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원감국사의 차생활

송광사 경내 전경. 능허교 위 우화각은 ‘신선이 되는 문’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몽골의 난 이후 개경 내 불교 쇠퇴
‘담선법회’ 주도했던 수선사도 고충
원감국사 요청으로 뺏긴 토지 회복
송광사 고승, 차시 통해 정취 남겨

몽골의 난은 개경을 중심으로 활약했던 불교계를 변화시켰으니, 바로 개경을 중심으로 활약하던 교단이 쇠퇴하는 흐름을 보였다는 점에서 그렇다. 몽골의 난이 종식되고 왕실이 개경으로 환도(還都)한 후, 교단 중심의 사찰로 그 지위가 회복되긴 했지만, 왕실이 강화로 천도하면서 담선법회(談禪法會)는 몽골에 대항하려는 흐름을 보였다. 이런 불교계의 흐름은 원이 고려 왕실에 대한 정치적인 입장을 강화하면서 고려에 대한 정치적인 압력이 더해지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무신정권기에 절대 권력을 휘둘렀던 최충헌(崔忠獻 1149~1219)과 그의 아들 최이(崔怡 ?~1249)의 담선법회에 대한 관심은 이 법회가 더욱더 활발해질 수 있었던 배경이었는데, 담선법회를 주도했던 수선사는 최씨 정권과의 정치적인 밀착으로 불교계에 미치는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수선사가 대몽항쟁기에 몽골에 대한 대항을 주도했던 사찰이었다는 점에서 원은 수선사에 대한 응징의 조처를 내렸고, 다른 한편으론 회유해야 할 불교계의 대표 사찰로 인식했다.

따라서 원은 1273년경 삼별초군의 대몽항쟁을 진압하기 위한 군량미를 확보한다는 명분으로 수선사 사유지를 몰수하려는 조처를 내림에 따라 수선사의 어려움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이에 원감국사 충지(園鑑國師 沖止, 1226~1292)는 원 황제에게 〈복토전표(復土田表)〉를 올려 이런 어려움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러자 원 황제는 원감국사의 요청에 응하여 수선사의 사전을 회복시켜 준다. 원감국사는 이에 감사하는 글을 원 황제에게 올렸으니, 〈동문선〉 표전(表箋)에 수록된 〈상대원황제사사복토전표(上大元皇帝謝賜復土田表)〉이다.

‘은택은 높은 하늘에서 내리고 봄은 마른 나무에 돌아오니, 황송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겠고 짐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공손히 생각하옵건대, 황제폐하의 덕은 모든 왕(百王)의 으뜸이시며 공은 만세(萬世)에 높으시어, 일시동인(一視同仁)으로 크게 바다 끝(海隅)에까지 덮어 주시며, 사방이 안으로 향하는 마음을 얻어 천하를 가득히 덮어 주시니, 칭송하는 노래가 중국 밖(中外)에 들끓으며 뛰고 춤춤이 멀고 가까운 데에 차이가 없습니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신은 성품과 행실이 졸렬하고 소루하며 마음이 천박하고 비루한데, 외람되이 조문(祖門·조사(祖師)의 문)의 뒤를 이어 석원(釋苑·승계(僧界))의 지남(指南)이 되었나이다. 이 절[寺]은 오세(五世)째의 총림(林)이며 육화(六和 중)의 연수(淵藪)입니다. 선종(禪宗)의 진수(眞髓)를 널리 펴서 항상 대중(大衆)의 자리를 비지 않게 하였사오나, 본시 전토(田土)가 부족하여 항상 먹을 것의 부족함을 걱정하였더니, 전일에 선후(先后)께서 이를 민망히 여겨 곧 공전(公田)을 베어 주심을 받았습니다.

