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들 ‘미륵하생’ 기원하다 ?

최고의 향공양 물품인 ‘침향’
불상·악재 등 다방면에 사용

고려시대 향도들, 침향 제작
“갯벌에 향나무·소나무 묻고?
오래 지나면 침향된다” 믿어
고려 말~조선 초 집중 ‘성행’?

충남 당진 안국사지. 안국사지 삼존불 뒤편으로 매향비가 보인다. 매향비는 고려시대 민중들이 미륵의 하생을 기원하며 향나무 등을 갯벌에 묻었던 것을 기록한 것이다.

사찰에 다니고 불공도 드려본 사람들은 ‘침향(沈香)’이 익숙할 것이다. 절집에서 최고의 향공양 물품으로 쓰인다. 침향나무는 주로 중국 남부나 인도네시아,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 베트남 등 남쪽 지방에서 자란다. 그런데 이 침향나무 전체가 우리가 아는 ‘침향’이 되는 건 아니다. 나무가 자라면서 벌레들의 침입이나 외부 충격 혹은 각종 병균의 침입으로 상처가 생기는데 침향나무는 이런 것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자체적으로 상처 부위에 진액을 만들어낸다. 흔히 ‘수지’라고 부른다. 나무마다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보통 한 그루당 5~7㎏ 정도 소량만 얻을 수 있다. 

<법화경>에는 침향을 ‘하늘의 꽃비’, ‘천상의 향’으로 칭송하고 있다. 실제 향기를 맡으면 은은할 뿐 아니라 정신을 맑게 해주는 걸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지금도 향공양을 올릴 때는 ‘침향’을 최고로 친다. 침향은 이밖에 염주나 합장주 심지어 불상을 만들 때도 쓰인다. 침향으로 불상을 만들 땐 웬만큼 고급 품질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침향은 심지어 약재로도 쓰인다. <동의보감>에는 ‘찬바람으로 마비된 증상, 중풍처럼 마비가 오고 배탈이 나서 심하게 토하고 설사하며 팔다리에 쥐가 나는 것을 고쳐주며 정신을 맑고 편안하게 해준다’고 적혀 있다. 거의 만병통치약 급이다. 그래서 그런지 조선의 왕들도 침향을 애용했다고 한다. 

갯벌에 나무 묻고 미륵하생 기원
이렇게 귀한 걸 부처님께 올리고 싶은 사람들의 무리가 있었다. 고려시대 초반에 나타난 이런 무리를 ‘향도(香徒)’라고 불렀다. 보통 학자들은 향도의 기원을 신라의 화랑에서부터 찾는데 어쨌든 우리가 향도라고 부르는 조직은 고려시대 마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공동체다. 

이들은 사찰의 건립은 물론 불상, 종, 탑의 제작을 위해 보시를 하거나 노동력을 제공했다. 고려 후기로 접어 들어서는 마을 공동체 기능이 점점 강화됐다. 다리를 놓거나 하천을 정비하는 조직이기도 했고 혼례나 장례 때도 일을 나눴다. 지금도 상여를 메는 일꾼을 향도군(香徒軍)이라고 부르는 데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이 향도들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남아 있지는 않다. <고려사>에는 딱 두 번 등장하는데 충혜왕 3년(1342)에 왕이 신효사에 행차를 했는데 등촉배(燈燭輩, 등불을 드는 무리)가 향도(香徒)를 맺어 절에서 축수재(祝壽齋, 왕 등의 장수를 빌기 위해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일)를 열었고 왕이 이 자리에 참석했다는 기사다. 

다른 하나는 고려 인종 9년(1131)에 ‘승려, 속인, 잡류들이 함께 모여 만불향도라 칭하여 염불과 독경을 하고 때로는 술을 팔고 파를 팔기도 하며 무기를 들고 악독한 짓을 하며 유희를 벌여 법도를 어지럽힌다’며 음양회의소에서 단속과 금지를 청원했던 기사다. <고려사> 기사로만 짐작해도 향도는 주로 불사와 법회를 위해 만들어졌던 조직임을 알 수 있다. 

현재까지 향도들의 활동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으나 그중 뚜렷하게 남아 있는 것이 바로 매향에 대한 기록이다. 매향은 ‘침향을 얻기 위해 향나무, 소나무, 참나무, 상수리나무 등을 오랫동안 갯벌에 묻어두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침향은 침향나무에서 얻어지는데…. 그렇다. 향도들은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갯벌에 향나무, 소나무, 참나무 등을 깊게 묻어두면 세월이 흐르면서 침향으로 바뀐다는 믿음이 있었다. 

이들이 매향을 하면서 염원했던 것은 바로 미륵보살의 하생이었다. 이 매향은 고려 후기인 14세기부터 초선 초기인 15세기 중반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진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매향비 자료가 그렇다. 굳이 당시 시대 상황과 연결해 이야기하자면 경제적 이익을 독점하고 있던 권문세족의 횡포가 있었을 터이고, 홍건적과 왜구의 잦은 침입을 들 수도 있겠다. 하지만 사회경제적인 문제만이 이들을 매향의식에 동참케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하튼 매향이 끝나고 나면 매향의 시기와 장소 시주자 명단들을 기록해 매향비를 세웠다. 이 매향비 중 가장 유명한 것이 사천 매향비와 당진 안국사지 매향비다. 

