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隨處作主 立處皆眞

“여러분, 그대들이 만약 법대로 되기를 바란다면 반드시 대장부라야 하느니라. 줏대 없이 흔들리는 시든 풀처럼 되어서는 안 되느니라. 깨진 그릇에는 제호(醍苕, 죽)를 담을 수 없다. 큰 그릇이 되는 인물이라면 남에게 속지 말고 어디서나 주인이 되어, 있는 자리가 진실해야 한다. 밖에서 오는 것은 뭐든지 받아들이지 말라. 그대들이 한 생각이라도 의심하면 곧 마군이가 마음속에 들어와 버린 것이다. 설사 보살이라 할지라도 의심이 생기면 생사의 마군이가 틈을 노려 들어와 버린다. 다만 망념을 쉴 뿐이요, 다시는 밖으로 구해서는 안 되느니라. 경계가 오면 비춰 주면 그만이다. 그대들이 다만 지금 현재 작용하고 있는 것을 믿기만 하면 아무 문제가 없느니라. 그대들의 한 생각 일어나는 마음이 삼계를 만들어 낸다. 그리하여 인연 따라 경계에 붙잡혀서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의 육진으로 나누어져 버린다. 그대들이 지금 응용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 모자라는가? 한 찰나에 바로 정토(淨土)에 들어가고 예토(穢土)에 들어가며, 미륵의 누각에도 들어가며 삼안국토(三眼國土)에 들어가 곳곳으로 돌아다니지만, 오직 헛된 이름만 보고 다닐 뿐이니라.”

여법한 수행자가 되기 위해선 대장부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이야기다. 공부는 상근기(上根機)라야 제대로 할 수 있음을 밝히고 있다. 법기(法器)가 되지 못하는 사람은 도(道)가 채워지지 않는 법이다. 〈임제록〉 전편에서 가장 중요한 말이라고 할 수 있는 구절이 이 대목에서 나왔다. “어디서나 주인이 되라. 있는 자리가 진실해진다.(隨處作主 立處皆眞)” 깨달음을 추구하는 수행이란 자기 주체를 바로 세우는 일이다. 깨진 그릇에 물을 담으면 물이 새듯이 객관경계를 의식하면서 번뇌의 허물이 새어나가는 상태에서는 진정한 주인이 되지 못한다. 다시 말하면 진정한 ‘나’가 되지 못한다는 말이다. 진짜가 아닌 가짜를 가지고 행세해 봐야 쪽박 차고 얻어먹는 신세를 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법화경〉에 나오는 계주유(繫珠喩)의 비유처럼 부유한 친구가 가난한 친구에게 값나가는 구슬을 옷깃 속에 넣어 주었는데, 술에 취해 자고 있던 가난한 친구는 부유한 친구가 구슬을 걸어주고 갔는데도 그 사실을 모른 채, 곳곳으로 다니며 거지 행각을 하면서 온갖 고생을 하며 지내는 꼴과 같다는 뜻이다. 무가보주(無價寶珠)가 자기 옷 속에 있은 줄을 모르고 지낸다는 것은 중생의 불성에 무한한 지혜가 있음에도 그것을 모르고 무명 번뇌에 시달리며 살고 있음을 풍자한 비유이다.

‘서암주인공’이란 공안이 있다. 서암사언(瑞巖 師彦)이 자기 스스로에게 “주인공아!” 하고 불러놓고 “예” 대답을 하고 또 “정신 똑똑히 차려 속지 말라”는 말을 매일같이 하고 지냈다는 것이다. 스스로 불러놓고 자문자답을 하여 쓴 말이 다른 사람들의 화두가 되었던 것이다. 염송설화에는 현사 사비가 어느 학인이 찾아왔을 때 주고받은 말이 소개되어 있다.

“어디 있다 왔는가?”

“서암 회상에 있다 왔습니다.”

“서암은 어떤 말을 했는가?”

“늘 주인공아 하고 부른 뒤에 깨어 있고 남의 속임을 받지 말라 합니다.”

“헛것과 놀아나기는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기이하구나. 왜 그곳에 있지 않고 여기로 왔는가?”

“서암 스님께서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불러놓고 대답하겠는가?”

학인이 아무 말을 못했다고 하였다.

‘주인공’은 자기 스스로를 부를 때 쓰는 말이다. 누구나 자기 주인공은 ‘천상천하유아독존’이다. 이 유아독존의 주인공을 두고 임제는 어디서나 주인이 되라고 한 것이다. 이 주인공은 정토와 예토를 가리지 않으며, 미륵 누각이나 삼안국토에 마음대로 드나든다 하였다. 삼안국토는 눈이 세 개인 사람들이 사는 나라다. 원래 〈화엄경〉에 나오는 말로 법안(法眼), 지안(智眼), 혜안(慧眼)의 새 개의 눈을 말하지만 선가에서는 중도를 터득한 제 3의 눈, 정안(正眼)을 얻어 있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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