이로부터 겨우 목숨을 부지하여 몸을 편히하여 도를 펼 수 있겠다 하였더니, 사신이 처음 와서 군수(軍須 군수(軍需))를 판출할 때에 이에 전에 관한 관적(官籍)을 찾아내어 예(例)에 의해 전세(田稅)를 징수하니, 대중은 많은데 먹을 것이 적어 사세(事勢)가 몹시 곤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외국이 신거(宸居 대궐(大闕))에 멀어서 하정(下情)이 위에 상달(上達)하기 어려울까 하였더니, 황제폐하께서 더러운 것도 포용하는 도량을 넓히시고 먼 데를 밝게 보는 밝음을 돌리시어, 신의 성수(聖壽)를 축원한 지 오래된 정성을 알아주시고, 신이 불법을 널리 편 조그마한 공로를 생각하고 새 윤음(綸音)을 내리시어 신에게 옛 전토를 면세(免稅)하여 주셨습니다. 은혜가 이미 보통에 벗어났사온데 감사함을 어찌 잠시라도 잊겠습니까. 신은 감히 정성을 배나 더 바쳐 우러르며 더욱 대중을 권하여 훈수(勳修)하여, 맹세코 포류(蒲柳)의 여생(餘生)을 가지고 춘령(椿숔)의 오랜 수(壽)를 어찌 공손히 축원하지 아니하오리까.

(澤下層櫃。春?枯뼥。凌兢失措。荷戴難任。恭惟皇帝陛下。德冠百王。功高萬世。闡一視同仁之化。丕冒海隅。得四方嚮內之心。光宅天下。謳歌沸於中外。蹈舞均於邇遐。伏念臣性行迂?。襟靈淺鄙。猥以祖門之踵後。濫爲釋苑之指南。玆寺也五世叢林。六和淵藪。代弘禪髓。恒令衆席以無虛。素乏土毛。常患食輪之不轉。頃蒙先后之憫此。載割公田而錫焉。自玆支命以聊生。謂可安身而弘道。及値使華之初쎌。點出軍須。?尋官藉之舊傳。例收田稅。衆多食寡。事迫勢窮。然外國邈隔於辰居。恐下情難聞於天聽。豈意皇帝陛下。廓包荒之量。?燭遠之明。知臣祝聖之積勞。念臣弘法之微꽴。優垂新퐬。眸復舊田。恩旣出於尋常。感何忘於頃刻。臣敢不倍輸誠而戴仰。益勵衆以熏修。誓將蒲柳之殘年。恭薦椿숔之遐퉓)’

윗글에서 언급된 상대원황제(上大元皇帝)는 바로 원 세조이다. 충렬왕 1년(1275), 원감국사는 원 황제를 만나기 위해 원나라를 방문, 황제의 환대를 받았다. 황제가 원감국사에게 하사한 금란가사(金 袈裟)와 벽수장삼(碧繡長衫), 불자(拂子) 한 쌍이 이런 정황을 가름할 단서이다.

당시 원감국사는 원 황제에게 축성(祝聖)을 맹세하였는데, 이는 13세기 불교계와 왕실, 원 황제라는 정치적 구도 속에서 고려 왕실과 불교계의 노림수를 엿볼 수 있다. 다시 말해 고려 왕실은 무신정권의 몰락에 따른 왕정의 복고를 위해 원과의 정치적인 강화가 필요했고, 불교계 또한 교단의 안정적인 보존을 위한 자구책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당시 이러한 정치적인 현실 문제 해결에 보탬이 된 것은 바로 원감국사였다는 점에서 그의 역량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원감국사는 어떤 인물이며 13세기 불교계를 대표하는 수행승으로서의 차 생활은 어떤 규모를 갖추고 있었을까.

대략적으로 살펴보면 그는 고려 후기를 대표하는 수행승이며 송광사를 빛낸 고승이다. 전라도 장흥에서 태어났고 속명은 위원개(魏元凱)이다. 〈고려사〉에 그가 출가하기 전의 행적을 소상하게 기록해 두었으니, 고종 갑진(甲辰 1244)년에 예부시(禮部試)에 장원급하여 영가서기(永嘉書記)에 임명된 후 10여 년 간 환로(宦路)에 올랐다고 한다.

그가 출가한 것은 1254년으로 원오국사 천영(圓梧國師天英, 1215~1286)에게 삭발염의(削髮染衣)했는데, 당시 고려의 정치 상황은 매우 어지러웠던 시기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의 수행 행적은 돋보였다. 특히 차를 마시며 수행했던 선종사찰의 사풍(寺風)은 여전했으니 이는 그가 남긴 〈원감국사가송(圓鑑國師歌頌)〉에서 확인 할 수 있다.