사천 매향비. 매향비는 고려시대 민중들이 미륵의 하생을 기원하며 향나무 등을 갯벌에 묻었던 것을 기록한 것이다.

사천·당진 안국사지 매향비
현재까지 남아 있는 매향비는 전국적으로 20기가 채 안 된다. 평북 정부, 고성 삼일포, 법성, 사천, 영암 엄길리, 신안 팔금도 등 고려 시대 것 6~7기, 덕산 효교리, 홍성 어사리, 신암 암태도, 신암 고란리, 장흥 덕암리 등 조선 시대 것 7~8기다.  이중 가장 유명한 매향비가 사천 매향비와 당진 안국사지 매향비다.

사천 매향비는 고려 말인 우왕 13년(1387)년 세워진 것으로 높이 1.6미터 너비 1.3미터의 둥그런 모양이다. 크지 않은 돌에 15줄 202자의 글자를 새겨 넣었다. 이 비에 따르면 승려와 속인이 중심이 되어 4,100명의 계를 조직했고, 국태민안과 미륵보살의 하생을 염원했다. 다만 ‘마을 공동체’만으로 볼 수 없는 정황도 존재한다. 인구 기록이다. 한참 후인 1442년 <세종실록 지리지> 자료에 따르면 사천의 인구는 370호 1817명이었다. 매향을 하기 위해 사천 사람들뿐 아니라 근처 마을 사람들까지 참여했다는 방증이다. 어찌 되었건 사천 매향비는 매향을 했던 목적 그리고 비의 건립 연대가 확실하게 남아 있어 보물로도 지정되었다. 

매향 자료가 비뿐 아니라 절터로 남아 있어 답사로 맞춤한 곳도 있다. 바로 안국사지다. 충남 당진에 수당리라는 곳이 있는데 고려시대 건물터와 석축은 물론 삼존불도 남아 있고 무너진 돌들을 수습해 다시 세운 탑도 남아 있다. 

삼존불 뒤로는 우주선처럼 생긴 가로로 긴 돌이 보인다. 높이는 2.93m로 높이 않으나 길이는 13.35m에 달한다. 마을 사람들은 배바위라고 부르는 모양인데 자세히 보면 얕게 암각된 글씨들이 보인다. 이 바위가 바로 매향비다. 

흥미로운 건 두 건의 매향 기록이 한 바위에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오른쪽에는 ‘경술년 10월에 염솔 서쪽의 출포 마을의 00등이 향나무를 묻었다’는 기록이, 왼쪽에는 ‘경오년에 각성이라는 화주가 중심이 되어 향도를 결성하고 여미현의 북쪽에 있는 천구포 동쪽에 매향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왼쪽에 새겨진 ‘경오’는 의견이 분분한데 고려 광종 21년(970), 현종 21년(1030) 등 이르게 시기를 잡는 경우도 있고 고려 원종 11년(1270)년, 충혜왕 1년(1330), 공양왕 2년(1390)으로 늦게 잡는 경우도 있다. 오른쪽 경술은 추정조차 불가능하지만 다만 조선 태종 7년 이전(1407)에는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경오’보다 더 늦은 시기라고 추정하는 경우가 많으니 1310년이나 1370년이 될 것이다. 여하튼 조선 중기 이후는 매향 의식이 거의 사라졌고 또 안국사 역시 폐사의 길을 걸었으니 그보다 더 늦은 시기는 아닐 것이다. 안국사지는 꼭 한번 답사를 추천한다.

향도 사라지고 사대부 득세 
향도는 고려 초기부터 조선 초기까지 그 기능을 조금씩 바꿔가며 끊임없이 이어져왔다. 하지만 불교사가 변곡점을 겪을 때 항상 등장하는 그들이 또 나온다. 바로 사대부다. 불교신앙을 중심으로 마을 조직이 운영되는 것이 마땅치 않았을 것이다. 중국에서 성리학적 향약을 수입해 온다.

중종 14년(1519년) 조광조에 의해서다. 하지만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실각하자 한동안 수면 밑에 있다가 이후 이황과 이이 등에 의해 우리 사정에 맞게 조금 수정해 보급된다. 덕업상권(德業相勸)이니 과실상규(過失相規)니 하는, 사회와 국사 시간에 우리를 그렇게 괴롭혔던 참, 외우기 힘들고 발음조차 어려운 그런 것이다. 이후 마을공동체는 상층에 향약 그리고 그 밑에 두레라는 형식으로 해서 조선조를 관통하며 계속 이어진다.

꽤 오래전에 조그만 시골 절에 갔다가 스님한테 들은 얘기가 있다. ‘요즘은 교회 안 다니면 농번기에 품앗이도 힘들다’는 것이다. 교회에서 교인들끼리만 모여 품앗이를 권장하니 교회에 안 나가면 사람을 사서 쓰는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물론 ‘특수한’ 얘기일 수 있고 모든 마을이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고려, 조선 그리고 근대와 현대를 지나오면서 마을공동체의 모습이 많이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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