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자적 삶으로 몽골 바꾸다

요나라 황족 출신으로 학문 능통
조동종 만송 제자… ‘담연’ 법명
칭기즈칸-오코타이代 책사 활동
마음공부로 살생 죄의식 일깨워
원나라 법령·제도 초석 놓기도

칭기즈칸의 책사 야율초재 동상. 조동종 만송 행수의 제자였던 그는 불교를 통해 몽골인들에게 살생에 대한 죄의식을 일깨웠다.

야율초재에 대한 평가 
전 세계 역사상 가장 많은 땅을 정복한 사람이 몽골의 칭기즈칸이다. 고려도 몽골 침입으로 피해가 매우 심했다. 초조대장경이 소실되었고, 이후 팔만대장경이 완성되기도 하였다. 몽골족이 지나간 자리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 남지 않을 만큼 매우 ‘잔인한 민족’으로 세계사에 기록되어 있다. 그나마 이런 몽골인들의 잔인성과 야만성을 잠재운 사람이 있다. 바로 야율초재(耶律楚材, 1190~1244)이다. 역사적으로 야율초재는 칭기즈칸의 책사요, 불교적으로는 조동종 만송 행수(萬松行秀, 1166~1246)의 제자이다.

상하이대학 역사학자이자 세계적 문화평론가인 위치우이(余秋雨, 1946~)는 야율초재에 대해 “이민족 사람으로서 한족 학자보다 더 뛰어난 문장가요, 학문적 소양을 지닌 사람”이라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 또 중국 역사가들은 “야율초재가 없었다면, 중국 역사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고 할 정도로 그를 높이 평가한다. 현 중국에서 초재에 관해 평전도 많고, 그의 동상이 중국 전역 수여 곳에 세워져 있다.  

야율초재가 살았을 당시 국제정세를 보자. 야율초재는 거란족 요나라 사람이다. 여진족 금나라가 요나라를 멸망시킨 후 요나라는 금나라에 복속되었다. 이후 금나라는 점차 세력을 키워 송나라와 끊임없는 전쟁을 하고 있었다. 이 무렵, 몽골에서는 칭기즈칸이 부족을 통일하고 세계를 정복하기 위해 세력을 키우는 중이었다. 송나라는 금나라와의 전쟁에서 패배해 남경으로 수도를 옮기고, ‘남송’이라고 칭했다.
                                
야율초재의 禪수행 
야율초재는 요나라 황족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학문을 닦아 천문·지리·수학·불교·도교·유학 등 여러 학문에 능통했다. 초재는 송나라 과거 시험에 합격해 선비의 길을 걸었으나 부친이 금나라 관리였기 때문에 전란으로 우여곡절이 많았다. 

야율초재는 성안사(聖安寺) 징공(澄公) 선사에게 사사했다. 초재는 징공의 추천으로 27세 무렵, 조동종을 중흥시킨 만송 행수의 제자로 입문해 참선을 시작했다. 만송은 초재의 문집인 〈담연거사문집〉 서문에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담연 거사는 27세 때부터 나의 지도를 받았다. 그는 법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모두 잊었으며, 세간의 명리에 착하지 않았다. 담연은 마음의 도리를 크게 구하여 신묘한 경지를 정밀하게 추구하였다. 추위와 더위, 밤과 낮을 구분하지 않고 참구하기를 3년 만에 도를 얻었다. 이에 나 만송은 그에게 게송을 내리고, 담연(湛然)이라는 법호를 주었다.”

한편 야율초재는 만송 행수의 〈종용록(從容錄)〉 서문에 자신의 선 수행 과정을 서술하기도 하였다. 선종 법맥도에 만송 행수의 법맥으로 야율초재가 기재되어 있다. 선종사에서는 야율초재를 ‘담연거사’라고 한다. 

야율초재 스승인 만송 행수는? 
만송 행수는 조동종 14대 선사로 자는 보은(報恩)이며, 호는 만송노인(萬松老人)이다. 만송은 15세에 하북성 형주 정토사 찬윤에게서 삭발하였다. 만송은 경수사 승묵광에게서 수학하였고, 이어서 자주(磁州, 현 하남성) 대명사 설암만 문하에 들어가 공부한 후 깨달음을 얻었다. 이후 만송은 자신의 삭발 본사인 정토사로 돌아와 ‘만송헌(萬松軒)’ 토굴을 짓고 살았다.

1193년 27세 때, 금나라 장종(章宗, 1168~1208 재위) 황제의 부름을 받아 궁에 들어가 법을 설하고, 금란가사를 받았다. 금나라 장종이 그를 존경했는데 선사가 설법을 할 때, “장종황제는 몸을 굽혀서 예를 올렸다(于內殿說法,章宗躬身迎)”는 기록이 전한다.  

1234년 금나라가 멸망하고, 원나라가 들어섰다. 만송은 몽골 조정으로부터 예우를 받았다. 97년 원나라 역사에 국사가 아홉인데, 만송이 이 가운데 한 명이다. 

원나라 쿠빌라이칸(太宗, 1234~1241) 재위 무렵, 만송은 북경 보은사 도량 내에 종용암(從容庵)에 주석하며, 〈종용록〉을 저술하였다. 〈종용록〉은 제자들에게 굉지 정각(宏智正覺, 1091~1157)의 공안 100칙을 뽑아 설한 것을 정리한 것이다. 야율초재가 7번이나 찾아가 권유해 어록을 저술했다고 한다. 특히 〈종용록〉 서문에서 야율초재는 만송에 대해 “조동의 혈맥을 이었고, 운문의 선교(善巧)를 갖추었으며, 임제의 기봉(機鋒)을 구족했다”고 서술하였다.

