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무의도인

“어쩌다 경계에 끌려가지 않고 활용하는 사람을 보니 이 사람은 부처님의 그윽한 뜻(玄旨)을 아는 사람이니라. 부처의 경지에서는 ‘내가 부처의 경지다’라고 스스로 말을 할 수 없는 것이다. 부처의 경지는 의지함이 없는 도인(無依道人)이 경계를 타고 나올 뿐이니라.

만약 어떤 사람이 나와서 내게 부처를 찾는 길을 묻는다면 나는 곧 청정한 경계로 응대하고 어떤 사람이 내게 보살을 묻는다면 곧 자비의 경계로 응대하며, 어떤 사람이 깨달음을 묻는다면 곧 깨끗하고 오묘한 경계로 응대하며, 어떤 사람이 열반을 묻는다면 고요한 경계로 응대해 주느니라. 경계는 천차만별이지만 사람은 다르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사물에 응하여 형상을 나타내는 것이 물속의 달과 같다고 하느니라.”

우두법융(牛頭法融, 594~658) 선사가 남긴 말에 “경계를 쫓아가는 사람은 하근기(下根機)며 경계를 물리치는 사람이 상근기(上根機)다”고 한 말이 있다. 선 수행을 하는 자가 외부의 바깥경계에 끌려가서는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다. 무심해야 도(道)에 합해진다는 무심합도문(無心合道門)을 주장한 우두선의 요지를 설명한 말이다.

이 장에 와서 임제는 경계에 끌려가지 않고 경계를 타고 노는 사람이 부처님의 그윽한 이치를 아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무의도인은 부처에도 의지하지 않기 때문에 부처의 경지에서는 내가 부처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다 하였다. “내가 부처다”고 말하면 나는 부처에 의지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의도인이 아니다. 생각이 쉬어 주관과 객관이 상대하지 않는 경지가 의지함이 없는 경지다. 이 경지에서는 무어라 말이 나올 수가 없다.

이름과 형상으로 말하는 것은 부득이한 방편으로 하는 것이지만 모두 실체가 없는 것이라 물속의 달과 같다 하였다. 다만 상황에 따라 응용할 뿐 응용하는 사람은 언제나 무의도인이다.

이 무의도인이 실은 부처님의 참된 법신이다. 금광명경(金光明經) 사구송(四句頌)에 “부처의 참된 법신은 마치 허공과 같아 사물에 응하여 형상을 나타내는 것이 물속의 달과 같아 아무런 장애가 없다.(佛眞法身 猶如虛空 應物現形 如水中月 無有障킟)”고 하였다.

“색을 보고 마음을 밝히고 소리를 듣고 도를 깨닫는다(見色明心 聞聲悟道)”는 말이 있다. 보고 듣는 경계가 마음을 밝히고 도를 깨닫게 하는 매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 보고 듣는 외부 경계가 깨달음의 계기를 부여해 준다는 말이다. 그런데 범부들은 보고 듣는 경계에 끌려가 분별심을 일으켜 미혹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자는 경계에 끌려가지 말라는 것이다. 부설거사의 송(頌)으로 알려진 사구송(四句頌)이 있다.

目無所見無分別 눈으로 보는 바가 없으니 분별이 없고
耳聽無聲絶是非 귀로 들어도 소리가 없으니 시비가 끊어지네.
分別是非都放下 분별과 시비를 모두 놓아버리고
但看心佛自歸依 다만 마음의 부처를 보아 스스로 귀의하라.

엄양존자(嚴陽尊者)라는 사람이 있었다. 소문을 들으니 조주(趙州) 선사에게 가서 뭐든지 물으면 “놓아버리게(放下著)” 이 말 한마디를 해준다고 하였다. 그는 조주 선사를 찾아갔다. 그가 물었다.

“아무것도 안 가져온 사람은 무엇을 놓아버립니까?”

그 물음에도 조주 선사는 또 “놓아버리게” 하였다.

엄양이 다시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놓아버리라고 합니까?”

“그럼 짊어지고 가게나”

이 말에 엄양이 깨달음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엄양은 물어볼 말을 미리 준비하고 갔던 것이다. 무심이 되지 못하고 유심으로 찾아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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