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내가 본 법정 스님 ②사랑은 따뜻한 마음

“말이라는 게 참 허망해. 내 뜻은 그게 아니었는데 듣는 사람마다 제 처지에서 헤아려 듣거든. 또 말을 하다 보면 어느새 삼천포로 빠지기 쉽구. 그래서 난 말하는 게 별로야. 그렇지만 글은 달라요. 글을 쓰노라면 생각이 정리되고 틀림없는 목소리를 낼 수 있거든. 그러니까 글은 이백 프로라도 책임지겠지만 말은 책임 못 져.”

법정 스님이 남긴 말씀이다.

끝없는 관심이에요
사랑 없는 사람은
불법을 헤아릴 수 없어요


글로 쓰다 보면 새로운 생각이 떠오를 뿐 아니라, 생각을 다듬어 간추릴 수 있다. 그래서 글쓰기는 나를 찾아가는 기도와도 이어진다면서 글쓰기를 하라고 하던 스승은 법문하실 때에도 원고지에 하실 말씀을 적어 가지고 오셔서 새겨들어야 할 것은 꼭 되풀이해 말씀했다.

이를테면 “어느 가전제품 광고에서 ‘순간의 선택이 십 년을 좌우한다’고 했습니다. 그건 가전사가 한 말이고,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해요.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고.”라고 하거나 “우리가 신앙생활은 업을 맑히는 일이에요. 청정한 본디 마음을 지니려고, 업을 맑히는 일이에요. 과거·현재 모든 부처님이 한결같이 가르치는 교훈이 있습니다. ‘나쁜 짓 하지 말고 착한 일 두루 해서 마음을 맑히라.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나쁜 짓 하지 말고 착한 일 두루 해서 마음을 맑히라.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언제 어디서나 한순간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파리 길상사 10주년 기념 법회).”

새겨야 할 곳을 되풀이해서 말씀하는 스승이 길상사 법회 때 다듬어 가지고 오신 원고량은 늘 40분 안팎이었지만, 비가 오던지 몹시 추운 날에는 바깥에서 법문을 듣는 이들을 헤아려 말씀을 20여 분만에 마치곤 했다.

스승은 일본 스님 도겐이 펴낸 <정법안장> ‘행지’ 편을 아껴 길상사 주지실 이름을 ‘행지실’이라 했다. ‘행지’는 수행자가 지녀야 할 사랑 덕목으로, 행지실은 옹글게 사는 이가 머무는 방이라는 말씀이다.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일이 우리 자신을 형성합니다. 우리 자신을 이루어가요. 그러므로 순간순간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고, 어떻게 말하고,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떤 행동을 하는가가 그 사람 실체에요. 이를 불교 용어로 ‘업’이라고 해요. 까르마. 원래 살인자가 어디 있습니까? 한순간 마음을 어둡게 먹어 살인자가 되는 거예요. 착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참기 어려운 어떤 갈등을 ‘이것이 사람 사는 길이다’ 하고 추스를 수 있었기에 고비를 넘기고 일어설 수 있었던 겁니다. 한순간 한순간이 바로 갈림길입니다(파리 길상사 10주년 기념 법회).”

우리는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일을 고를 수는 없다. 그러나 어떻게 맞설지는 고를 수 있다. 그렇게 골라 이룬 열매가 바로 나다. 어제 올바르게 살았다 하더라도, 오늘 여기에서 또 새로운 삶을 골라야 한다. 날마다 새롭게 사랑을 피워올리는 일이 바로 ‘행지(行持)’다.

어지간해서는 길상사에 머물지 않던 스승. 법회를 마치고 점심 공양을 들고 나면 서둘러 떠나려고 했다. 그러나 부처님오신날에는 저녁에 음악회를 하는 바람에 밤늦도록 계셔야 했다. 밤 열한 시가 넘어서 떠나는 스승이 안쓰러웠으나 길상사에서 주무시지 않으려고 하는 뜻이 엄격해 주무시고 가시라는 소리를 하지 못했다. 조심스레 “늦어서 피곤하실 텐데 운전이라고 해드릴까요?” 하고 말씀드려도 한 마디로 자르셨다. “안 돼!” 처음에는 이토록 서둘러 떠나려는 까닭이 그저 급한 성정 탓이려니 했다. 알고 보니 깊은 생각 끝에 하신 말씀이다. “한 절에 주지가 둘이 있어선 안 돼요. 아니 할 말로 나 보러 오지, 주지 보러 오겠어요? 내가 있으면 주지가 얼마나 힘들겠어요. 내가 있으면 질서가 서지 않아.”

