속에 있는 생명들도 다 보살로 화하게 되는 거죠.

그렇게 해서 모두가 이렇게 되면은 일체제불과도 같이 찰나찰나 통신이 되고, 찰나찰나 모이고, 찰나찰나 나투고 이렇게 하는 까닭에, 그것은 모두가 합의한 마음으로 그렇게 잘하니깐 모두가 합의한 마음으로 이렇게 자기 자불이 연등불로 화해서 수기를 준 거지, 누구가 석존한테 “너 석가가 되거라.” 그러고 다른 부처가 이 부처한테 말한 게 아닙니다. 자기 자불의 연등불이 연등불로 화해서 그렇게 수기를 주신 거기 때문에 수기를 준 사람도 없고 받은 사람도 없다 이렇게 나오죠. 받은 사람도 없고 준 사람도 없지만 그대로 연등불은 연등불이다. 이 세상에 연등불로 화해서 수많은 일체 중생들을 다 인연을 지으셨다 이렇게 할 수 있죠.

그러니까 정히 없어서 천도를 못 시키시는 집들은 전부 자기 주인공에다 놓으세요. 모든 거를, 죽은 사람들이 조상들이라면 자기 주인공에다 모든 걸 한데 놓으란 말입니다. 거기다 놓고 자꾸 가다 보면 조상들도 자기가 공부하는 대로, 차원대로 그걸 알고 공부하게 돼 있어요. 그래서 조상들이 좋아서 공부하는 자식을 도와서 이렇게 자꾸 저거 하고, 외려 자꾸 잘못되게 하는 게 아니라 도와줘요.

조상도 착을 가지고 습을 가지고 살다가 그냥 죽었으니 불에 들어가면 타 죽을 줄 알고, 물에 들어가면 빠져 죽을 줄 알고, 또 내 이 몸뚱이를 건너야 되는데 내 몸뚱이 속의 수많은 그 벌레들이 왕창 커져 가지고는 세균들이 그냥 모두 널려 있으니 그걸 밟고 어떻게 갑니까? 그러니까 모두 넘어설래야 넘어설 수가 없는 거죠, 그 마음을 가지고는. 그렇기 때문에 자식들이 이 공부를 하걸랑은 전부 거기다 넣으세요, 둘 아니게. ‘주인공 한자리에서 전부 할 수 있잖아.’ 하고 다 거기다 놓으면 어떻게 되느냐면 조상들이 열 명이든 스무 명이든 천 명이든 그냥 다 자기 아는 것만치 다 알게 돼요.

재사 지낼 때도 왜 내가 우주떡 하나만 놓고 해라 이랬느냐 하면, 그건 떡이 떡이 아니다 이겁니다. 살아 있을 적에 요것조것 그냥 밥반찬을 놓고 밥을 놓고, 이렇게 차려 놓고 먹던 그 습이 없어져야 이 둥글게 그냥 부처님 자리로 한자리를 갈 수 있을 텐데, 한자리 할 수 없거든요. 그래서 영령들한테 그 모든 걸 말없이 가르쳐 주면은 그렇게 좋아하지요.

그러니 여러분들이 그렇게 이거 뭐, 돈이 드니 못 합니까. 뭐, 자기 뿌리를 자기가 진짜로 믿는다면 자기 나무는 아주 푸르르게 살 수 있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거기다가 모두 놓고 가면, 한자리를 하라고 이렇게 하면 그냥 그대로 천도가 되는 거예요. 거기서 배워서 그대로 그냥 승천을 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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