만송은 유교와 도교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팔만대장경을 세 번이나 간경하였다. 당시 강남의 천동 여정(天童如淨, 1163~1228)과 함께 ‘조동종의 양대 산맥’으로 불리었다. 만송은 선사지만, 화엄에도 정통했으며 정토를 추종해 금나라 정토종의 5대에 해당한다. 

만송은 1246년, 세납 81세로 종용암에서 입적했다. 다음은 만송의 열반송이다.

“팔십일 년 동안 / 이 한 마디뿐 / ‘여러분 잘들 있게’ / 부디 그릇되게 알지 말라.(八十一年 只此一語 珍重諸人 切莫錯擧)”

입적 후에 사리탑을 두 곳에 나누어 세웠으나 북경에만 그의 탑이 있다. 

만송 문하에 수많은 제자들이 있는데, 법을 얻은 제자들만 120인이고, 야율초재를 비롯해 뛰어난 제자에 다섯 명이 있다(五傑). 만송은 금나라·원나라의 조정대신은 물론이거니와 사대부 문인들과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선종의 종장으로 당시 종교계·정치계·사회적으로도 중대한 영향을 미쳐, 그의 사상은 오늘날에 이른다. 

야율초재와 칭기즈칸
몽골의 칭기즈칸은 끊임없는 전쟁을 하면서 뭔가 허전함을 느꼈다. 칸은 자신에게 정신적 지주가 될 인물을 백방으로 찾았는데, 요나라의 야율초재가 적격인물이었다. 결국 징기스칸은 당시 금나라 지배를 받고 있던 요나라의 야율초재를 책사로 모셨다.

야율초재는 ‘우주 만유 도리를 탐구하고, 성품을 닦는 일에는 불교의 가르침보다 더한 것이 없으며, 세간을 다스리고 백성을 편안케 하는 데는 공자의 가르침이 마땅하다. 나라 일을 하는 데는 공자의 가르침을 따를 것이며, 나(我)를 버리는 일에는 불교의 진여를 따르겠다’는 마음으로 칭기즈칸의 책사 임무를 시작했다. 즉 그는 유교로서 나라에 봉사하고, 불교로서 마음을 다스린다(以儒治國 以佛治心)는 취지였다고 볼 수 있다. 칭기즈칸은 주위 신하들에게 야율초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의 말을 존중해야 한다. 앞으로 야율초재를 내 곁에 두어 언제든지 자문을 구할 것이다.”

초재는 칭기즈칸 곁에서 보필하였고, 칭기즈칸 또한 초재를 절대적으로 신뢰하였다. 초재는 도교의 도사를 초빙해 칭기즈칸의 마음공부를 도왔고, 살생의 부도덕성과 생명의 존중성을 일깨워 주었다. 칸이 죽기 한달 전, 군신들에게 ‘정복을 해도 사람을 살상하지 말고, 노략질하지 말라’는 포고를 내렸다. 또 칸은 자손들에게 이런 유언을 남겼다. 

“야율초재는 하늘이 우리 가문에 준 인물이니 그의 뜻에 따라 국정을 행하라.” 

야율초재는 칭기즈칸이 죽고 나서 2대 오고타이 시대까지 책사를 지냈다. 한번은 초재가 전쟁 중에 오고타이 칸을 찾아가 이런 진언을 하였다. “우리가 숱한 어려움을 겪으면서 전쟁을 벌이는 것도 모두 땅과 백성을 얻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땅을 얻어도 만약 백성이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재물은 풍족함을 줄 수 있지만, 그것을 만들어내는 것 또한 사람입니다.”

또 한번은 오고타이 칸이 송나라의 전쟁 포로가 잡혔는데, 이들에게 사형 집행을 내리려고 하였다. 초재는 오고타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풍성한 것을 만드는 기술자들과 재화 늘려주는 부자들이 모두 여기에 모여 있습니다. 이들을 모조리 죽이면, 전쟁에서 얻는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2대 오고타이 왕이 일찍 죽자, 왕비가 섭정을 시작했다. 초재는 왕비와 왕비를 따르는 신하들에게 미움을 받아 정치적으로 숙적 관계였다. 결국 그는 정치적인 상황을 견뎌내지 못하고, 55세에 화병으로 죽었다. 초재가 죽자, 정적들은 그의 가산을 몰수해야 한다며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섰다. 그런데 막상 조사해보니 그의 재산은 거문고와 악기 10여개, 그림 몇 점과 수천 권의 책뿐이었다. 

야율초재의 인생이 우리에게 남긴 것이 무엇인가를 정리해보자. 첫째, 야율초재는 불교신자로서 참선을 하였던 인물이다. 이런 종교관이 있었기에 몽골인들에게 생명 살상에 대한 죄의식을 갖게 하였고, 생명 중시를 일깨워주었다.  

둘째, 초재는 몽골이 중국 전토를 통일하고, 나라를 다스리는데 있어 법률이나 국가 운영 방식, 관리제도 등 국가 초석을 다지는 데 일조를 하였다. 그가 제안한 법률이 원나라가 존립할 때까지 실행되었다.  

셋째, 초재의 인생관이 남긴 명언에 “하나의 이익을 얻는 것이 하나의 해를 제거함만 못하고, 하나의 일을 만드는 것이 하나의 일을 없애는 것만 못하다(與一利不若除一害, 生一事不若滅一事)”라고 하였다. 동서양을 떠나 역사적으로 정치인들은 명리를 이용한 과욕으로 추락하는 인물이 대부분이다. 야율초재도 정치인이지만, 그는 청빈한 수행자의 삶과 소탈함이 중국 역사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역사까지 바꿔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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