1999년 11월, 길상사 터를 선뜻 내놓은 길상화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스승은 벽제 화장터까지 따라가셨다. 점심때가 되어 공양하려고 스승을 찾는데 어디 계신지 알 수 없었다. 한참을 찾다가 타고 온 버스를 살피니 스승은 차 한 잔을 놓고 절편 한 조각을 꺼내고 계셨다.

차 한 모금
절편 한 조각
고스란한 사랑.

이토록 생각을 깊이 벼린 스승이 남긴 말씀은 하나하나가 그대로 시였다. “매화는 반만 피었을 때 운치가 있고, 벚꽃은 남김없이 활짝 피어나야 여한이 없다. 복사꽃은 멀리서 바라봐야 제대로 누릴 수 있고, 배꽃은 가까이서 볼 때 그 맑음과 뚜렷함을 느낄 수 있다.”

하나씩 더 들라고. 증거인멸 해야지
옴 맛나 맛나 사바하. 세 번이야!
이슬비가 오네. 있으라고 이슬비가 오잖아!

그뿐인가. 마음 깊이 심어주려고 하는 말씀을 우스갯소리에 담아 잊지 않도록 하기도 하고, 자칫 서먹서먹할 수 있는 분위기를 우스갯소리로 띄우기도 했다.

여럿이 둘러앉아 무엇을 먹다 보면 서로 미루다가 쟁반에 남아 있을 때가 적지 않았다. 그럴 때 스승이 “자, 하나씩 더 들라고. 증거인멸 해야지.” 하고 던지는 우스개는 남김없이 먹으라는 말씀이다. 한여름 불일암 마루에서 수박을 먹고 땅에 뱉어놓은 수박씨를 치우면서 증거인멸 해야 한다고 하기도 했는데, 냄새를 맡고 몰려드는 개미를 무심코 밟아 죽이지 않으려면 쓸어버려야 한다는 말씀이다.

어느 명절날 불일암. 땀을 흘리며 음식을 하는 지묵 스님 뒤로 스승이 가만히 다가와서 던지듯이 묻는다. “음식을 맛나게 하는 진언이 뭔지 알아?” 어리둥절해 하는 지묵 스님 어깨를 툭 치면서 스승이 말씀한다.

“옴 맛나 맛나 사바하. 세 번이야!”

불일암 마루 앞에 놓인 섬돌 대신 쓰던 통나무 토막이 썩어 개미가 바글바글했다. 그걸 갈려던 지묵 스님. 정랑 뒤에 놓인 나무 기둥을 보고는 잘라 써도 되느냐고 스승에게 여쭌다. 스승은 쓸 데가 있어 말리는 나무이니 다른 걸 찾아보라고 했다. 마침 큰 절에는 법당 불사가 한창이라 쓸 만한 나무토막이 제법 많았다. 그러나 도목수와 도감 스님이 서로 미루는 바람에 맥이 빠진 지묵 스님. 스승이 말린다던 나무를 잘라 섬돌을 삼는다. 나무가 어디 갔느냐고 묻는 스승에게 뒤통수를 긁으며 까닭을 말씀드린 지묵 스님. “쓸 곳이 있어서 말리는 나무라고 했는데, 말도 없이 잘라 썼단 말이야? 어허, 같이 못 살 사람이군.”

꾸짖는 말씀을 나가라는 소리로 알아들은 지묵 스님. 부슬부슬 비가 흩뿌리는데, 주섬주섬 걸망을 챙기고는 군불이나 지펴 드리고 가겠다는 마음으로 부엌에 들어가 장작불을 지핀다. 그때 부엌으로 들어선 스승. 지묵 스님을 두어 번 밀치고는 뒤에서 두 팔로 꽉 껴안으며 말씀한다. “이슬비가 오네. 있으라고 이슬비가 오잖아!”