순천 송광사에 봉안된 원감국사 진영.

무엇보다 그가 남긴 다시(茶詩)는 수행자의 차에 대한 견해, 차를 즐기는 정취 등을 간요(簡要)한 언어로 표현돼 눈길을 끈다. 최이가 차와 향을 보냈기에 이에 대한 감사를 표한 〈최이(崔怡)가 차와 향, 시를 보낸 것에 감사하며(謝崔怡送茶香韻)〉라는 시(詩)는 무신정권기 최고의 실세였던 최이와의 관계를 엿 볼 수 있는 자료이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여윈 학이 소나무 위에 걸린 달 곁에 잠잠히 서 있고(瘦鶴靜翹松頂月) 한가한 구름, 고갯마루 바람을 가벼이 따르네(閒雲輕逐嶺頭風) 개중에 면목은 천 리 밖에서도 한 가지리니(箇中面目同千里) 무엇 하러 새삼스레 편지를 보내랴(何更新飜語一通)’

담담한 언어로 표현한 여윈 학, 소나무, 달, 구름은 불교적인 상징어다. 특히 윗글의 협주(夾註)는 원감국사와 최이와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는데, “마침 최이가 순천 지주사가 되어 편지와 함께 차와 향, 〈능엄경〉을 보냈다. 사자가 돌아가며 답장을 청했다. 스님은 ‘나는 이미 속세를 벗어났으니 편지는 왕복하여 무엇 하겠는가’라고 했다. 그러나 그 사자가 하도 졸라대므로 이 시를 써 주었다.(崔怡爲順天知奏事 以書遺茶香及楞嚴經 使還請報書 師曰 何修書往 使强迫之 且以詩贈)”라고 하여 당시의 정황은 자세하게 드러냈다는 점이다. 

아무튼 원감국사는 차를 좋아했던 승려였다. 그러기에 그도 햇차를 받은 기쁨을 〈금장대선사가 보내준 차에 감사하며(謝金藏大禪惠新茶)〉에서 은근하게 드러냈던 것이다. 특히 이 시를 통해 송 황실의 공납품인 증항차가 그에게까지 전달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자애로운 선물에 놀라 햇차를 다리니(慈?初驚試焙新) 자갈에서 자란 찻 싹이라 더욱 진귀하네(芽生爛石品尤珍) 평소에는 가루차만 마셨는데(平生只見膏油面) 기쁘게도 한 움큼 증갱차를 얻었네(喜得曾坑一社春)’

윗글은 증갱차(曾坑茶)라는 햇차를 받은 감회를 잘 드러냈다. 그가 감격했던 증갱차는 어떤 차일까. 증갱차를 정배(正焙)라 불렀는데, 황실용 차를 만드는 북원(北苑)에서도 증갱 지역에서 생산하는 차는 최고품으로 칭송되었다. 그러므로 원감국사는 감동했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증갱차에 대한 동경은 소식(蘇軾, 1036~1101)이 “한 줌의 증갱차/ 제후에게 공납되는 차이라(曾坑一社春/紫깰供千家)”라고 한 대목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차를 좋아하던 송대 명사들도 선망하던 증갱차를 금장대선사가 보냈으니 원감국사가 느낀 감동과 고마움이 행간에 묻어난다. 물욕을 여읜 원감국사도 향기로운 차에 대한 열망은 같았음을 엿 볼 수 있다. 명차는 적체와 피로를 풀어주는 청량제다.

최적의 환경에서 자란 찻잎은 천지의 활활한 기운을 머금었기에 제다의 원리를 환히 알고 있는 삼매(三昧)의 솜씨이어야 차의 순수한 향미(香味)와 기운을 갈무리할 수 있다. 명차란 화후(火候)의 조화로 만들어진다. 차의 통쾌한 기운과 시원하고 싱그러운 향미(香味)는 향상일로(向上一路)를 실천하는 수행자에게 필요한 물품이니 좋은 차에 대한 원감국사의 동경은 당연한 것이다.  <(사)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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