칼날 같아 보이던 스승은 이토록 마음이 여리고 속정이 깊었다.

우리가 사랑의 소산이자 사랑의 유물
사랑할 수 없다면 이미 멎어버린 심장

어느 해 부처님오신날. 정채봉 선생이 스승에게 여쭌다. “스님, 젊은 날로부터 사랑을 떠나서는 살 수 없으셨지요?” 하고. 스승은 “우리가 사랑의 소산, 사랑의 유물이잖아요 사랑할 수 없다면 이미 멎어버린 심장 아닐까요? 사랑은 따뜻한 마음이며, 끝없는 관심이에요.”라고 말씀하며 품어 뒀던 사랑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해인사에 살 때 병원 일을 하는 수녀님 세 분 와서 가야산 봉우리까지 갔는데, 그 가운데 한 수녀님을 보자 찌르르 전율이 흐르고, 몸이 기우뚱거릴 만큼 아뜩해지면서 가슴이 마구 방망이질해댔다고 했다. 세월이 지나 수녀님 동생이 이따금 절에 다니면서 연락이 닿아 만났는데, 그 수녀님도 스승을 만나고는 며칠 동안 잠을 설쳤다고 했다.

“둘이 수도자가 아니었더라면 아마 연예에 빠졌을 것”이라고 털어놓은 스승은 “가볍지만 흔들리는 건 당연하다. 어떤 것이 사랑 본질인가 생각할 때, 내 것으로 만들겠다는 것은 소유욕이다. 사랑한다면 그이가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보살펴 주고, 주고 또 주어도 모자란다고 여기며,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아야 한다. 사랑할 줄 알아야 삶에 생동감이 돌고 향기가 있다.”라고 말씀했다.

스승이 사랑은 끝없는 관심이라고 했지만, 관심을 받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짐승이 있다. 바로 나무늘보다. 아주 굼뜨게 움직여 목숨앗이 눈길에서 벗어나는 것이 살아남는 비결이라 여긴 나무늘보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이려고 애쓴다. 이런 나무늘보도 관심을 끌고 싶어 하는 구석이 있다. 일주일에 한 번 슬로비디오를 돌리듯이 슬그머니 나무에서 내려와 나무 밑동에다 똥을 누어 소복이 쌓아놓으며 가슴 설렐 그대가 찾아오기를 간절히 빌며 자취를 남긴다. 어떤 목숨 붙이건 간에 사랑할 때 비로소 삶에 생기가 돈다.

12세기 일본 가마쿠라 시대에 살던 묘에 스님도 의상 스님을 깊이 사랑한 선묘 낭자 이야기를 그리면서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부처님 법을 헤아릴 수 없다”라 했다.

스승 뜻에 따라 파리 길상사 주지로 간 지묵 스님, 우리나라와는 달리 대중교통이 발달하지 않아 어려움을 겪는다. 마침 파리를 찾은 스승에게 차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린다. 공부하는 사람에게 차가 있으면 안 된다고 딱 잘라 말씀하고 귀국길 오른 스승. 공항 게이트에 들어서면서 저만치 서서 배웅하는 지묵 스님에게 손짓하며 “가방 좀 잘 봐봐!”라고 했다. 무슨 뜬금없는 말씀인가 싶어 갸웃거리던 지묵 스님, 가방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말씀으로 알아듣고 넘겼다. 그 뒤로 유럽이며 중국, 인도를 두루 다니면서 쓰던 여행 가방이 낡아 버리려다가 앞에 붙은 주머니를 터는데 봉투 하나가 나왔다. 봉투 안에서 차를 사서 조심해서 타고 다니라는 말씀이 적힌 편지와 함께 수표가 툭 떨어진다. 지묵 스님은 이 돈으로 불상을 모시고는 복장에 그 사연을 적바림해 넣는다. 부처님이 된 자동차는 그대로 사랑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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